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9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들어와.”
노크에 곧바로 대답이 들렸다. ‘들어와요.’도 아니고 ‘들어와.’였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 중 하나가 초면에 반말하는 것들이다. 안 그래도 거슬리는 총무팀이 계속 거슬리는 행동을 한다.
쿵쿵쿵!
나는 들어오라는 말을 무시하고 아까보다 좀 더 신경질적으로 노크를 했다.
“아! 그것참. 들어오라니까! 어? 누구...”
노크를 하는 사람이 추미래씨라고 생각했는지, 회의실에서 한 남자가 짜증을 내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있어야 할 그녀는 없고 웬 낯선 사내가 서 있자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안녕하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일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우리 팀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셨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추미래씨가 보기보다 연약해서 쟁반을 들다 손을 삐끗했거든요. 윤권아.”
“네. 팀장님.”
“커피 쏟아지지 않게 조심해서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네? 네. 그, 그래야죠. 하하하.”
남자는 커다란 덩치의 윤권이 모습에 당황했는지 잔뜩 움츠린 표정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나와 윤권이가 회의실에 들어서자 다들 의아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이곳으로 인사발령을 받은 마동수 팀장입니다. 혹시 추미래씨를 기다린 거라면 대단히 죄송합니다. 추미래씨가 쟁반을 들다가 손을 삐끗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동지마트로 전근 왔으면 떡이라도 돌리면서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꼴랑 커피만 들고 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나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쟁반을 들다가 손을 삐끗해? 쟁반이 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손목을 삐끗할 이유가 있나?”
회의실 제일 상석에 거만하게 앉아 있던 재수 없게 생긴 남자가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저놈이 바로 오늘 일의 주동자인 한상질 팀장일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제가 아직 이곳이 처음이라 누가 누군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동지마트 총무팀 한상질 팀장일세.”
“아! 한상질 팀장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손목이 삐끗한 게 그렇게 이상하십니까?”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커피 나르는 게 뭐가 힘들다고 손목을 삐끗해?”
“음. 그런데 그렇게 쉬운 일을 여기 총무팀원들이 안 하고 어쩌다 남의 소중한 팀원에게 떠넘겼답니까. 병신들만 모였나?”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나직이 이야기했다. 물론 좁은 회의실에서 그 소리를 못 들은 사람들은 없겠지만 말이다.
“뭐? 지금 뭐라고 했나?”
“네? 아! 그냥 혼잣말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군요. 제가 알기로 작년부터 그룹 내 커피 심부름은 무조건 금지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작년부터 커피 심부름 전면 금지는 정말이지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3년간의 막내 생활 끝에 드디어 받게 된 신입. 이제 커피 심부름은 완전히 탈출이라고 좋아했는데, 갑자기 커피는 각자 알아서 먹으라는 지침이 내려와서 나를 좌절케 했었다. 그러니 어찌 커피 심부름 금지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봐. 마동수 팀장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듣기로 2007년 입사했다면서?”
“네. 선배님은 2001년에 입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이기적 대리님 동기시라고요. 안부 전화는 나누셨나요?”
자기 혼자만 나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고 믿고 있던 그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나의 기습적인 말에 흠칫 놀란 얼굴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확실히 이기적 대리와 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크흠. 그냥 안면만 있는 사이지. 그런데 2007년 입사면 아직 젊은데 사람이 뭐가 그렇게 팍팍해. 자네도 아까 이야기했지 않나? 새로 전근 왔으면 떡이라도 돌려야 했다고. 똑같은 거야. 잘 부탁한다고 우리 총무팀에 커피 한 잔씩 돌리는 거지. 사람 사이에 정을 나누는 걸 커피 심부름이라고 치부하면 곤란하지. 좀 융통성을 가지게.”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좀 예민하게 굴었나 봅니다. 본사에서 하도 성희롱 관련 교육을 많이 듣다 보니 뭐든 조심스럽더라고요. 그리니 팀장님께서도 회사 생활 오래 하고 싶으시면 쓸데없는 오해는 안 받는 게 좋을 겁니다. 성희롱이라는 게 사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나 깨나 조심해야죠.”
