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3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더럽게 구는 곳이 한곳밖에 더 있습니까? 와룡그룹이 운영하는 포에버마트. 아무래도 그곳이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죠.”
“아무래도 그렇지? 와룡그룹이 재계서열 2위에 어울리지 않게 좀 더럽게 놀긴 하지.”
“게다가 3-마트는 몰라도 엘마트보다 순위에서 밀렸다는 건 와룡그룹 입장에서는 상당히 자존심 상할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엘마트는 따라잡고 싶을 겁니다.”
“하여간 찌질한 새끼들이야. 내가 다른 그룹은 몰라도 그놈들은 넘어서고 말 거야.”
“크흠. 그전에 두 분 형님부터 넘어서셔야 할 텐데요.”
“아차. 그렇지? 형님들이 욕심을 버리고 막내를 위해 양보를 해주면 좋으련만. 양녕대군이나 효령대군 같은 형님들이 왜 내게는 없는지 아쉬워. 안 그래, 마 팀장?”
“이사님이 충녕대군처럼 천재성을 보인다면 두 분 형님이 알아서 양보할지도 모르죠.”
“내가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세종대왕처럼 천재는 아니니까 그건 포기해야겠군.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해볼까? 어떻게 할 거야, 마 팀장. 직접 취조를 할 거야? 아니면 우리 경호팀에서 취조하는 걸 지켜볼 거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황달중 주임이 격리되어 있는 사무실 앞에 도달했다.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경호팀 사람들은 대형 할인 마트 이쪽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지 않겠습니까?”
취조. 범죄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혐의자나 죄인을 조사하는 행위를 말한다. 경찰도 아닌 평범한 직장인인 내가 누군가를 취조할 일이 생기다니. 언제부터 내 삶이 이렇게 스펙타클하게 변했을까?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마 팀장 말발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쿵!
나는 조금 요란하게 문을 열어 재끼며 안으로 들어갔다. 기선 제압의 의미가 크다. 사무실에 홀로 앉아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황달중 주임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 마, 마 팀장님. 서로 간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이렇게 잡아두는 건...”
“쉿!”
황달중 주임은 재빨리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검지를 펴 입을 가리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사무실 오른편에 있는 의자를 꺼내고는 문밖을 향해 외쳤다.
“이사님. 준비되었습니다.”
나의 외침에 고현호 이사가 성큼성큼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전에 약속된 퍼포먼스다.
드라마에서 보면 한 사람은 범인을 취조하고 다른 사람들은 취조실이 보이는 옆방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여긴 마트 사무실이다. 그런 시설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곳이다.
나 같은 아마추어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뭘까?
진심으로 다가간다? 양심을 믿어본다? 간절하게 호소한다? 이런 건 다 헛소리다.
답은 하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당근과 채찍이다. 물론 채찍이 우선이다. 채찍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울수록 당근의 효과는 커진다.
가장 확실한 채찍질은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것이지만, 사람을 때릴 만큼 내가 또라이는 아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황달중 주임이 겁을 집어먹도록 최대한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고현호 이사와 그를 호위하는 네 명의 경호원(좀 더 많은 인원을 투입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사무실이 너무 작았다.)이 들어서자 역시나 황달중 주임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고현호 이사는 내가 마련해둔 의자에 거만하게 앉았고, 경호원들은 병풍처럼 그의 배후를 지키고 서 있었다.
“준비해.”
고현호 이사의 말이 끝나자 남진우 대리가 앞으로 나가, 들고 있던 카메라 렌즈가 황달중 주임에게 향하도록 설치하고 녹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 동지그룹의 로열패밀리 근접 경호를 맡고 있는 남진우 대리라고 합니다. 황달중 주임이라고 했습니까?”
오! 스타트가 좋다. 남진우 대리, 생각외로 센스가 있었다. 로열패밀리 근접 경호라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눈치 빠르게 분위기를 잘 조성했다.
“네? 네. 그렇습니다. 화, 황달중 주임입니다.”
“아. 아. 그렇게 떠실 것 없습니다. 저희는 매우 상식적이며 합리적으로 이 일을 처리할 생각입니다. 지금 보시는 카메라는 우리가 황달중 주임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증거가 될 겁니다. 그러니 겁먹지 마세요.”
우리는 그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을 생각이다. 단지 무시무시한 카미스마로 유명한 회장님의 3남인 고현호 이사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볼 것이고,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덩치 좋은 네 명의 경호원이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다.
물론 남진우 대리가 설치한 카메라의 방향은 그런 모습이 전혀 찍히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럼 준비가 다 된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황달중 주임님.”
“네. 네? 아. 네.”
긴장하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벌써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조금 전에 추미래씨를 불러 대충 일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왜 그런 지시를 내렸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음. 아, 그렇죠! 추미래씨가 너무 일을 열심히 해서 다른 직원들이 상대적으로 게을러 보인다는 항의가 들어와서요. 단체 생활하는 곳에서 혼자 너무 튀면 좋지 않을 것 같아 주임인 제가 충고를 좀 했습니다.”
“누가 항의를 했는데요?”
“게시판을 보면 동지마트 직원들은 대체로 게으르다 또는 불친절하다는 항의성 댓글이 많습니다. 직원들은 그게 전부 추미래씨 때문이라고 생각했고요.”
