00162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솔직히 이제 스포츠센터라고 하면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내심 D&Y휘트니스 클럽 운영만 본궤도에 오르면 다른 종류의 프로젝트에 투입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윗선의 해외시장 진출 결정은 그런 나의 기대를 산산이 조각내버렸다.
동남아와 중국은 어떻게든 방법이 있다. 그런데 미국? 그것도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지 뉴욕? 그곳에서 성공하려면 도대체 무슨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지조차 자신이 서지 않았다.
미국 진출이 회사의 의지라면, 혹시 모를 반대파의 수작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라도 해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 진출의 원흉은 바로 윤 스포츠센터의 오너이자 시연이의 아버지인 윤승태 사장님이었다. 죄송한 말이지만 웬수가 따로 없다.
잠깐이지만 나와 시연이 사이를 여전히 인정하지 못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하려고 미국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원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잠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일의 원흉은 따로 있었다. 정말 그 놈은 한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멍청이 등신 쪼다이다. 그 멍청이가 누구냐고? 바로 나 ‘마동수’이다. 나는 예전에 윤 스포츠센터와 우리 회사 사이의 합작을 추진하기 위해 사탕발림처럼 달콤한 말을 윤 사장님 귀에 속삭인(?)적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새롭게 만든 브랜드의 가치가 높아지면 사업을 세계로 확장할 수 있다. 단순히 중국이나 동남아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미국 진출도 꿈이 아니다. 대단한 성공은 거두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그것도 심장부인 뉴욕에 ‘윤’이라는 이름을 알리자.
불가능할 것 같지만, 방법은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오히려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다. 태권도를 이용한 태극무와 한국무용과 결합한 GX 프로그램이라면 통할 것이다. 효과는 이미 입증되지 않았나?
요가도 처음부터 유명하지 않았다. 육체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까지 파고들면서 지금의 스포츠 요가가 탄생하였다. 한국무용과 결합한 GX프로그램을 ‘윤짐’이라고 이름 짓자. 그렇게 태극무와 윤짐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면 사장님은 미국에서 ‘마스터’라고 불리는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다.
과거에 내가 했던 말을 곰곰이 떠올려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자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로 윤 사장님을 설득했을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우리 회사의 자금력과 윤 스포츠센터의 노하우가 있는데, 정말 미친 듯이 노력하면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성공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과 들여야 할 고생의 강도이다.
뉴욕에 우리 회사에서 운영하는 호텔만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좌절하지는 않았겠지만, 동지그룹 뉴욕사무소를 제외하면 아무 기반도 없다. 그것은 곧 그냥 맨땅에 헤딩하며 개고생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런 기약 없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눈앞이 캄캄했다.
“자, D&Y휘트니스 클럽의 해외 진출을 위한 첫 번째 회의입니다. 우선 감사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밤낮 없는 노고 덕분에 D&Y휘트니스 클럽의 국내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저도 대우라는 꼬리표를 떼고 정식 팀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인수인계를 모두 마치고 우리 팀과 석나련 실장의 팀은 해외 진출을 위한 첫 번째 미팅을 했다. 그리고 우리의 조기훈 팀장님은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팔자 좋게 자신의 승진에 대해 감사인사부터 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석나련 실장님. 회의 방향에 대한 의견 있으십니까?”
“오늘이 첫 번째 회의이니 처음부터 너무 세부적으로 들어가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대략적인 밑그림부터 잡고, 그 밑그림을 완성한 다음 세부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죠.”
“대략적인 밑그림이라. 좋은 말씀이네요. 우리가 찰흙으로 인형을 만들 때 철사로 뼈대부터 만들죠. 건물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
“흠흠. 팀장님.”
허당끼 있는 우리 팀장님은 또다시 회의진행을 하다가 삼천포로 빠졌고, 결국 내가 옆에서 볼펜으로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주의를 환기했다.
“아, 죄송합니다. 어쨌든, 밑그림을 완성하려면 우리가 가장 먼저 진출할 지역부터 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군요. 다들 동의하시죠?”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팀장님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그럼 미국, 중국, 동남아 중 어디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의견 있으십니까? 네, 한정석 과장 말씀하세요.”
“어려운 일부터 해결했으면 합니다. 고생은 하겠지만, 미국에서 성공만 하면 그 명성만 가지고도 중국과 동남아에 진출하기 매우 용이해집니다.”
끈기 있고 저돌적인 한정석 과장은 자신의 스타일처럼 미국 진출을 주장했다. 잔머리 굴리기를 좋아하는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멋있긴 하다. 그래도 효율성을 생각하면 저건 아니다.
중국과 동남아 시장에서 성공하고 미국 시장에서만 실패한다면 변명거리라도 있다. 하지만 미국 시장부터 먼저 시작했다가 실패하면 모든 게 실패로 끝난다. 한 과장이야 인간 중심의 경영을 하는 윤 사장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실패해도 잘릴 걱정은 없는지 몰라도, 우리 팀원들은 다르다. 실패와 함께 그대로 모가지다.
