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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63화 (163/424)

00163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회의가 들 정도로 매일같이 회의만 했다. 조지훈 팀장, 김수현 과장, 나, 정지영 대리, 태준호 주임. 우리 팀만 해도 다섯 명이다. 거기다 윤 스포츠센터 측은 석나련 실장, 한정석 과장, 김동호 대리. 이렇게 세 명이니, 회의 참석자는 총 8명이다. 그런데도 의견일치가 너무 힘들었다. 발언권이 없는 대학 후배인 인턴 3명은 제외했다.

당연히 인구가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로 가야 한다. 인구가 무려 2억 5천만 명이다. 아니다. 거긴 대체 섬이 몇 개냐? 기대할 수 있는 파급력이 생각에 못 미칠 가능성이 크다.

타이완으로 하자. 거리상으로도 가깝고 괜찮을 것 같다. 안 된다. 타이완 인구가 고작 2천만이다. 게다가 괜히 타이완에 진출했다가 중국에게 밉보이면 곤란하다.

그럼 태국으로 하자. 경제력도 괜찮고, 인구수도 적당히 많고, 섬나라도 아니다. 거긴 옹박의 나라 아닌가? 왠지 헬스보다는 무에타이를 배울 것 같다. 그게 지금 반대 의견으로 할 소리냐?

그냥 필리핀으로 하자. 타이완 다음으로 가깝고, 영어를 사용한다. 대화가 통한다는 건 정말 중요한 장점이다. 영어 때문에 한국 유학생들도 은근히 많다. 바보냐? 필리핀도 섬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대강 이런 내용이 오갔다. 물론 ‘바보’라는 표현까지 주고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회의하는 꼴이 바보 같아 보였을 뿐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사가 하나씩 빠진 모습이었다. 국내에서의 성공에 고무되어 해외진출이 만만하게 보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식의 설렁설렁하게 회의가 진행될 리가 없었다.

“저기, 팀장님.”

“그래, 마 대리. 첫 회의 날 말고는 계속 입 다물고 있더니, 드디어 의견이 생긴 거야?”

“아뇨. 그냥 할 말이 있어서요.”

“할 말? 그래 해봐.”

“다들 지금 기분이 붕 떴죠? 엄청난 금액의 성과급도 받고, 승진도 했으니 세상 무서울 것도 없고 그렇죠?”

“야! 마 대리. 너 갑자기 왜 그렇게 비꽈? 뭔가 불만이라도 있어?

나의 직설적인 발언에 조 팀장님이 깜짝 놀라 제지하려고 했다.

“당연히 불만이 있죠. 답답해서 그래요. 답답해서. 진짜 물어보고 싶은데, 우리가 해외로 진출만 하면 무조건 성공할 것 같아요? 준호야.”

“네. 마 대리님.”

“미안한데, 그래도 제일 만만한 게 너니까 어쩔 수 없네. 이해해줘.”

“네?”

“너! 타이완으로 정하자고 의견 냈지? 대체 왜?”

“동남아 국가 중에서는 한국과 가장 가깝고 경제력이나 문화도 가장 발달해있고...”

“타이완이 대만인 건 알고 있냐?”

“마 대리님! 당연히 알죠.”

자기를 무시한다고 느꼈는지 준호가 발끈했다. 자식. 지금 사람들 앞에서 ‘욱’했다는 거지? 주임 달더니 이젠 나까지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반가웠다. 아무 죄책감 없이 밟아줄 명분을 만들어줘서. 원래 신입은 밟히면서 성장하는 보리 같은 존재인 법이다.

“그럼 우리나라와 대만 사이에 국교가 단절된 건 알고 있어?”

“네? 그, 그게.”

물론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준호는 딜레마에 빠졌다. 알고 있다고 하면 국교가 단절된 나라를 첫 진출 국가로 정한 개념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모르고 있다면 기본 상식도 없는 바보 같은 인간이 된다.