“성희롱? 지금 우리 총무팀 전체를 성희롱 부서로 몰아가는 건가? 본사에서 등 따시게 살아서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 하나 본데, 계열사에서 일하면서 총무팀과 어긋나면 업무가 정말 피곤해져. 우리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모든 부서가 마케팅부를 위해 돌아가는 본사와 달리 계열사의 경우에는 부서 간의 알력이 있다고 한다. 인사팀과 어긋나면 진급이나 휴가 일정이 꼬이고, 영업팀과 어긋나면 특정 제품이 안 팔리는 사태가 일어난다고 들었다.
총무팀과 어긋나면 자금줄이 막힐 수도 있겠지. 고작 4년 차 애송이인 내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하지만 내겐 고현호 이사라는 엄청나게 확실한 패가 있다. 호가호위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 사람들이 맛을 못 본 것 같다.
“하하하. 뭔가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군요. 그냥 본사 분위기가 어떤지 알려드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마십시오.”
“흥! 고작 고졸 계약직 여직원에게 커피 부탁했다가 별소리를 다 듣는군.”
“아! 계약직 직원이 타주는 커피를 드시고 싶으신 거였군요. 윤권아!”
“네. 팀장님.”
“커피 드려라. 드시고 싶단다.”
“알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에 동지마트 TF팀에 합류하게 된 계.약.직 직원 성윤권이라고 합니다. 키는 194cm이고 몸무게는 112kg이며 신발사이즈는 310mm입니다. 유도선수 출신이며,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지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몸이 매우 튼튼해서 무쇠로 된 쟁반도 들고 다닐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TF팀이 타주는 커피가 드시고 싶다면 저를 찾아주시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기세 하나로 동지마트 행당점 보안요원들을 단숨에 제압한 사람이 윤권이다. 그런 녀석이 커피를 한잔 한잔 가져다주며 험상궂은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모두들 그 기세에 눌려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그걸로 완전히 기선제압 끝. 확실히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는 녀석이다.
“그럼 커피 맛있게 드십시오.”
오늘은 여기까지다.
나는 윤권이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얼이 빠져있는 총무팀 사람들을 뒤로하고 회의실에서 나왔다. 회의실 상황을 주시하던 다른 부서 사람들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활극이라도 일어나길 기대했다가 조용히 사태가 마무리되자 아쉬운 모양이었다.
미친 인간들. 내가 아무리 또라이 기질이 있어도 할 짓 안 할 짓 구분은 하고 산다. 여기서 서로 큰소리 내며 얼굴 붉혀봐야 나만 손해다. 그리고 납치 사건을 겪으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게 있다.
‘웬만하면 전면에는 나서지 말자. 될 수 있으면 상대 뒤통수치는 일이나 하자.’
기선제압만 했으면 충분하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치사하고 무서운 인간인지는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
총무팀과 가볍게 전초전을 치른 나는 TF팀이 앞으로 일할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오! 여기가 우리 사무실이란 말이지. 생각보다 멋진데?”
고현호 이사가 신경을 썼는지 사무실은 꽤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특히 송파대로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전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팀장님. 제 자리도 있는 겁니까?”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야. 당연히 있지. 아무 데나 마음에 드는 책상 있으면 알아서 선택해. 그게 네 자리야. 기분 좋아?”
“네. 이렇게 진짜 직장인처럼 출입증카드 받고 제 책상까지 있는 날이 다시 오게 될지 몰랐거든요. 정말 감사합니다. 보스.”
“고맙지? 그러니 앞으로도 열심히 충성을 다하라고. 그리고 회사에서는 팀장.”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팀장님.”
“그런데 추미래씨는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요?”
커피 쟁반을 뺐어 들었을 때부터 걱정되었는지 우리 뒤를 졸졸 따라오던 그녀였다.
“그, 그게. 정말 감사해서요.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도무지 실감도 안 나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그러니까. 그게.”
“고마워할 것 없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저라는 사람, 같이 일해보면 꽤 피곤한 인간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긴장하는 게 좋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도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좀 멋있었죠?”
“네? 네. 그럼요. 정말 멋있으셨어요. 한 번에 총무팀을 휘어잡는 모습도 박력 있으셨고...”
