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3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투서니 어쩌니 하며 쇼를 한 것도 이런 효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상하군요. 전 한 팀장님에게 비리 혐의가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는데요. 혹시 도둑이 제 발 저린 그런 상황은 아닌 거죠?”
“마 팀장!”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결과는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한 팀장님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 없겠죠. 안 그렇습니까? 한 팀장님?”
“크흠. 다, 당연하지.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원 전체가 결백하다고 나는 믿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저도 우리 동지마트 총무팀이 결백하리라 생각합니다.”
한상질 팀장과 한참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번 회계감사에 참여한 형진이가 정중하게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마동수 팀장님.”
“네. 차형진 회.계.사.님.”
일부러 들으라는 듯 스타카토로 끊어서 녀석의 부름에 대답했다. 그러자 형진이는 내게 다가와서 귓속말을 시작했다.
“이따 저녁에 시간 비워둬라.”
“저녁에? 왜? 무슨 일 있어?”
“우리 회사 대표님이 고현호 이사님과 저녁 약속 잡으셨다더라.”
“오! 그럼 뭐야. 접대? 너희 회사에서 나랑 이사님이랑 접대하는 거 맞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우리 회사 입장에서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하거든. 아무리 후계자 구도에서 가장 밀린다고 해도, 동지 그룹 셋째잖아. 이럴 때 안면 좀 익히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드리기도 하면서 친분을 쌓아야지. 혹시 알아? 대학부터 유명했던 네 잔머리가 동지그룹에서도 빛을 발할지?”
“어쭈. 너 지금 내 잔머리 무시 하냐? D&Y피트니스 클럽도 내 잔머리 덕분에 지금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거거든? 두고 봐라. 내가 동지그룹도 확 먹어버릴 테니까.”
“뭐? 네가 동지그룹을 먹어? 어떻게?”
“뭘 또 못 알아듣는 척해? 정확히 말해 내가 아니라 고현호 이사님이 먹는 거지. 나는 그 옆에 앉아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주워 먹으면 되는 거고. 웃지 마! 표정 진지하게. 그렇게 티 나게 찡그리지 말고, 뭔가 어두우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란 말이야. 어휴. 답답한 녀석. 그럼 너랑 장희가 다시 헤어진다는 상상을 해봐.”
“뭐라고 이 자식아!”
“하하하. 바로 그 표정이야. 딱 좋다.”
지금 나와 형진이는 그냥 쇼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일종의 약속된 플레이? 총무팀 사람들이 나타나면 이런 식의 퍼포먼스를 벌이자고 미리 입을 맞춰놨었다.
대화 내용은 쓸데없는 잡담이었지만, 귓속말이기에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뭔가 중요한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지레짐작하게 만들고 싶었다.
“망할 자식. 농담도 할 게 있고 안 할 게 있거든. 어휴. 그나저나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해? 남자 둘이서 이렇게 소곤소곤하려니 팔에서 닭살 돋는다.”
나라고 형진이 녀석 입 냄새를 맡으며 귓속말을 나누는 게 즐거울 리 없다. 잡담거리도 떨어졌고 아까보다 더욱 흔들리는 저들의 모습을 보니 이제 장난은 여기까지만 해도 될 것 같았다.
“흠. 그렇다면 생각보다 일이 커질 수도 있겠군요. 시작도 하기 전에 그런 큰 건수를 발견하시다니 역시 오영 회.계.법.인.답습니다. 그럼 계속 수고해 주십시오.”
나는 모두 들으라는 듯 과장된 목소리로 대화를 마무리하며 형진이를 돌려보냈다. 웃기게도 지금 가장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한 점 부끄럼 없다.’던 한상질 팀장이었다.
“이 봐. 마 팀장. 내 솔직히 한마디 하지.”
“말씀하십시오. 한 팀장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자넨 모르겠지만, 총무팀에서 일하면 어쩔 수 없이 눈감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어. 일종의 관례라고 하지. 원활한 사회생활을 하려면 필수불가결한 경우가 있어. 마 팀장도 사회생활을 해봤으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거야.”
“모르겠는데요. 전 금전적인 문제에서 있어서는 정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거든요. 한 팀장님은 안 그러신가 봅니다?”
“어허.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지. 자네가 얼마나 깨끗해서 이렇게 잘난척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소한 것까지 잡아내면 우리 총무팀 전원이 일을 그만둬야 할걸? 그렇게 해서 생기는 업무 공백, 자네가 책임질 수 있나? 우리가 없으면 동지마트는 안 돌아간다네.”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문다더니 오히려 협박조로 나오는 한상질 팀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빨이 있는 쥐라야 무서운 법이다.
“하하하.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바보 같은 소리네요.”
“뭐야?”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소리 중 하나가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식의 과대망상 발언이죠. 총무팀 안 돌아간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총무팀 직원 중에서도 팀장님을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걸요? 그리고 혹시나 총무팀 전원이 짤린다고 해도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다 마련해뒀습니다.”
“그게 그렇게 쉬울 것 같아?”
“아까 본 회계사 있죠? 그분과 그분 팀장님은 유통업체 회계부문 컨설팅이 주특기인 사람들입니다. 고작 지점이 열 곳밖에 없는 동지마트 하나 감당 못 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여러분이 전부 짤려도 동지마트가 안 돌아갈 것 같습니까?”
그렇게 차갑게 말하며 천천히 총무팀 직원들과 눈을 마주쳤다. 반응은 다들 제각각이었다. 고개를 돌리는 사람, 흠칫 떠는 사람. 아래로 시선을 피하는 사람. 눈알을 좌우로 굴리는 사람.
