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4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미친 척 들이받은 덕분인지 다음날부터는 회의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각자 알아온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가끔은 격렬하게 토론도 했다. 확실히 이전보다 열정이 느껴졌다. 때마침 각 지사에서 올라온 동남아에 대한 정보들은 회의의 질을 더욱 높였다.
그런 덕분인지 첫 번째 진출국을 정하는 회의는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끝났다.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필리핀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었다.
일단 필리핀은 타이완 다음으로 한국과 가깝다.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가 영어라는 것은 정말 큰 장점이다. 물론 타가로그어도 함께 사용한다. 어쨌든, 영어가 통한다는 이야기다. 우리 회사에 들어올 정도면 웬만한 정도의 영어 실력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는 건 누가 필리핀에 가도 큰 불편함 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일하러 외국에 나갔는데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불편한 일도 없다. 통역사를 고용하면 되긴 하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받은 이야기는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불편하다. 불편하기만 하면 다행이다. 의미 전달 과정에서 오역이라도 생기면 비즈니스에 큰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고, 우리가 필리핀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필리핀의 인구는 약 1억이 넘는 세계 12위의 국가다. 경제적으로는 GDP가 2천억 달러가 조금 넘는 세계 40위권의 평범한 나라이지만, 인구가 많은 만큼 부유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게다가 이슬람교가 강세인 다른 나라에 비해 카톨릭이 83%, 개신교가 9%인 나라가 필리핀이다. 어느 정도 노출이 있어야 하는 헬스의 특성상 이슬람교의 비중이 적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섬나라라는 단점이 있긴 하다. 그러나 수도인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에만 5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산다. 섬 하나가 한반도보다 넓고 거주하는 인구도 우리나라보다 많은데, 굳이 다른 섬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팀원들의 중론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룹 계열사인 동지호텔이 있기 때문에, 연계해서 업무를 추진하기도 편했다.
“그럼 필리핀을 우리가 진출할 첫 번째 나라로 결정했습니다. 장소는 필리핀의 대표적 부자 지역인 보니파시오, 마카티, 올티가스 중 하나로 선택해야 하는데, 이건 결국 우리가 출장을 가서 직접 선택해야겠죠. 시장 적합성 검사도 해야 하고, 동지호텔에 협조 공문을 발송해서 확답도 받아야 하고. 이제 굉장히 바빠질 겁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출장. 결국, 출장을 가야 했다. 어떻게든 출장에서 빠져보려고 했지만,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신 바짝 차리고 있던 내가 적임자라며 만장일치로 책임자를 만들어버렸다. 회의를 그따위로 진행해놓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내가 한마디도 안 했으면, 긴장감 없이 회의만 계속하다 프로젝트는 실패하고 회사는 잘렸을 사람들이다. 내 덕분에 정신 차렸으면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데, 이건 무슨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정말 내가 내 무덤을 판 셈이다.
갑자기 군대에서 많이 들었던 충고가 떠올랐다. ‘적당히 해라. 못해도 손해지만, 잘해도 손해인 것이 인생이다.’ 맞다. 내가 깜박 잊었다. 괜히 답답한 마음에 나섰다가 팔자에도 없는 필리핀 현지 책임자가 되어버렸다. 빌어먹을.
“아, 그리고 마대리.”
“네. 팀장님.”
“필리핀에 함께 갈 멤버는 자네가 마음대로 정해.”
“저보고 책임자 하라면서요.”
“그랬지.”
“그런데 무슨 멤버를 제 마음대로 정합니까?”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가끔 보면 팀장님은 정말 능구렁이 같으세요.”
“뭐야?”
나의 농담 같은 투정에 팀원들이 웃음을 지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제가 책임자인데 저보다 높은 직급인 사람들을 동행으로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음. 가능할 수도 있지. 어쨌든 책임자는 마 대리 너잖아.”
“오! 그래요? 그렇다면, 저는 조지훈 팀장님과 꼭 같이 가고 싶습니다.”
“야! 마 대리. 너 자꾸 이럴 거야?”
“왜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예전에 해지스 김 마담 앞에..”
“아. 그, 그만.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죽일 놈이다. 됐냐, 됐어?”
최근 팀장님이 석나련 실장님과 뭔가 야릇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 같아, 은근히 심술을 부려봤다. 나의 심술에 조 팀장님은 안절부절못하고 석나련 실장님을 쳐다봤지만, 석 실장님은 순간 기분이 상했는지 계속해서 시선을 회피했다. 이 정도면 소심한 나의 복수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왜 이상한 말씀을 하셔서. 멤버를 제 마음대로 정하라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어차피 우리 쪽에서는 준호, 윤 스포츠센터에서는 김동호 대리. 이렇게 두 명밖에 갈 사람이 없는데.”
사실이 그렇다. 내가 책임자인데, 나보다 직급 높은 사람을 데려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턴을 데리고 갈 수도 없다. 그럼 남는 건 정지영 대리, 태준호 주임, 김동호 대리 이렇게 세 명밖에 없는데, 정지영 대리는 여자라서 불편할 수밖에 없다. 4차원 성격도 좀 무섭고.
