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1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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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용역.
천호역 5번 출구에서 나와 천호동 로데오 거리를 따라 걸어가면 ‘ㅈ’자 형태의 사거리가 나온다. 왼편의 강동농협 로데오 지점 앞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거기서부터가 바로 천호시장이다. 시장 입구에는 청원약국이 있는데 그 옆 건물 5층에 자리 잡고 있는 용역업체가 바로 비정용역이다.
회사 이름은 허접해 보여도 천호동을 주름잡는 조직폭력 단체인 천호파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관리할 만큼 알짜배기 용역업체이다.
지리적으로도 상당히 괜찮다. 엘마트 본사가 잠실역 근처에 있고, 포에버마트 본사는 선릉역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동지마트 본사 또한 천호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락시장역에 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비정용역 입구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부는 심플하면서도 세련되고 꾸며져 있었다.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맞는 직원의 모습은 영화나 TV에서 등장하는 허름한 용역업체와는 많이 달랐다.
“저… 일자리가 있나 싶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어떤 일자리를 원하시는데요?”
“제가 아는 사람 소개로 왔거든요. 듣기로 대형 할인 마트에 취직시켜 줄 수 있다고 해서요. 혹시 가능한가요?”
“쉿!”
직원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검지를 올려 여자의 말을 멈췄다.
“왜 그러세요?”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오셨는지 몰라도, 그런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하셔야 합니다. 대형 할인 마트가 아무나 취직할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 다들 대기업이 운영하는 곳이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직원들 처우도 괜찮고, 4대 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어요.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비정규직 직원들하고는 비교하기 어렵죠.”
직원은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알린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희도 정말 어렵게 어렵게 자리를 구합니다. 그래서 아무나 소개를 해드릴 수 없어요.”
“아! 저도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래서 고생하신 대가로 소개료를 받으신다고.”
“어허! 소개료라니요. 저희는 소개료를 받고 그런 게 아닙니다. 보다 많은 분에게 혜택을 드리기 위해 회사를 운영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찬조금을 받을 뿐이죠. 금액은 고객님이 마음에 우러나오는 대로 주시면 됩니다.”
“그렇죠. 제가 실수했네요. 소개료가 아니라 찬조금. 저도 그렇게 들었는데, 그 단어가 생각이 안 났어요. 죄송해요.”
여자는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연신 조아렸다.
“하하하.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그리 익숙한 단어는 아니죠? 저도 가끔 안타깝게 느낄 때가 있지만, 사장님의 경영마인드가 워낙 확고해서요.”
“그렇구나. 정말 훌륭하세요. 그런데 찬조금은 얼마나….”
“크흠. 그냥 마음에 우러나오는 대로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큰돈이 없어서요. 삼백 밖에 준비를 못 했는데.”
“삼백이요? 다른 분들보다 찬조금 액수가 조금 적긴 하지만 다행히 자리가 하나 있군요. 동지마트 어떻습니까?”
“동지마트요? 그런 곳도 있나요?”
“아! 모르시는구나. 혹시 동지그룹은 아십니까?”
“그럼요. 굉장히 큰 회사잖아요.”
“바로 그 동지그룹에서 운영하는 대형 할인 마트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래요? 그럼 믿을만하겠네요?”
“그럼요. 그럼 고용계약서 작성할까요?”
“네. 그럴게요.”
여자가 수락하자 직원은 재빨리 책상 서랍을 열어 계약서를 꺼냈다.
“참. 그리고 한 가지. 매달 월급의 10%를 수수료로 떼어갑니다.”
“네? 10%나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건 우리 몫이 아니라 자리를 소개해주는 마트의 고위직 관계자분에게 드려야 하는 돈이거든요. 싫으시면 계약은 없던 것으로 해도 됩니다.”
“아니요. 아니에요. 할게요. 계약서에 인적사항 적고 서명하면 되나요?”
“네. 혹시 모르니 계약서 내용은 꼼꼼하게 읽어보시고요. 문제가 없다 싶으면 주소, 주민번호, 이름, 연락처 이렇게 적어주시면 됩니다.”
“계약서 내용을 읽는다고 제가 뭘 아나요? 좋은 일 하시는 분이니 당연히 믿어야죠.”
“하하하. 시원시원하시네요. 어디 보자. 주소. 서울시 종로구 내자동 201-11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응? 경찰청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여보세요. 아주머니. 장난치시면 곤란합니다. 주소를 제대로 적으셔야죠.”
“응? 주소 제대로 적은 거 맞는데.”
“서울지방경찰청이 무슨 주소라고….”
“호호호.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내가 경찰이니까 그렇지.”
쾅!!
여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사복과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
“상황은 어때?”
“아직은 정신없습니다. 그냥 망망대해에 떠 있는 듯 막막하기만 합니다.”
“엄살은. 그래도 잘해낼 거잖아.”
“너무 남의 이야기처럼 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요.”
나를 믿는 건 좋은데 가끔 보면 고현호 이사는 너무 남의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할 때가 있다. 무신경한 건지 무덤덤한 건지, 그런 모습을 보면 좀 얄밉다.
“알지. 우리 마 팀장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그런데 그냥 온 것 같지는 않고, 무슨 할 말이 있어 온 거야?”