그런데 다른 사람과 달리, 눈동자는 흔들렸지만 내 시선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갈등이 많은 얼굴이었다.
“거기 남색 넥타이 매신 분.”
“저 말입니까?”
“네.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네? 아, 아니요. 없습니다.”
“그래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작은 실책은 상황에 따라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다고요. 어차피 다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리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죠. 괜한 의리 지킬 필요 없습니다. 나중에 형사고발 되고 나서 오늘 일을 후회해도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어쨌든, 할 말이 없다고 하니 아쉽군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총무팀 여러분. 법정에서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이봐. 신석주 대리! 가만히 안 있어!”
“윤권아. 가서 저 남색 넥타이 맨 사람 데려와.”
남색 넥타리를 맨 사람의 이름이 신석주였나 보다. 그가 나서려고 하자, 한상질 팀장이 얼굴을 붉히며 팔을 잡아챘다. 그냥 놔두면 상황이 험악해질 것 같아 얼른 윤권이를 투입했다.
“그 손 놓으십시오. 지금부터 여러분이 행사하는 폭력행위는 동지그룹에 대항하는 행위라고 간주하고 단호하게 대처하겠습니다. 제가 어떤 대체를 할지 궁금하신 분 계시면 나오세요. 제가 상대해드립니다.”
나의 지시에 거대한 체구를 가볍게 움직이며 총무팀 사람들 앞에 선 윤권이는, 나직한 목소리 하나로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해버렸다. 녀석은 어느새 나의 만능칼이 되어버렸다.
“신석주 대리님.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휴. 네. 있습니다. 정말 아무 탈이 없는 건가요? 정말 제가 저지른 실책은 눈감아 줄 수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주 가담자만 아니라면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으실 거라고 고현호 이사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죠. 제공하는 정보 여하에 따라서는 포상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포상은 필요 없습니다. 솔직히 다른 직원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가담하긴 했지만, 그동안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지금이라도 털어버릴 수 있다면 전 그걸로 만족합니다.”
이걸로 한상질 팀장은 완전히 끝이다. 내부고발자까지 나왔으니 회계감사는 어렵지 않게 진행될 것이다.
“좋습니다. 그건 대화를 나누면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남진우 대리님!”
나는 임시로 동지마트 보안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남진우 대리를 불렀다. 지금 동지마트는 대부분이 서로 작당하고 있어서 믿을 사람이 부족했다. 그래서 고현호 이사의 경호를 맡고 있는 그에게 보안 업무를 대신하게 했다.
“네. 부르셨습니까, 마 팀장님.”
“여기 이분은 총무팀의 신석주 대리님이십니다. 이번 회계 감사에 협조하신다고 하니 8층에 마련해둔 사무실로 안내해주세요. 중요한 증인이 될 수도 있으니 안전하게 모셔주셔야 합니다. 저는 이곳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곧 뒤따라 올라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남진우 팀장이 신석주 대리를 대동해서 8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총무팀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자, 잠깐만요. 마 팀장님.”
“네? 할말 있으십니까?”
“저도 신석주 대리님과 같이 올라갈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현승. 이현승 주임입니다.”
“좋습니다. 남진우 대리님. 여기 계신 이현승 주임도 같이 모셔주세요.”
“저도 어쩔 수 없이 가담했습니다. 아는 건 전부 말씀드릴 테니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서로가 가지고 있던, 위태위태했던 유대감이 무너지자 신석주 대리 이후 자신이 단순가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세 명이나 더 나왔다. 한상질 팀장은 지금 사태가 믿기지 않는지 넋을 잃고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더는 아무도 없습니까?”
나의 질문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체념한 얼굴이었다.
“좋습니다. 정말 한 점 부끄러움이 없거나, 아니면 상당한 비리를 저질렀거나. 둘 중 하나겠죠? 지금 당장 여러분이 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편히 쉬셔도 됩니다. 며칠간은 회사에서 주는 유급휴가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혹시라도 귀책사유가 밝혀진다면 연락을 드릴 수도 있으니 휴대전화를 꺼놓거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마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나는 추미래씨가 혼자 일하고 있을 우리팀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팀장님.”
“응? 왜? 무슨 할 말 있어?”
“전에 제게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는 전면에 나서지 않겠다고요. 조용히 뒤통수만 치겠다고요.”
“그랬지.”
“그런데 오늘은 왜 그렇게 총무팀 사람들 약을 올린 겁니까?”
“뭐?”
나는 윤권이의 지적에 그제야 오늘 내가 한 행동이 어떤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다른 생각이 있으셔서 일부러 약을 올리신 겁니까?”
“다, 당연하지. 일부러 그렇게 압박을 주니까 단순 가담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나섰잖아. 덕분에 일이 얼마나 편해졌어. 안 그래?”
말은 그렇게 둘러댔지만 속으로는 아차 싶었다. 그렇게 나서는 걸 좋아하다가 큰일까지 겪어놓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깐죽거리고 싶은 천성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 정도야 기본이지.”
“그런데 앞으로도 굳이 뒤에 숨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제가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든 제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윤권이는 큰소리를 뻥뻥 치며 씨익하고 웃었다.
‘이 녀석 내가 실수한 걸 눈치챈 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징그러운 저 미소가 듬직하게 느껴지긴 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이상하게 글이 잘 안 써지네요. 하루 한 편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하루에 몇 편씩 쓰는 작가님들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도 다시 분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