아주 지랄을 한다. 자신들이 제대로 일을 안 해서 들었던 항의를 지금 누굴 보고 원망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동지마트 행당점은 전체가 썩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추미래씨보고 적당히 일하라고 지시를 하셨다?”
“헤헤헤. 그렇습죠.”
“그게 동지마트 직원으로서 할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다른 마트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데 밑의 직원에게 적당히 일하라고 겁박을 줘요? 좋습니다. 이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럼 또 하나 묻겠습니다. 조만간 동지마트가 다른 대형 할인 마트에게 합병된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본사 마케팅에서 근무하던 저도 그렇고, 회장님의 셋째 아드님이신 고현호 이사님도 금시초문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 그건 정말 오, 오해입니다. 합병이라니요. 저도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 팀장님께서 뭔가 잘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제가 잘못 들었다? 그럼 그 자리에 있었던 추미래씨의 증언을 들어봐도 괜찮겠죠?”
“아, 아니 그러니까요. 그게 팀장님께서 잘못 들으셨다는 게 아니라, 제 말이 헛나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하하. 요놈의 입이 가끔 주인을 무시하고 헛나올 때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황달중 주임님이 실언한 거다? ‘이제는 협력업체 놈들까지 나를 무시하네. 두고 보자고 나중에 합병되면, 그때도 나를 무시할 수 있는지.’라고 제게 말씀하셨는데도 그게 전부 실언이다 그 말이죠?”
“죄송합니다. 제가 좀 흥분을 하면 말이 막 나오는 스타일입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참 이상하군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거든요. 상식적으로 말입니다. 직원들 일을 못 하게 종용한다는 건 동지마트의 가치를 굉장히 떨어뜨리는 행위거든요. 그렇게 가치가 떨어지면 다른 대형 할인 마트가 싼값에 냉큼 인수하겠죠. 그렇게 되면 일을 주도한 황달중 주임님은 공을 인정받아 한두 직급 정도는 승진하겠죠. 저는 이런 상상을 했는데 전혀 아니란 말씀이군요.”
“물론입니다. 한번 동지맨은 영원한 동지맨입니다. 저는 정말 동지그룹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지점장님은 왜 다른 소리를 하셨을까요?”
위압적인 분위기만 조성하면 지레 겁을 먹고 미주알고주알 다 불어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버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승부수를 던졌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면 경제학과목 몇 가지를 필수적으로 들어야 한다. 그중 하나가 경제학원론이다. 그 수업을 들으면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이론이 나온다.
죄수의 딜레마란 두 공범자가 서로 협력해 범죄사실을 숨기면 증거 불충분으로 형량이 낮아지는 최선의 결과를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범죄 사실을 밝혀 주면 형량을 감해 준다는 수사관의 유혹에 빠져 상대방의 죄를 고변함으로써 무거운 형량을 선고받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정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모르고 당하면 심리적 위축감이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지금처럼 위압적인 사무실의 분위기라면 더더욱 효과적이다.
“네? 지, 지점장님이 무, 무슨 소리를 하셨는데요.”
걸렸다. 아까보다 목소리가 더 흥분되어 있었다. 지점장이 무슨 소리를 하긴. 죄수의 딜레마가 생각나서 그냥 던져본 거다.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되게 이상한 말씀이셨거든요. 아까 이사님께서 지점장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가장 먼저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선처하겠다고요. 그 이야기가 오고 간 이후 표정이 좀 이상해지셨어요. 그러고는 잠시 생각할 게 있다면서 지점장실로 올라가셨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사님?”
“물론이지. 일의 심각성을 생각했을 때는, 선처뿐만 아니라 포상을 할 수도 있어.”
역시 고현호 이사다. 나의 임기응변에 더해 포상이라는 당근까지 제시했다. 확실히 그와 나는 손발이 잘 맞는 것 같다.
“지점장님이요? 그럼 지점장님은 저처럼 이곳 사무실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요?”
“네? 갇혀있다니요.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세요. 지금 황달중 주임님은 절대 갇혀 있는 게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어떤 증언도 하지 않고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물론 이후 다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증언을 듣게 되고, 그 증언을 통해 황 주임님의 잘못이 밝혀진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지셔야겠죠.”
“아니요. 귀가하겠다는 게 아니라. 지점장님은 왜 저처럼 별도의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으냐는 말입니다.”
“협조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하기 편하게 지점장실로 보내드렸습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금방 연락이 올 것 같습니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면 저는 다른 분들을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집에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나의 말에 황달중 주임의 얼굴은 초조함이 가득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더니 고현호 이사가 왼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자 남진우 대리가 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사님. 장경철 지점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마 대리. 이제 그만하지. 더 들어봐야 나올 이야기도 없고. 지점장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니 그리로 가보자고.”
고현호 이사의 그 결정적 한 마디에 바닥만 바라보던 황달중 주임의 고개가 번쩍 치켜세워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기다렸던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빙고!
============================ 작품 후기 ============================
마동수 고현호. 재계를 뒤흔들 최고의 사기꾼 커플 탄생.~~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와룡그룹에 딱 들어맞는 기업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대기업의 안 좋은 점을 종합선물세트처럼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등산동호회에 가입해서 활동중인데 거기서 조알 독자님을 만났습니다. 이젠 그분 눈치가 보여서 연중 하고 싶어도 못할 것 같습니다. 거긴 사진과 연락처까지 공개되거든요. ㅋ 그냥 묵묵히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