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4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동지마트. 대형 할인마트 서열 5위.
5위면 상위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 할인마트 중에서 당당히 꼴찌. 그것도 거의 압도적으로 꼴찌다. 사실상 1, 2위가 대형 할인마트 시장을 독식하고 있고 3위 업체도 겨우겨우 적자만 면하고 있는 상황이니 5위야 말해 뭐하겠는가.
우리 동지그룹 오너께서 추진한 사업 중에 거의 유일하게 참패를 맛본 곳이 바로 동지마트다. 대형 할인마트 시장이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의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조만간 정리할 것이라고 소문이 도는 암울한 계열사에 나를 밀어 넣었다는 것은, 납치 사건을 윗선에서 굉장히 불쾌하게 받아들였던가 아니면 또다시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이야기다. 분위기가 어째 동지랜드로 발령 났을 때와 비슷하게 흐른다.
그냥 때려치울까?
갑자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회사 그만두는 건 어렵지 않다. 그냥 놀고먹어도 된다. 하지만 내 성격상 그건 불가능하다. 결국에는 장사를 하든 뭘 하든 사업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장사꾼 체질이 아니다.
윤 스포츠센터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시연이 아버지인 윤승태 사장님은 내가 당신 밑으로 들어오길 은근히 바라신다. 그분 성격상 시연이의 약혼자라는 이유로 나를 원하시는 건 아닐 것이다. 자랑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일은 좀 한다. 그래서 나의 업무 능력에 대해 상당히 신뢰를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내가 윤 스포츠센터로 들어가면 사람들은 고깝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다. 정말 처가 덕을 보며 산다는 이야기는 죽어도 듣기 싫다.
나는 정말 시연이 앞에서 떳떳하고 잘난 남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엿같아도 한 번 더 참아보련다.
“나도 네가 왜 갑자기 동지마트로 발령 났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납치 사건이 신문 사회면에 오르내릴만큼 이슈가 되었다고 해도, 그동안 네가 새운 공이 있는데 이럴 수는 없거든. 미안하다 동수야. 내가 능력이 안 되더라.”
팀장님이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는지, 그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저 말을 내게 해주려고 바쁜 시간 쪼개서 병원을 방문한 것이리라.
“팀장님. 아직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압니다. 동지랜드도 살려냈던 접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대형마트랑 놀이공원은 다르지. 놀이공원은 공간적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어. 롯데월드나 에버랜드가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전국을 모두 커버할 수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대형마트는 전국이 상권이야. 도저히 틈이 없다고. 아무리 네가 잔머리를 잘 굴린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야.”
“물론 저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팀장님은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고생해서 프로젝트 완성해놨더니 아부나 할 줄 아는 싸가지 없는 새끼가 우리 일을 넘보는 꼴이잖아요. 전 오기로라도 살아남을 겁니다. 그리고 돌아갈겁니다. 그러니 팀장님도 귄희태 그 망할 놈에게 밀리지 않도록 버티고 계세요. 빌어먹을.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팀장님의 약한 모습에 갑자기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팀장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기들 입맛대로 팀원들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상처를 입으신 것 같다.
“짜식. 말이라고 고맙다. 그래. 네 말을 들으니까 힘이 나네. 내 걱정 하지 마라. 내가 윗선하고 안 친한 대신 중, 하급 간부들에게는 인기가 많잖냐?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을 거야. 권희태 그놈을 다른 팀이 아니고 우리 팀에 꽂아넣은 게 얼마나 큰 실수인지 제대로 보여주겠어.”
첫째 대군 측에서는 윗선과 연결된 라인이 전혀 없는 우리 팀장님이 만만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평소 음모설을 좋아하고 우유부단하다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수더분한 성격 때문에 윗선과는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성격 때문에 동기들이나 후임들에게는 상당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간과했다. 동지에서만 12년째 근무 중인 우리 팀장이 쌓아놓은 인맥은 쉽게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막강하다. 그런 인맥을 마음먹고 이용한다면 최소한 고춧가루 역할 정도는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럼요. 밟으면 꿈틀한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주자고요. 그리고 석나련 실장님에게도 남자다운 모습을 보이셔야죠.”