주위를 돌아봤는데, 석 실장 쪽 사람들은 한 과장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고 우리 팀원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다들 승진의 여운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는지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젠장. 결국, 이번 프로젝트 성공을 통해 유일하게 승진하지 못한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음. 미국 시장의 성공을 기반으로 중국과 동남아에 진출하자? 괜찮은 의견이군. 응? 그래, 마대리. 다른 의견 있어?”
“미국 시장의 성공. 좋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쉽지 않은 프로젝트입니다. 게임으로 설명하자면 미국의 뉴욕은 최종보스와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부터 가자고요?”
“그래서 중국이나 동남아부터 시작하자고?”
“게다가 중국이나 동남아라고 해서 경쟁자가 생기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지난번 일을 생각해보세요. 갑자기 가야그룹과 대박 스포츠센터가 끼어드는 바람에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미국은 이미 경쟁자들이 넘쳐나는 시장이고, 중국이나 동남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확실한 시장부터 선점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미국 시장이라고 해서 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한정석 과장은 내가 그의 이름을 이용해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 도발했다고 느꼈는지 바로 반격해왔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한정석 과장님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뭘 간과했다는 이야기죠?”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요?”
“글쎄요. 워낙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이 가능한 나라라서. 질문의 정확한 의도를 설명해준다면 답변하죠.”
“바로 그겁니다.”
“네?”
“바로 그거라고요.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 가능한 나라. 다양성의 나라. 다양한 인종이 있는 나라. 역시 한정석 과장님이십니다.”
“흠흠.”
오늘따라 내가 왜 이렇게 깐죽거리는지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덕분에 한정석 과장만 나에게 열나게 씹히고 있었다. 설마 나만 승진에서 제외되었다고 나도 모르게 내가 삐친 건가?
“어이. 마 대리. 장난 그만하고 세부적인 설명도 해봐.”
나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조 팀장님은 세부적인 설명을 지시하셨다.
“동남아 중 인도네시아는 2억 5천만, 필리핀 1억, 태국 7천만, 말레이시아 3천만, 타이완 2천만, 베트남 9천만. 빠진 나라도 있겠지만, 동남아만 해도 어마어마한 인구입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죠. 무려 10억입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지구 인구의 절반은 중국과 동남아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그냥 상징성만 있을 뿐 큰 이익은 얻기 힘들죠. 그런데 중국과 동남아는 다릅니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거기다가 뉴욕에는 백인만 삽니까? 아니면 백인과 흑인만 삽니까? 아니죠. 동양인들도 삽니다. 뉴욕에 진출한다고 해서 굳이 백인이나 흑인을 타깃으로 잡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동양인들을 타깃으로 잡자? 동양인들이라고 해서 우리 스포츠센터에 무조건 등록한다고 볼 수는 없잖아.”
“그래서 동남아와 중국 시장이 필요한 겁니다. 동양인들은 국적은 미국이라도 모국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모국에서 유행하는 것은 미국에서 유행하기도 하죠. 우리가 중국과 동남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다음 미국에 진출한다면 당연히 앞 다퉈 우리 스포츠 센터에 등록하려고 하겠죠.”
“음. 과연. 일리가 있어.”
조 팀장님을 포함한 회의실 사람들 대부분이 나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남아에 가장 먼저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응? 그건 왜 그렇지?”
“동남아의 상류층은 대부분 화교입니다.”
“아! 그렇군. 화교를 주 타깃으로 잡아서 성공한다면 중국 진출도 용이하겠군.”
“네. 어차피 중국은 현지인 없이 단독자본으로 스포츠센터를 짓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동남아 시장에서 화교들과 친분을 쌓은 후 믿을 만한 현지인을 소개받을 수도 있고, 공통 투자를 할 수도 있습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이후로도 여러 의견이 오갔으나 결국 내 주장처럼 동남아 국가 중 하나를 첫 번째 진출국으로 정하는 것에 의견이 일치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시연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제야 오늘 내내 내 기분이 다운된 이유를 깨달았다. 해외시장에 진출하면 해외 출장이 빈번할 테고, 그러면 시연이와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시간이 확연히 줄게 된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그게 속상해서 온종일 기분이 저기압이었다.
그리고 새삼스레 시연이를 향한 내 마음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 작품 후기 ============================
한번도 못해본 노블 1등을 이렇게 해보네요. ㅠ 감사합니다. 정말 생각지도 않은 많은 분들이 제 글을 기다려주셔서 감동받았습니다. 비판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그만큼 저를 기다리고 걱정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죄송합니다.
아직도 예전에 무슨 생각으로 복선으로 깔고 설정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글을 쓸때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빠르게 쓰지는 못해도 꾸준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인칭 소설이고 동수가 말하는 톤이 있었는데, 오늘 올린 글의 느낌이 예전 톤과 비슷한지 걱정입니다. 오늘 반응이 괜찮으면 좀 더 자주 글을 올릴 수 있겠지만, 느낌이 다르다는 의견이 많으면 좀더 수정 과정을 거쳐야겠죠.
내용이 가물가물한 분들 중에 다시 정주행하기 귀찮으신 분들은 156회에 등장인물 소개가 있습니다.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