“그럼 중국과 대만의 관계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

“아, 그게. 그게 말이죠, 마 대리님.”

“어허. 이 녀석 보게. 그럼 팀의 막내가 깊이 생각도 해보지 않고, 회의 석상에서 의견을 냈단 말이야? 하나만 더 물어보자. 회의 첫날, 첫 번째 해외진출 시장으로 동남아를 선택했어. 그럼 집에 가서 당연히 동남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해와야겠지?”

“그, 그렇죠.”

“사실 말이야. 준호 네가 일도 잘하고 말귀도 잘 알아들어서 은근히 기대했어. 동남아 국가에 대해 공부하고 분석해서 만든 핸드아웃을 회의 전에 나눠주는 센스 정도는 있으리라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마 대리님.”

“대체 이유가 뭐야?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와도 모자를 판에 그냥 평소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 회의에 참석하는 용기는 어디서 난 거야?”

“마 대리. 네 말이 틀린 건 아닌데, 그래도 적당히 하자.”

이야기는 준호를 보며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다들 속으로 뜨끔했을 것이다. 회의하는데, 주제에 대해 최소한의 공부도 하지 않고 참석했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게 현재 우리 팀의 문제였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한마디만 더 할게요.”

“그래,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 해봐.”

“제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요? 회의가 진전이 없잖아요. 내용은 계속 겉돌고, 집중은 하지 못하고. 지금 우리 팀에 회사 전체의 이목이 집중되었다는 사실은 다들 알 겁니다. 순수하게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 잘 알지 않습니까? 조금만 삐걱거리면 사람들이 그대로 놔 둘 것 같습니까? 하이에나처럼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뜯어먹으려고 덤빌 겁니다.”

조금 들떴던 회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실 나보다 상급자인 팀장님도 있고, 김수현 과장도 있다. 게다가 석나련 실장이나 한정석 과장도 내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믿음 때문이다. 나의 행동을 건방지다며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 녀석이 저렇게 말한다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라며 존중해줄 것이라는 믿음. 나와 우리 팀원 사이에 그 정도 신뢰는 충분히 쌓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용해진 회의 석상을 한 번 둘러보고 계속 말을 이었다.

“동남아라서 쉬워 보이십니까? 대한민국보다 후진국이니까 우리가 진출만 하면 ‘어서 옵쇼’하며 반갑게 맞아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빠른 승진에 더 이상의 동기부여의식을 잃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쉽게 승진하고 보니 앞으로도 계속 승승장구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긴 겁니까?

제가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동남아 시장 진출에 실패하잖아요? 최소한 전원 대기발령입니다. 이번에는 준호도 마찬가지죠. 예전이라면 신입이라 봐줬겠지만, 이젠 주임을 달았으니 책임도 그만큼 막중해진 거죠. 변명할 기회도 없이 그냥 사표를 써야 하는 상황으로 몰릴 텐데, 이렇게 건성건성 회의에 참석하고 싶으세요?”

내가 말을 마치자 회의실은 더욱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조 팀장님이 입을 열었다.

“흠. 마 대리 말이 맞아요. 어쩌면 방심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프로젝트가 힘들긴 했어도, 노력한 이상의 보상을 받았죠. 그러다 보니 나사가 풀린 것 같습니다. 마 대리가 성격은 좀 지랄 맡아도 절대 틀린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라고 제가 보증합니다. 준비가 허술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석나련 팀장님.”

“아닙니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남아에 포함된 나라가 총 몇 개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부끄럽네요. 확실히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힐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까지 동남아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오세요. 시간이 부족하다는 그런 말 듣지 않겠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해오세요. 그럼 오늘은 해산.”

그렇게 오늘 회의는 평소보다 빠르게 마무리했다. 나는 잔뜩 주눅 들어 있을 준호를 데리고 술집으로 향했다. 숙제?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팀원 간의 팀워크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사람들 앞에서 준호를 제대로 망신 줘버렸다.

