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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67화 (167/424)

00167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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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내뻗은 속눈썹은 더욱 풍성한 인조 속눈썹으로 강조하고, 매끈하고 오뚝한 콧대는 더욱 높아 보이도록 화장솔로 은연한 펄이 섞인 하이라이트를 주었다.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 위로는 얇은 붓이 미끄러지듯 교대로 움직였고 그때마다 반짝이는 붉은 색깔을 채색해 갔다.

보라빛 실크 원피스 위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우아한 윤기를 머금고 물결치듯 흘렀다. 큰 키에 어울리는 긴 목과 팔다리와 옷 밖으로 살짝 드러나는 아득히 계곡이 잡히는 풍만한 가슴과 콜라병처럼 잘록한 허리. 높은 힐과 더불어 시연의 몸매는 동양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완벽한 8등신의 여신이 강림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화장실에서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확인한 그녀는 당당한 듯 도도한 걸음걸이로 마테오관을 빠져나와 서강대 정문으로 향했다. 마테오관에서 서강대 정문까지 500m도 안 되는 짧은 거리였지만 수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처음에는 불쾌하기만 하던 시선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익숙해져서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툭.

정문에 거의 도착할 무렵 시연의 어깨에 매달려있던 가방끈이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참. 이게 뭐야. 오랜만에 동수씨와 데이트한다고 해서 일부러 예쁜 가방을 가져왔는데, 하필 끈이 떨어질 뭐람. 히잉.”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들며 울상을 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옷부터 가방까지 나름대로 완벽하게 준비하고 왔는데, 가방끈이 시연의 들떴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가방을 바꾸러 집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약속 시각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끈이 떨어진 가방을 어정쩡하게 들고 정문 앞 도로변에서 동수의 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10분, 20분, 30분. 약속 시각이 훨씬 지나났는데도 동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전화를 걸어 봐도 받지를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던 그였다. 시연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택시를 잡아타고, 동수가 사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서강대에서 그의 오피스텔까지는 자동차로 겨우 5분 거리였다. 택시가 도착했고, 차에서 내린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기분 탓인지 엘리베이터는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올라가는 것 같았다.

동수가 사는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시연은 아까보다 더욱 빠른 걸음으로 그의 집 현관 앞으로 향했다.

띠리릭

익숙하게 현관 도어락의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익숙한 동수의 스킨향이 그녀를 반겼지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점점 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그의 차가 있는 지하로 내려왔다. 동수가 즐겨 타는 BMW X5는 그대로 있었지만, 출퇴근용으로 사용하는 모닝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먼저 연락을 줬을 것이다. 설마 오다가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닐 거라며 강하게 부정하고 혹시 다른 곳에 차가 있는지 주차장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주차장 한쪽 구석에서 익숙한 모양의 구두를 한쪽 발견했다. 아무래도 동수의 구두로 보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CCTV부터 살펴봤다. 그런데 CCTV는 페인트 같은 물질로 렌즈 부분이 막혀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심장이 두근 반 세근 반 뛰기 시작했다.

눈물이 시연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고 전화를 걸었다.

“시연아. 웬일이야? 이 시간에 삼촌에게 전화를 다 주고. 왜 오랜만에 삼촌이랑 데이트라고 하고 싶었어?”

“흑흑. 삼촌.”

“시연아? 지금 우는 거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오랜만에 걸려온 조카의 전화에 반갑게 전화를 받던 윤 서장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랐다. 항상 씩씩하고 똑 부러지는 아이였는데, 전화를 걸자마자 눈물부터 흘리다니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삼촌. 동수씨가. 동수씨가. 흐흑.”

“동수? 동수라면 네 약혼자잖아. 왜? 그 낮도깨비 같은 녀석이 너한테 뭐라고 그랬어?”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그 사람 사는 오피스텔 주차장인데, 동수씨가 구두만 남겨두고 사라졌어. 주차장 CCTV 렌즈는 페인트 같은 걸로 막혀있고. 어떡하지? 납치라도 된 걸까? 삼촌 나 어쩌지?”

윤 서장은 조카의 말을 들으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시연을 겨우 달랜 다음 자신의 관할서인 서초경찰서와 동수가 살고 있는 마포경찰서에 비상을 걸었다.

***

어디선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지? 그리고 여긴 어디지? 아, 여긴 병원이지. 그러고 보니 저 시끄러운 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그 순간 후다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급히 병실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 제수씨 왔어요?”

“안녕하세요. 광우 오라버니. 도, 동수씨는요?”

이 목소리는 시연이다. 자동차 트렁크 안에 갇혔을 때 사무치게 듣고 싶었던 그녀의 목소리였다. 바로 옆에 그녀가 있는데도 반가움과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그런데 광우? 어쩐지 목소리가 능글맞은 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 병실에서 시끌벅적 떠들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나의 유일한 경찰 친구인 광우였던 모양이었다.

“보시다시피 저기 있어요. 사람들 걱정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팔자 좋게 자고 있죠.”

“몸은요? 몸은 괜찮은 건가요?”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말로는 단순한 찰과상과 타박상 말고는 멀쩡하다고 하네요.”