“큭. 그, 그건 무슨 소리야. 갑자기 석나련 실장이라니?”
석나련 실장은 D&Y피트니스 클럽의 성공적인 런칭을 위해 윤 스포츠센터가 파견한 팀의 리더였다. 처음에는 열심히 업무만 수행했지만, 하루가 멀다고 매일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두 사람 사이는 어느새 핑크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란 말입니까?”
“그, 그럼. 내가 석 실장님과 무슨 사이라고...”
“아니면 말고요. 시연이에게 말해줘야겠다. 우리 팀장님은 석나련 실장니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 시연이가 석 실장님을 사석에서 이모라고 부르는 건 아시죠?”
“크흠. 야 인마. 마 대리. 동수야.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해. 내 나이를 생각해라, 좀. 아직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그럼요. 그렇지만 꼭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팀장님!”
“왜?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느끼하게 불러.”
“만약에 제가 살아 돌아온다면 말입니다.”
“죽으러 가냐? 살아 돌아온다는 표현을 쓰게? 아무튼, 살아 돌아오면?”
“우리도 라인 하나 탑시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팀장님은 그런 식으로 라인 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석나련 실장님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내가 시연이에게 잘난 남자가 되고 싶듯, 팀장님 또한 석 실장님에게 잘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뭐? 라인? 혹시 세 명의 대군 중 하나에 선을 넣자는 뜻이야?”
“우리가 용 뽑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보호막도 없이 계속 독자노선을 걸으면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겁니다. 몇 번을 살아남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노선을 정하라고 강요받는 날이 분명히 옵니다. 우리가 아무리 중립을 지키고 싶어도 주변 상황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흑이든 백이든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 형제끼리 사이 좋게 힘을 모아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이미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적인지 아군인지 선택하라고 강요하겠지.”
“그때가 되어서 노선을 밝혀봐야 찬밥 신세를 겨우 면하는 정도겠죠. 그럴 바에는 미리 선을 하나 잡고 그 밑에서 공을 세우는 게 훗날을 위해 좋습니다. 우리라고 이사 같은 임원이 되지 말라는 법 없지 않습니까?”
“아끼면 똥 되니까, 비싸게 팔릴 때 팔아버리자? 그래도 첫째는 싫어.”
“그건 저도 싫습니다. 권희태를 꽂아넣는 순간 그 양반과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 되었죠.”
“그럼 남은 건 둘째와 셋째네. 내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차남인 고평호 상무가 가진 세력이 장남인 고정호 전무 세력에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더군. 이렇다 할 세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고현호 이사보다는 고평호 상무가 안정적이긴 한데. 대신 이미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을 테니 큰 대접은 못 받겠지?”
“아무래도 그건 그렇죠. 솔직히 팀장님이나 나나 D&Y피트니스 클럽 프로젝트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한 존재였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중용해달라고 요구해봤자 건방지다는 평가만 받을 거예요. 저도 대충 들어보니 그쪽 라인은 해외 유학파들이 많더라고요. 팀장님이나 저 같은 국내파가 들어가 봐야 큰 대접을 기대하긴 어렵겠죠. 하지만 안정적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매력입니다.”
내가 고현호 이사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냥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동지마트에서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야. 문제는 셋째 대군의 기반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거지.”
“아닐 수도 있어요. 두 형님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은밀하게 세력을 키웠을 수도 있죠. 만약 야심이 있는 남자라면 말이에요.”
“그런가? 흠. 그럼 진짜 대단한 건데. 은인자중할 줄 아는 인내심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 10을 가지고 있으면 100을 가지고 있다고 뻥튀기하는 게 사람들이야. 그런데 10을 가지고 있으면서 1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을 낮추는 거잖아. 만약 그렇다면 같이 일할만한 사람이겠는 걸.”
