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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84화 (184/424)

00184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빙고! 드디어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그래 진작 그랬어야지. 금방 넘어올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버틴 게 용타. 달중아.’

나는 나가려고 붙잡은 문고리를 놓고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황달중 주임의 멱살을 잡고 ‘어서 불어, 이 자식아.’라고 닦달하고 싶었지만, 표정은 무심하게 아무런 기대감도 담지 않았다. 마치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식의 심드렁한 얼굴을 유지했다.

나의 표정이 기대와 달랐는지 작은 희망에 빛나던 황달중 주임의 눈빛에 당혹감이 번졌다. 그 순간 나는 그를 향해 무심한 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래요? 그래서요?”

“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아무 잘못도 없다 그 말입니까?”

“티, 팀장님. 저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정말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아! 그냥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다? 저런. 그래서 협력업체 사람들을 막대하고, 추미래씨처럼 열심히 하는 직원들에겐 일 못 하도록 폭언하며 괴롭히고요? 심지어 성희롱까지 하면서요.”

이미 황달중 주임은 내가 던져놓은 미끼를 문 상태다. 여기서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진짜는 지금부터다. 일명 밀당의 시작. 낚시를 할 때 자칫 밀당에 실패하면 다 잡은 고기도 놓치게 된다. 이럴 때야말로 마음에 여유를 가져야 한다.

“서, 성희롱이니요. 제가 언제 성희롱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추미래씨보고 이년 저년 하는 걸 제가 봤는데도 시치미를 떼시는 겁니까? 게다가 처녀가 아무 남자 다리나 잡는다니요. 요즘 세상엔 그런 말들이 전부 성희롱이 된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직장 내 성희롱은 분명 문제다. 하지만 가끔은 언어폭력과 성희롱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남자에게 뚱뚱하다고 하면 언어폭력, 여자에게 뚱뚱하다고 하면 성희롱. 이렇듯 가끔은 기준이 오락가락해서, 역차별을 느끼는 남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기도 한다.

평소에는 나도 그런 남자 중 한 명이지만, 지금은 강력한 페미니스트로 변신했다.

“제가 욕을 한 건 잘못했지만 그래도 성희롱은 말도 안 됩니다.”

“그건 황달중 주임님 생각이고요. 중요한 건 피해자의 생각입니다. 추미래씨가 황달중 주임의 폭언에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건 성희롱입니다. 불러서 한번 물어볼까요? 전 추미래씨가 원한다면 증인을 설 생각도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고의로 일을 못 하게 했으니 업무방해죄도 추가 되겠군요. 성희롱에 업무방해라. 어허. 무조건 전과자 되겠는걸요? 우리 카리스마 넘치시는 회장님이 이 소식을 듣게 되면 뼈째 씹어먹으려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팀장님. 전 정말, 정말 억울합니다. 이사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저는 정말 지점장님. 아니지 지점장 그 개자식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겁니다. 팀장님은 제 맘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랫사람이 대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위에서 까라면 까야죠.”

됐다. 이 정도면 거의 넘어왔다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가 일본 놈들에게 강점당했을 시기에 말입니다. 당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쓰시던 애국지사들을 가장 지독하게 괴롭혔던 사람들이 누군지 압니까?”

“아니요. 갑자기 그게 왜...”

“바로 친일파 앞잡이들입니다. 그 개.자.식.들.이 일본놈들보다 더 지독하게 그분들을 잡아넣고 고문하고 그랬었죠. 그런데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가 광복을 되찾았을 때, 친일파 앞잡이들이 했던 소리가 있습니다. 우린 그냥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했다. 나도 마음 아팠다. 일제 치하에 사는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나? 이런 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황달중 주임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쾅!

나는 그의 앞에 놓인 철제 책상을 강하게 두들기며 소리쳤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네? 네. 그러니까... 팀장님. 살려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살려만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제가 살인자입니까? 살려달라고 하시게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나도 몰랐던 나의 사악함에 놀랐다. 사람을 독 안에 가두고 괴롭히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물론 나쁜 놈을 괴롭히니까 재미있는 거다.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팀장님 제발 부탁입니다. 전 머리가 나빠서 팀장님께서 원하시는 게 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알려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만 했다면서요. 그런데도 저와 이사님이 황 주임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저도 압니다. 알아요.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트에서 일하면서 영업방해를 한 것 말고 다른 게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물론입니다. 지점장님에게 저는 기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소에는 마트에서 일을 보다가도 무슨 일이 있다 싶으면 지점장님의 차를 운전하기 위해 외근을 나가야 했습니다. 다른 마트 관계자들을 만날 때도 항상 저를 대동했고, 그 밖의 잡다한 심부름도 제 몫이었습니다. 저도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다른 마트는 모르겠지만 우리 동지마트 지점장은 차장급이다. 이사급도 없는 운전기사를 마트 지점장에게 배정할 리가 없다.