“휴. 정말이죠?”

“하하하. 그럼요. 제수씨. 아무렴 제가 제수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말씀드렸잖아요. 의식을 잃은 게 아니라 잠이 들었다고.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겁니다. 아니면 이미 깨어났는데 민망해서 자고 있는 척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아,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야. 흑흑.”

안도하는 목소리와 함께 시연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마나 애가 탔을지, 얼마나 걱정 했을지. 보지 않아도,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괜찮다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사고의 후유증 때문인지 아직은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으... 음...”

목소리라도 내보려고 했다. 그러나 목이 잠긴 듯 쇳소리만 났다. 내가 원래 이렇게 몸이 허약했나 싶어 짜증이 났다.

“어, 제수씨! 동수 깼나 본데요.”

“동수씨. 동수씨. 다행이에요. 흑흑.”

“으윽.”

목소리라도 내보려고 뒤척이던 모습을 광우가 보고 시연이에게 알렸고, 그녀는 내가 깨어났다는 소리에 덮치듯 나에게 안겨왔다. 순간 타박상 때문인지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나왔다. 그래도 반갑고 좋았다. 품에 안긴 그녀에게서 나는 매혹적인 향기는 확실히 내가 살아났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꿈이라면 이렇게 생생한 향기가 느껴질 리가 없었다.

“어머. 괜찮아요? 미안해요. 깨어났다는 말에 너무 반가워서. 많이 아팠어요?”

내가 지른 비명에 시연이가 더 놀란 것 같았다.

“괘앤차나. 별로 안 아파써. 우리 시여니는 솜털처럼 가벼워서 안 아파.”

“어쭈. 정말 괜찮은가 보네. 그런 농담도 다 하고?”

시연이와 눈짓으로 손짓으로 나의 무사함을 함께 기뻐하고 있었는데, 눈치도 없이 광우 녀석이 끼어들었다.

“솜털 마꺼든.”

“그럼 내가 한 번 불어 봐도 돼? 제수씨가 정말 날아가는지 안 날아가는지?”

아. 저놈의 새끼. 하여간 저렇게 눈치가 없으니 생긴 게 멀쩡해도 여자 친구들이 오래 버티질 못한다. 평소에는 내가 형님이라고 모셔야 할 만큼 눈치가 빠른데, 여자 앞에만 서면 저렇게 등신 꼴값만 떨고 만다.

광우의 눈치 없는 농담에 시연이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손가락을 까닥이며 녀석을 불렀다. 광우는 수사에 대해 이야기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내 입가로 귀를 가져다 댔다.

“야이, 씨댕아. 누굴 보고 제수씨야! 형수님이라고 안 해?”

시원하게 욕 한마디를 하자 막혔던 목이 시원하게 틔었다.

“하하하. 제수씨. 정말 이제 이 녀석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농담뿐만 아니라 욕도 아주 자유자재입니다. 그리고 자꾸 나가라고 눈치를 주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머, 벌써요? 좀 더 있다가 가시죠.”

“아닙니다. 저는 이제 범인 잡아야죠. 어이, 똥수. 곱창집 그놈들이지?”

확실히 엘리트 경찰답게 누가 나를 납치했었는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응. 맞아.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한 명 꼈어. 채은성이라고.”

“채은성? 그건 또 누군데?”

“지금은 시연이 어머님께서 인수한 출판사의 예전 사장. 세금포탈문제로 구속까지 됐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풀려났어.”

“짜식. 생각보다 여기저기 원한을 많이 쌓아놓고 다니네. 그러다 스포츠센터 성폭행 가해자들도 나중에 풀려나면 너 찾아가는 거 아냐?”

“야.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도 마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하하하. 아무튼, 형님은 이만 가보마. 물어볼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할게. 혹시 몰라 애들 두 명 병실 입구에 배치해뒀어. 실력 좋은 녀석들이니까 안심하고 쉬어라. 제수씨. 전 이만 가볼게요.”

“네. 광우 오라버니. 조심해서 가세요.”

광우가 떠나자 나는 시연이의 손부터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걱정 많이 했어?”

“그럼요.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요. 저번에도 건물에서 추락할 뻔했다고 하더니, 정말 동수씨는 왜 그렇게 험한 일만 생길까요?”

“글쎄. 아무튼, 우리 시연이 걱정하니까 앞으로는 정말 조용히 살려고.”

조용히 살 생각이다. 물론 대외적으로만. 출판사에서처럼 내가 전면으로 나서는 일은 앞으로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요?”

“그런데 시연아.”

“네? 왜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응? 어떻게 알았지? 지금 마스카라가 번져서 완전 판다 같아.”

“어머. 난 몰라. 어쩜 좋아.”

시연이는 나의 말에 놀라 얼굴을 가리고 재빨리 화장실로 향했다. 얼마나 경황이 없고, 걱정되었으면 얼굴이 저렇게까지 엉망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들었다.

============================ 작품 후기 ============================

항상 실망만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저 나름대로는 이 글에 대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래도 믿고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힘이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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