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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204화 (204/424)

00204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나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이사를 결정했다. 현관부터 침실 심지어 다락방과 테라스까지 시연이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그녀가 나를 위해 만든 이 공간을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혹시라도 시연이의 돈으로 집을 샀다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거절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이사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지금까지 살던 오피스텔은 거의 모든 게 갖춰져 있던 풀옵션이어서 노트북과 옷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한가지 불편한 점이라면 윤권이와 같이 살게 되었다는 사실. 시연이의 ‘윤권 오라버니 방도 준비했어요.’라는 말에 입이 찢어질 정도로 환하게 웃는 녀석을 보며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이 넓은 집에 혼자 사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며 녀석과의 동거를 애써 합라화 할 수 밖에…. 안 그래도 데이트할 때마다 따라붙어 불편했는데, 이젠 집에서도 마음놓고 스킨십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팀장님. 팀원 모집에 대한 기획안입니다. 검토해주세요.”

얼렁뚱땅 이사를 마치고 회사에 출근하니 미래씨가 기획안을 제출했다. 내가 팀장이 되면서 처음 받아보는 기획안이라서 그런지 왠지 기분이 남달랐다.

“어디 봅시다. 동지마트를 대한민국 최고의 할인 마트로 키워나갈 열정적이고 역량 있는 인재를 찾습니다. 오호. 대한민국 최고의 할인 마트. 제목부터 패기가 넘치네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 선생님에게서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다는 말씀을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꿈이 큰 사람은 꿈을 이루지 못해도 꿈이 작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요?”

“네. 맞아요.”

나 또한 그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지만 서른 넘게 살면서 그 소리가 얼마나 헛소리인지 알게 되었다. 일단 사람의 꿈에 경중을 따지는 것 자체가 실례다. 어떻게 보면 같은 공무원인데 대통령을 꿈꾸는 건 좋은 꿈이고, 학교 선생님을 꿈꾸는 건 나쁜 꿈인가?

그리고 결국 1등만 원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봐야 2등 이하는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도 간과했다.

‘미래씨. 저는 망상가를 뽑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녀의 첫 기획안인데 겨우 문구 하나로 시비를 걸려는 내 자신이 어이가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획안을 제출하는 입장일 때는 별것 아닌 거로 시비 거는 직장상사가 정말 꼴불견이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그들의 모습을 답습하게 될 줄이야! 확실히 뭔가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되면 방어적이 된다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요. 지금은 비록 대형 할인 마트에서 꼴찌를 차지하고 있지만, 10년 뒤에는 3-마트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설지도 모르죠. 음. 그다음, 참가 자격은 동지마트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이제한 없고, 학력제한 없고. 참가 방법. 동지마트를 활성화 시킬 방안이 담긴 아이디어 1개와 자신이 TF팀에서 왜 일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유로운 방식으로 서술해서 제출.”

어차피 나이나 학력은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미 난다 긴다 하던 동지그룹의 엘리트들이 달라붙어서 살리려고 노력해도 실패했던 과거 전력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거를 거울삼아 머리보다는 경험을 믿어보기로 마음먹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기획안에서 눈에 띄는 건 동지마트를 활성화 시킬 방안이 담긴 아이디를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동지마트에서 일하는 직원을 모두 합치면 대략 5,000여 명이 된다. 그들 중 과연 몇 명이나 아이디를 낼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계속 일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모이면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회생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느라 머리털이 전부 빠질 지경이었는데, 그녀의 기획안은 그런 내게 가뭄 뒤의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자유로운 방식으로 서술해달라고 했어요. 자유롭게 글을 쓰다 보면 동지마트에 대한 그 사람의 애정이 드러나기 마련이고요. 제 깜냥으로 옥석까지 가리지는 못해도 최소한 어중이떠중이는 가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요. 제가 디자인팀에 연락을 넣어둘 테니까 팀원 모집 포스터부터 만드세요. 시간이 없으니까 오늘 당장 만들어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뿌릴 수 있게요. 그러니 화려한 디자인을 넣지 말고 최대한 깔끔하게. 아셨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합시다.”

“어떤 내용을요?”

“그냥 막연히 아이디어만 내라고 하면 직원들이 아무런 관심을 안 가질 수도 있어요. 그러니 상금을 걸도록 하죠.”

“네? 상금을요?”

“네. 아이디어는 있는데 TF팀에서 일하기 싫은 사람들도 있을 것 아닙니까? 어차피 직원들에게 아이디어를 얻을 생각이라면, 굳이 TF팀에 지원을 원하는 사람으로 자격제한을 할 필요는 없겠죠. 이런 종류의 아이디어는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좋습니다.”

“역시 팀장님이세요. 저는 그런 것까지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녀의 아이디어에 살짝 양념만 쳤을 뿐인데, 미래씨가 감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괜히 민망해졌다. 역시 아직은 어린 스물한 살의 순수한 소녀였다.

“그냥 미래씨의 아이디어를 살짝 틀었을 뿐이에요. 그러니 미래씨의 아이디어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상금은 얼마로 정할까요?”

“1등은 1천만 원, 2등은 5백만 원, 3등은 2백만 원으로 하겠습니다. 그 외에 사소한 개선책이 담긴 아이디어라도 제출해서 채택되면. 음. 뭐가 좋을까요? 미래씨. 돈 말고 직원들에게 동기유발을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휴가요! 휴가가 최고죠.”

“그래요, 그럼. 채택되면 무조건 30만 원의 휴가비와 함께 3일짜리 휴가권을 주는 걸로 하죠.”

“헉. 정말이요? 그럼 혹시 저도 제출해도 되나요?”