“그래도 반하시면 안 됩니다. 임자 있는 몸이거든요. 하하하.”
나는 여전히 횡설수설하는 미래씨에게 약혼반지를 보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머. 결혼하셨어요?”
“아니요. 결혼은 아니고 약혼은 했습니다. 일 때문에 가끔 여기도 올 겁니다. 추미래씨와 동갑이니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세요.”
“네? 저랑 동갑이면. 팀장님 나이가 저보다 열 살 많다고 들었으니, 완전 도둑놈? 어머.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호호호.”
역시 여자는 수다를 나눠야 마음이 차분해진다. 첫 출근이라 많이 긴장돼 보였는데, 어느새 여유를 찾았는지 내가 기대했던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도둑놈 맞습니다. 그러니 도둑놈이라고 놀리셔도 괜찮습니다. 이제 추미래씨도 여유가 생긴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첫 회의를 시작해볼까요?”
기세 좋게 회의 시작을 알렸는데, 둘러보니 윤권이와 미래씨 두 명뿐이었다. 올랐던 기세가 금방 바닥으로 추락했다. 제대로 일을 하려면 팀원부터 모집해야 한다. 근육 바보인 윤권이와 신입이나 다름없는 미래씨가 내게 지금 당장 큰 도움이 되기는 힘들다.
“팀장님. 회의 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미래씨.”
“제가 오늘 출근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송파점에 나와서 몇 가지 조사를 했습니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다. 이런 성실함. 나는 그녀의 이런 모습에 혹해서 팀원으로 끌어들였다.
“계속 하세요.”
“일단 본사가 있는 곳이라 기대를 했는데, 송파점이나 행당점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특히 직원들의 친절도는 심각한 수준이었고요.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다른 마트에 어서 합병되길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송파점 직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던가요?”
“아니요. 옆에 손님이 있든 말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던걸요. 이번에 행당점 지정잠님의 사고 때문에 합병이 물 건너가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동지마트를 바꾸려면 사람들의 생각부터 바꿔야 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동지마트에 전혀 애정이 없다는 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생각했던 충격요법을 빨리 실행해야 할 것 같았다.
“윤권아. 너 혹시 총무팀에 대해서 좀 아냐? 무슨 일을 하는지.”
“네? 총무팀은 모르겠고, 총무가 뭐 하는 건 줄은 압니다. 모임 하면 돈 걷는 게 총무가 하는 일이잖아요.”
“그렇지? 나도 아는 건 그게 전분데. 나참 계속 마케팅부에서만 일했더니 총무팀 놈들은 어떻게 조져야 하는지 감이 안 오잖아. 그럼 이걸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아! 형진이가 있지. 다른 사람 일도 아니고 고장희 오빠 일이니 무조건 돕겠다고 하겠지?”
회계사인 형진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반대를 했는데도 결국 형진이와 장희는 다시 재결합했다. 알콩달콩 죽고 못 사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가도 우리 회장님이 그냥 모른척하고 있지만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해지곤 한다.
형진이 집안이 중산층 정도는 되지만, 재벌 입장에서는 중산층이나 서민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 평범한 남자와 재벌가 여식과의 사랑. 두 녀석은 자신들이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주인공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현실은 영화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게다가 지금 장희의 가족 중에서 녀석 편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고현호 이사와 형진이가 친해진다면 든든한 우군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고현호 이사라면 재벌가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형진이를 싫어하진 않을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님도 보고 뽕도 따고’다.
Rrrr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나는 곧장 형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나 지금 바쁜데.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게.”
‘짜식! 비싸게 나오긴. 나도 바쁘거든.’이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어버리려다가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참았다.
“장희가 가장 사랑하는 셋째 오라버니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일인데? 필요 없으면 전화 끊고.”
“뭐? 야. 야. 아냐. 나 하나도 안 바빠. 무슨 일인데, 그래?”
역시 기대했던 반응이 나왔다. 뛰어봐야 손바닥 안이다.
============================ 작품 후기 ============================
프리맨님 조언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음편은 조금 수월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주인공 성격 아시죠? 그 자리에서 들이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닙니다. 어떻게 복수할지는 다음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