“지금 당장 결정하지 말고 좀 더 두고 보죠. 정보수집을 해서 셋째 대군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도 해보시고요. 당장은 팀장님이나 저나 확실하게 살아남는 게 중요하잖아요. 살아남고 생각해봅시다.”
“그렇지. 아차차. 내가 한 가지 사실을 말 안 해줬네.”
“뭔데요?”
“셋째 대군인 고현호 이사가 이번에 동지마트 책임자로 발령이 났어.”
“네? 고현호 이사가요?”
“응. 죽을 자리로 기어들어갔다는 평가야. 첫째, 둘째 대군이 압력을 넣어서 어쩔 수 없이 동지마트를 맡았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이제야 내가 왜 동지마트로 발령이 난 건지 알 수 있었다. 고현호 이사가 나를 끌어들인 것이다. 5년 후에 보자고 약속을 했었는데 갑작스레 나를 불러들였다는 건, 원래 내가 발령났을 곳이 동지마트보다 더 안 좋은 곳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고 이사가 내게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임의대로 행동했을 리가 없다.
동지마트보다 안 좋은 곳. 두어 곳 정도 생각난다. 지리산에 있는 연수원과 남해의 어느 섬에 있는 수련원. 한 번 가면 돌아오기 불가능하다고 해서 ‘함흥차사’라 불렸던 곳이다. 그곳으로 발령 나면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산사람이나 바닷사람이 되어 현지화되거나, 사표를 쓰고 그만두거나.
월급은 대기업 수준으로 꼬박꼬박 나오기 때문에, 마음만 비울 수 있다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를 거의 누릴 수 없는 그곳에서 적응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열에 한두 명도 안 된다.
내 사건이 아무리 사회면에 오르내렸다고 해도 유배 행은 너무 과했다. 더군다나 몇 달 전에 회장님으로부터 우수직원으로 표창장까지 받았던 직원을 이런 식으로 내친다는 건, 뭔가 내가 모르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는 의미였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마음이 답답했다.
어쨌거나 상황은 재미있게 되었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동지마트를 살려야 하고, 동지마트에는 고현호 이사가 있다. 게다가 이번 인사이동이 고현호 이사에게는 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역량을 알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도 했다.
“어쩌면 저와 고현호 이사는 이미 한 배를 탄 것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긴 하지. 동지마트를 정상궤도로 올린다면 그건 고현호 이사의 경영자로서의 역량을 증명하는 셈이니까. 그렇게 되면 나도 둘째 대군보다는 셋째 대군을 택할 것 같긴 해. 아까도 말했지만 고평호 상무에게 가봤자 우린 찬밥 신세니까.”
“동지마트 책임자로 고현호 이사가 발령 났다는 게 제 입장에서는 나쁜 일은 아닙니다. 동지마트 상황이 어쨌든 오너의 아들이 책임자로 가게 되었으니 본사에서도 입 닦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겁니다. 어느 정도의 투자는 당연히 해주겠죠.”
“인간 불도저라고 소문난 우리 회장님도 막힌 일이야. 그리고 우리 그룹 전체가 힘을 합쳐 도와줬는데도 실패했어.”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만약 고현호 이사가 발령나지 않았다면 곧바로 폐업 수순을 밟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니까요.”
“어휴. 그래. 그래봤자 개미 눈물만큼 이겠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성공해서 꼭 돌아와라.”
“네. 팀장님도 권희태 그 낙하산 새끼한테 밀리지 말고 잘 버팁시오.”
============================ 작품 후기 ============================
좀 늦었습니다.
조카와 놀아주다가 집에 왔더니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이들었는데 이시간이네요. ㅠㅜ 애보기와 쇼핑.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두가지. ㅎㅎ
즐거운 한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