그러나 마트는 군대 개념에서 보면 독립대대나 독립연대라고 할 수 있다. 외부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안에서만큼은 황제 부럽지 않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독립부대의 부대장인 것처럼, 지점장 또한 해당 지점 안에서는 황제나 마찬가지다.

황달중 주임에게 운전이나 잡다한 심부름 따위를 시키는 건 마트라는 공간적 특이성을 봤을 때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힘들긴 개뿔. 지점장의 신임을 이용해 호가호위한 주제에 피해자 코스프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까지는 계속 밀었으니 이쯤에서 한번 당겨줘야 한다.

“쯧쯧. 많이 힘들었겠군요. 저도 정말 괴팍한 직장상사를 만나 고생을 해봐서 그 마음 압니다. 한때는 슈트 안쪽 포켓에 사직서를 넣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네? 팀장님이요? 아니 어떻게 팀장님 같은 분이 그런 일을 겪으실 수 있습니까? 솔직히 나이도 별로 안 많아 보이는데 벌써 팀장이라 순탄하게 회사생활을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어휴.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한때는 커피도 제대로 못 타온다고 심하게 구박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새끼’, ‘저 새끼’ 욕먹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제 이름이 마동수라서 허구한 날 마똥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죠.”

“저도 그랬습니다. 특히 지점장은 제 이름이 황달중이라고 맨날 ‘황달아, 황달아’ 이려면서 놀리듯 부르곤 했습니다. 남들은 지점장의 총애를 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인간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대 동지그룹의 주임인데 기사로 부리다니 너무 했습니다. 대체 누굴 만난다고 그렇게 허세를 부렸답니까?”

질문을 기습적으로 툭 하고 던졌다. 아마 황달중 주임은 자신이 지금 취조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 것이다.

“그냥 다 만났습니다. 3-마트 관계자도 만났고, 엘마트 관계자나 포에버마트 관계자도 만났습니다.”

헉.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황달중의 입에서는 내가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 흘러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고현호 이사도 놀라는 눈치였다.

“네? 대형 할인 마트 3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곳의 관계자를 모두 다 만났다고요? 제가 무시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황 주임님은 그 사람들이 각 마트의 관계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당연히 저도 몰랐죠. 하지만 지점장이 모임을 마치면 오늘 누굴 만났는지 자랑삼아 설명하곤 했습니다. 저야 그래서 알게 되었죠.”

“그럼 그런 만남이 지금까지 계속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번갈아 만나더니 나중에는 포에버마트 관계자만 계속 만났습니다.”

‘그럼 뭐지? 동지마트를 두고 지점장이 흥정을 했단 말인가?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데. 지점장이 동지마트를 팔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황달중 주임의 말이 계속될수록 오히려 의문이 짙어져 갔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동지마트의 경영이 어려워지면 3-마트, 엘마트, 포에버마트 모두에게 이익이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서로 경쟁을 할 필요는 없다. 뭔가 다른 대화가 오고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세 개의 대형 할인 마트가 동지마트에게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하나밖에 없다. 동지마트의 합병.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고작 동지마트의 지점장이 무슨 힘이 있어서 동지마트의 합병을 추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순간 온몸에서 소름이 끼쳤다.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드는 생각이었다. 젠장. 이래서 이들의 권력 다툼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발을 뺄 수는 없다.

“남진우 대리님.”

“네. 마 팀장님.”

“지금 즉시 황달중 주임을 옆 사무실로 옮겨주십시오.”

남진우 대리는 내 말이 의아한 듯 고현호 이사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고 이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마 팀장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직 제가 아는 건 많이 있습니다. 물어보기만 하십시오. 뭐든 제가 아는 건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황달중 주임님.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는 거니까 그렇게 놀라지 마십시오. 잠시만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이야기 나누죠. 그러니 편하게 쉬세요.”

불안해 하던 황달중 주임은 웃으며 말하는 나의 설명에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경호원을 따라 옆 사무실로 건너갔다.

“보아하니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군. 그래 무슨 일이야, 마 팀장?”

“남진우 대리님. 먼저 하나 묻겠습니다. 지금 장경철 지점장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은 믿을만한 사람들입니까?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군요. 대리님 직속인 3팀 사람 맞습니까?”

“아닙니다. 급하다는 연락에 교육 도중에 차출했기 때문에 다른 팀원들도 많이 있습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아차 싶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렇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무섭고 두려웠다.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리라 믿고 싶었다.

나는 아직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인 남진우 대리를 향해 소리쳤다.

“미친 소리 같지만 장경철 지점장님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확인해보세요. 얼른 이요.”

============================ 작품 후기 ============================

소소한 이야기가 너무 스펙타클하게 흐르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권력 투쟁이 시작되면 이정도 스케일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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