“용역 브로커 비리건 경찰 친구에게 수사 부탁했다고 며칠 전에 보고드렸죠?”
“그랬지. 유능한 친구라고 했잖아. 나도 개인적으로 알아봤는데 경찰 쪽에서는 굉장히 유명하더군.”
“네. 그 친구에게 조금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벌써 수사가 끝난 거야?”
“수사가 아니라, 이미 용역 업체에 들이닥쳐 관계자 전원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뭐? 하하하. 마 팀장 친구라서 그런지 추진력 하나는 엄청나구먼.”
광우 녀석의 추진력은 어릴 때부터 유명했다. 녀석과 비교하면 나는 거북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친구 녀석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동시에 전해왔습니다. 뭐부터 들으시겠습니까?”
“좋은 소식부터 들어보자고.”
“그 용역업체와 관련된 대형 할인 마트가 우리 말고도 더 있답니다. 엘마트와 포에버마트. 확실하게 밝혀진 곳은 일단 두 곳입니다.”
“그래? 그것참 다행이네. 우리만 독박 안 써도 되고. 생각해보니 용역비리가 그리 만만한 사건이 아니더라고. 그럼 나쁜 소식은 뭔데?”
“용역업체가 사람들을 동지마트에 채용해주면서 300만 원 정도의 소개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별도로 매달 10%의 수수료를 따로 뗐고요. 소개료는 용역업체가 먹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문제는 수수료입니다. 수수료의 2/3는 총무팀장과 인사팀장이 나눠 먹었기 때문에 동지마트가 도의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흠. 10%면 얼마나 되지?”
“보통 비정규직 직원들이 한 달에 가져가는 돈이 평균 140만 원 정도 됩니다.”
“140만 원? 그거밖에 안 돼?”
“시급으로 따지면 8,000원 정도 됩니다. 4대 보험까지 보장해주기 때문에 그리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다. 한 달이면 22일 정도 되니까 평균 176시간을 근무하는 셈이다. 2010년 최저임금은 4,110원인 것을 감안하면 대우가 나쁘다고 하기는 어렵다.
140만 원이라는 돈으로 한 달을 살려면 빠듯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임금을 올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형 할인 마트는 가격 경쟁이 생명인데, 인건비에서부터 경쟁력을 잃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직원들을 쥐어짜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남들 주는 만큼 주는 것. 그게 우리 동지마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걸로 생활이 되나?”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총무팀장과 인사팀장은 그 사람들에게서 10%의 수수료를 떼갔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망할 놈들이었군.”
고현호 이사가 이렇게 과격한 표현을 하는 건 처음 봤다. 표정을 보니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맞습니다. 망할 놈들. 게다가 피해자가 무려 1,500명에 이릅니다. 개개인으로 보면 14만 원밖에 안 되지만, 1년 동안의 피해액을 계산하면 25억 원에 이르는 거금입니다.”
복잡하게 계산할 것도 없다. 한 달 14만 원, 1,500명, 12달. 이렇게 세 가지 숫자를 곱하면 25억 2천만 원이 나온다.
“허허. 정말 엄청나게 해먹었군. 그럼 인제 어쩌지?”
“가장 이성적인 건 총무팀장과 인사팀장 그리고 용역업체에서 돈을 돌려받고, 그 돈을 피해자들에게 돌려주는 방법입니다.”
“돈을 다 회수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잖아. 다른 업체와 차별화도 안 되니 결국 똑같은 놈으로 취급받겠군. 그럼 이 사건을 미리 알고 있는 이득이 아무 것도 없는 셈이잖아. 어쩐다. 흠.”
“회사 돈으로 지급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그건 곤란해. 지금 동지마트 재무 상태는 꽤 위태로운 지경이야. 비자금 회수가 안 되면 금방 곤경에 처할 수도 있어. 지금 상황에서 25억 원을 지출하는 건 거의 자살행위지. 방법은 하나 뿐이군.”
“괜찮은 방법이 있습니까?”
막막한 상황인데 고현호 이사가 방법이 있다고 하니 귀가 솔깃해졌다.
“있지. 우선 내 개인 돈으로 보상하면 돼.”
“네?”
“뭘 그렇게 놀라? 수수하게 다녀도 재벌 2세거든! 25억 원 정도는 마련할 수 있어.”
25억 원이라는 거액을 개인 돈으로 보상하다니!
이건 정말 나로서는 절대 생각해낼 수 없는 엄청난 스케일이다. 그냥 재벌 2세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대기업의 셋째 아들이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도 25억 원은 적지 않은 금액이겠지만, 그렇다고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도 아니었다.
“정말 가능하십니까?”
“당장 가진 현금은 없지.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께 받은 유산도 있으니 그걸 담보로 잡으면 어려울 것도 없어. 급한 불은 꺼야 하지 않겠어?”
“급한 불만 끄는 게 아니죠. 이번 수사가 발표되면 용역 비리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텐데, 한 경영자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한다? 어쩌면 국민들에게 동지마트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마트. 생각만 해도 멋진데요.”
“하하하. 역시 꼼수의 달인다워. 민망하긴 하지만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지. 이렇게 됐으니 무조건 25억 원부터 마련해야겠군.”
“그럼 저는 거기에 맞춰 언론 보도를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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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꼼수 마케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