“하하하. 그건 곤란해요. 미래씨는 주최자이니까요. 그렇다고 실망하진 마세요. 만약 TF팀의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주임급으로 승진과 함께 최소 한 달짜리 휴가를 보내드릴 테니까요. 유럽 여행권은 보너스? 유럽이 싫으면 다른 나라도 괜찮고요.”

“아니에요. 유럽 좋아요. 분명 약속하셨어요. 한 달 휴가와 유럽 여행권!”

“물론입니다. 회사에 안 보내주면 제가 자비로 보내드릴게요. 그러니 열심히 일만 해주세요.”

“당연하죠. 팀장님. 꼭 휴가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고요. 정말 열과 성을 다해 TF팀을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 그럼 어서 디자인팀에 연락 주세요. 저는 당장 포스터부터 만들겠습니다.”

***

동지마트 본사 근처의 일식당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냐. 광화문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막히는데. 저녁 먹자고 불러냈으면 당연히 기다려야지. 그나저나 학수야. 사석에서는 말 좀 편하게 하라니까. 친구잖아.”

고현호 이사와 마케팅 3부의 김학수 부장은 원래 동갑내기 친구사이였다. 그러나 같이 일하기 시작하면서 김학수 부장은 고현호 이사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다. 그만큼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럴 수야 없죠.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으려면 평소에도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동지그룹을 그만두게 되면 그때 가서 말을 편하게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건 안 되지.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인데 그만두게 할 수는 없지.”

“이제 저 말고도 든든한 버팀목이 한 명 더 생겼지 않습니까?”

“아하, 마동수 팀장? 혹시 질투하는 거야?”

“질투라니요. 애들도 아니고. 그동안 제대로 된 기반도 없는 이사님을 혼자 모시느라 힘들었는데, 든든한 우군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합니다.”

“이거 서운한데. 나는 김 부장이 질투를 좀 해줬으면 했는데 말이야. 내가 요즘 마 팀장을 많이 아끼고 있거든.”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김학수 부장을 바라보는 고현호 이사의 눈빛에는 신뢰가 가득 담겨있었다.

“저도 개인적으로 알아봤는데 정말 괜찮은 인물이더군요. 이사님 같은 분이 영입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닌 것 같았는데, 정말 운이 좋으셨습니다.”

“내가 어때서? 내가 원래 사람 복은 좀 타고났어. 그런데 마 팀장이 정말 괜찮아 보여?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마 팀장이 어떤지 갑자기 궁금한데?”

“한 마디로 균형 잡힌 인간형으로 보였습니다.”

“균형 잡힌?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나 이사님은 좌뇌형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이고 계산적이며 고지식한 게 특징이죠. 반면 우뇌형 인간은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이며 감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펴본 마동수 팀장은 좌뇌와 우뇌가 굉장히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즉흥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무계획적이면서도 계산적인. 사람이 그러기 쉽지 않은데, 정말 특이한 인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그렇게 깊이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김 부장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군.”

“두뇌회전이 빨라서 그렇습니다. 즉흥적인데 그걸 논리적으로 계산해내는 능력. 부러운 재주죠.”

“그걸 일명 잔머리가 좋다고 하는 거야. 물론 그냥 잔머리가 아니고 거의 예술적 경지에 오른 잔머리라고 할 수 있지. ‘저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라며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마동수 팀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고현호 이사는 침을 튀겨가며 그에 대한 칭찬을 시작했다.

“더욱 대단한 건 그의 거침없는 추진력입니다. 보통 잔머리 굴리길 좋아하는 사람은 행동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사해본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더군요. D&Y피트니스 클럽도 사실상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그동안 묻혀 있었던 게 신기할 지경입니다.”

“내게 천운이 따랐지. 그동안 괴팍한 직장상사들을 만나 자신의 능력을 꽃피우지 못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회사에서 인정받고 막 자신의 능력을 피워보려고 할 찰나에 견제를 받아 동지랜드도 쫓겨나고. 이리저리 운이 따르지 않았던 친구야. 물론 내 입장에서 보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지만. 마 팀장의 예전 직장상사인 양지선 팀장인가 하는 그 여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은 심정이야. 하하하.”

“이번 광고 건도 그렇습니다. 용역 비리로 피해를 본 직원들에게 사비를 털어 선보상을 하겠다는 이사님을 보며, 역시 같이 일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 팀장은 언론플레이를 통해 이사님과 동지마트의 이미지 제고방안까지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를 이사님에게 듣는 순간 순발력 하나는 동지그룹에서 최고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정도는 마 팀장에게 그냥 일상적인 일이니까. 앞으로 같이 일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능력도 좋은데 이젠 배경까지 좋아졌으니 금상첨화죠.”

“배경?”

“왜 갑자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십니까? 마동수 팀장이 윤 스포츠센터의 예비 사위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실 리가 있습니까?”

“그건 그냥 덤이지. 물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훗날 큰 힘이 되겠지만, 난 배경보다는 그 친구가 가진 능력이 훨씬 더 소중해. 배경 좋은 사람들이 필요했으면 재벌 2세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게 더 낫지. 아무튼, 학수야.”

“네, 이사님.”

“마 팀장과 함께 앞으로 날 많이 도와줘. 두 사람은 내가 정말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니까.”

“물론입니다. 전 이미 저의 모든 커리어를 이사님에게 걸었습니다.”

똑똑똑.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 팀장이 도착했나 보군. 마 팀장이면 들어와!”

고현호 이사의 말에 별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마동수 팀장이 미안한 얼굴을 지으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훗날 대한민국 재계를 뒤흔들 세 사람의 첫 만남은 이렇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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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좌동수, 우학수의 첫 만남.

고지식하지만 단단한 김학수 부장

즉흥적이지만 유연한 마동수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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