물론 준호 성격이라면 자책을 하지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 순식간에 사이가 벌어지는 것이 인간관계다. 무엇보다 준호는 팀장님과 나처럼 절대적 신뢰를 쌓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럴 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전에 미리미리 손을 써두는 게 좋다.

“아니, 마 대리님. 오늘 회의에서 분위기도 안 좋았는데, 이렇게 술집으로 끌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준호야.”

“네, 마 대리님.”

“아까는 서운했지?”

“아뇨. 제가 왜 서운합니까? 마 대리님 말씀 듣고 정말 부끄러워졌습니다. 주임을 달았다고 해도, 경력으로 따지면 사실 아직 신입이잖습니까. 그런데 회의 주제에 대해 공부도 안 해오다니. 실망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래도 내가 미안하다. 다들 나사가 빠진 것처럼 헬렐레하고 있는데, 눈 뜨고 보고 있을 수가 없더라.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나섰는데. 어쩌냐? 가장 만만한 게 준호 너잖아. 그렇다고 팀장님이나 김 과장을 깔 수도 없고. 말은 만만하다고 했지만, 사실 내가 널 그만큼 믿기 때문이야. 알지?”

“그럼요. 대리님. 아까도 저를 믿고 있었다는 말씀에 괜히 가슴이 짠했습니다. 진짜 하나도 서운하지 않아요.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꼭 믿음에 보답하는 태준호가 되겠습니다.”

솔직히 믿음보다는 만만함이 더 컸다. 거기서 다른 팀원을 깔 수도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인턴을 깔 수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네가 만만해서 그런 거라고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술집까지 끌고 와서 대화하는 의미가 사라진다.

“원래 1년차에는 실수하면서 크는 거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고 훌훌 털어버리자. 자 쭈욱 한잔하자.”

“크으. 그런데 마 대리님. 오늘 너무 많이 마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내일 아침까지 동남아에 대해서 숙제해 가야 하는데.”

준호는 아직 대학물이 덜 빠졌는지, 아까 팀장님이 말씀하셨던 숙제라는 말에 집착했다. 준호의 마음은 이해한다. 다른 사람은 집에 가서 자료조사를 하고 있을 텐데, 자기는 나에게 붙잡혀 술이나 마시고 있으니 얼마나 조마조마하겠는가?

“자, 이거 받아.”

그리고 감춰왔던 비밀무기(?) 꺼내 준호에게 건넸다. 휴대용 USB였다.

“네? 이게 웬 USB입니까?”

“동남아에 대해 그동안 자료 조사한 내용이야. 이따 집에 가서 숙지하고 와.”

“자료요? 언제 이렇게 조사하셨어요?”

“해외진출 준비하라는 말이 들렸을 때부터 이미 준비하고 있었지. 많이 모아뒀으니까 꽤 쓸만할 거야.”

“마 대리님!”

나는 꽤 쿨한척하며 틈틈이 모아둔 동남아 관련 자료를 준호에게 넘겼다. 녀석의 얼굴은 지금 감동의 물결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아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직장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운신의 폭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이런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아니다. 준호가 그만큼 괜찮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준호를 이용하려고 이러는 것도 아니다. 팀원 간에 단단한 신뢰가 생기면 함께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공지글과 글 한 편 올리고 3일 동안 노블 1위를 하고보니 꼭 사기 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부끄럽네요. 얼른 있어야 할 순위로 내려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독자님들의 기대 이상의 관심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동수의 어투가 예전보다 조금 더 사악해진 것 같은데, 그렇게 이상하진 않은가 봐요? 걱정했는데 딱히 별말씀이 없으시네요. 정말 별문제가 없다면 참 다행인데요. 전 아직도 어색하네요. ㅠ

사실 제게 배신감을 느껴 쿠폰 선물 같은 건 거의 안 하실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많이 주셔서 감동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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