“어머. 마 대리님. 저는요? 저도 마 대리님 부하직원인걸요. 아무리 같은 대리가 되었다고, 설마 제가 마 대리님을 부려 먹겠어요?”
아니나 다를까? 정지영 대리가 대뜸 나섰다. 하지만 4차원은 정말 사양이다.
“미안하지만 정 대리는 안 돼.”
“왜요?”
“저번에 철거현장에서 잊었어? 웃통 벗고 도롱뇽 살리자고 난리법석 떨었던 거 말이야. 어휴. 내가 그 분위기에 취해서 철거현장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한순간에 비명횡사할 뻔했잖아.”
“에이.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면 그럴 수도 있죠. 호호호.”
“됐어. 괜히 남의 나라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괜히 나라 망신시키지 말고 조용히 한국이나 지켜주라고. 혹시 알아? 기분에 취해 이번엔 치마를 벗어버릴지.”
“아잉, 마 대리님!!”
“어허.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는 부리지 말고. 이번에는 있어줘. 나중에 미국 가게 되면 내가 책임자 자리를 정 대리에게 양보할 테니까.”
“자자.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 기본적인 마케팅 방안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겠지?”
석 실장님이 계속 시선을 피해서 그런지 조 팀장님이 우리의 만담에 끼지 않고 빠르게 회의를 진행하셨다.
“필리핀, 아니 동남에서 성공할 가장 좋은 마케팅 방법은 역시 하나밖에 없겠죠.”
“그래? 그게 뭔데, 김 과장.”
지난 프로젝트 성공으로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한, 그리고 내 친구 장현우의 애인인 김수현 과장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한류를 이용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죠.”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봐. 마 대리.”
“네, 팀장님. 예전에 우리 어린이날 행사 할 때 말이야. 그 때 브이걸이랑 친분 좀 쌓지 않았어?”
“에이. 그게 언제적 일인데요. 게다가 동남아는 브아걸로 안 될걸요.”
“응? 왜? 걔네들도 상당히 인기가 있는 걸로 아는데?”
조 팀장님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길 묻는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이 양반이 중년은 중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기야 있지만, 여자팀이잖아요.”
“그게 어때서?”
“동남아에 한류열풍이 불고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지만 인기 대부분은 남자 아이돌이나 남자 탤런트에게 몰리고 있어요.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비슷하다고 해도, 동남아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게 현실입니다.”
“마 대리님 말이 맞습니다. 팀장님. 국내 인지도가 비슷하기 때문에 홍보용으로 이용하려면 비슷한 비용이 들 수밖에 없는데, 동남아에서 거둘 수 있는 효과는 큰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자 아이돌을 섭외했으면 하는 게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음. 김 과장까지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저도 같은 생각이에용, 팀장님. 빅뱅 짱. 빅뱅 강추드려요.”
“이봐. 정 대리.”
“넹?”
“한 번만 더 코맹맹이 소리 내면 이번 프로젝트에서 빼서 제주도로 보내 거릴거에용.”
“에잇. 팀장님은 꼭 나만 미워하시더라.”
“그럼. 남자 아이돌을 마케팅으로 활용하기로 하고. 세부적인 사항은 홍보부에 협조를 구해서 진행하라고. 아무래도 연예계는 그쪽이 빠삭하니까. 자,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거기 삐쳐있는 정 대리?”
“네. 팀장님.”
“자네가 홍보부와 연락해서 괜찮은 아이돌로 추려봐.”
“정말이요?”
조 팀장님의 이야기의 시무룩해 있던 정 대리의 얼굴이 태양 빛처럼 밝아졌다.
“단, 빅뱅은 안 돼.”
“아니, 왜요?”
“좀 긴 프로젝트고, 우리 요구 사항이 좀 먹히려면 빅뱅보다는 레벨이 낮아야겠죠. 내가 빅뱅을 알아. 그 정도면 얼마나 유명한 그룹인지 안 봐도 뻔하잖아. 너무 큰 돈 들이지 않아도 되지만, 효과는 클 수 있는 그런 그룹 한 번 찾아봐. 싫으면 말고.”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잘할게요.”
“그래? 그럼 정 대리가 맡는 걸로 하고 회의는 여기서 마치자고.”
길고 길었던 회의는 끝이 났고, 퇴근하는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조금 있으면 시연이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떴다. 최근에는 너무 바빠서 틈틈이 얼굴만 잠깐 보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었다.
============================ 작품 후기 ============================
나흘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자주 올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번 파트에 대해 의견이 많을 것 같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무리수는 절대 아닙니다. 연중하기 전부터 계획했던 이야기고, 앞으로 주인공의 행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는 사건입니다.
막 비상식적으로 이야기가 잔행되고 그러지는 않을겁니다. 기대하고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