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5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고현호 이사가 언론 쪽 전문가를 소개해준다며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던 차였다.
약속장소인 일식집에 도착하자 예약자의 성함을 들은 종업원이 별실로 안내했다. 안내를 받으며 살펴본 이곳은 지금까지 내가 가본 어떤 일식집보다 고급스러운 식당이었다.
‘아! 역시 재벌은 일식집을 예약해도 뭔가 다르네.’라며 감탄하는 사이 고현호 이사가 있는 별실에 도착했다.
똑똑똑.
“마 팀장이면 들어와!”
종업원이 노크를 하자 고현호 이사의 목소리가 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종업원을 돌려보내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이 갑자기 저녁을 먹자고 연락을 하셔서 제가 좀 늦었습니다.”
“어서 와. 마 팀장.”
내가 들어가자 고현호 이사가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고, 언론 쪽 전문가로 보이는 사람은 등을 보인 채 앉아있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이곳에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김 부장님이 여길 어떻게?”
이름 김학수. 주식회사 동지 마케팅 3부 부장.
올해 나이로 서른일곱. 얼마 전까지 나와 함께 일했던 조기훈 팀장님보다 한 살 어렸다. 작년 말에 팀장으로 승진한 조 팀장님도 나이에 비해 승진이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김학수 부장의 승진 속도는 차원부터 달랐다. 지금까지 있었던 동지그룹의 최연소 승진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우는 바람에 알려지지 않은 로열 패밀리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물론 헛소문이었다. 그만큼 그의 실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미디어를 공부했고 동지그룹 마케팅부에서 일하면서 미디어 마케팅 분야의 일인자로 거듭났다. 근래에는 소셜미디어 마케팅이라는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낯선 새로운 마케팅분야를 개척해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다고 들었다.
그의 능력은 두말할 나위 없이 대단하다. 하지만 하버드 대학 출신이라 둘째인 고평호 상무 쪽 사람이라는 소문이 거의 정설처럼 굳어져 있었다.
“제가 여기 있는 게 의외인 모양입니다? 마치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을 본 표정이군요.”
“네? 죄송합니다. 예상보다 너무 대단한 분이 앉아 계셔서 그랬습니다.”
“예상보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예상 밖의 사람이라 그런 건 아니고요?”
“하하하. 그렇기도 하죠? 아무래도 부장님께서 하버드 출신이니까요.”
“그래서 같은 하버드 대학 출신인 고평호 상무의 사람이라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군요. 고평호 상무님의 하버드 사랑은 동지그룹에서 꽤 유명하지 않습니까?”
“내 친구야. 그래서 형님에게 가지 못하고 내게 코가 꿰었지. 그러니 그만 궁금해하고 자리에 앉아.”
내가 의아해 하자 고현호 이사가 나서서 의문을 풀어줬다.
“아! 우정 때문에 안 좋은 선택을 하셨군요.”
“뭐야? 어이. 마 팀장. 너 지금 나 디스하는 거야?”
“디스라니요.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솔직히 고생문이 훤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부장님?”
“이제 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 생겼군요. 마 팀장은 이사님과 인연이 된 지가 1년밖에 안 됐지만, 저는 일로 엮인 지만 벌써 몇 년째입니다. 고생으로 말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마 팀장이 가세하면서 여유가 좀 생겼죠. 잘 오셨습니다. 웰컴 투 헬입니다. 하하하.”
업무 스타일이 굉장히 고지식하다고 들었는데, 사석에서는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첫 만남이지만 그 모습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안면 익히라고 불렀더니 사람 앞에 두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작당 모의를 해도 되는 거야? 나 이거 서운해지려고 하네. 두고 보자고. 내가 완전히 술로 죽여주겠어. 오늘은 둘 다 집에 갈 생각은 버리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식집에서 식사를 마친 우리는 조용한 바로 자리를 옮긴 뒤 본격적인 업무 이야기를 시작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나와 김학수 부장님만 업무 이야기를 나누고, 고현호 이사는 자신이랑 안 놀아준다고 칭얼거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일 중독자들 같으니라고. 일 이야긴 그만하고 술 마시자고.”
고현호 이사가 계속 졸랐지만 우리는 그의 존재 자체를 아예 무시해버렸다.
“그렇다면 용역 비리 수사 발표가 언제쯤 나올 것 같습니까?”
“수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일주일 안에 발표가 날 것 같습니다.”
김학수 부장님이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건 역시 용역 비리 사건이었다.
“그럼 시간인 그리 많지는 않군요. 대략적인 수사내용을 알 수 있습니까?”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형 할인 마트 4곳과 청소 용역을 주던 10여 개 업체에서 용역비리가 드러났다고 하더군요. 아쉬운 건 3-마트가 빠졌다는 사실입니다. 협의가 정말 없는 건지, 아니면 워낙 철저하게 감춰둬서 아직 밝히지 못한 건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벌써 여기저기서 압박이 들어와 시간을 두고 수사를 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일단은 엘마트와 포에버마트 그리고 대박마트에 타격을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3-마트를 잡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럴 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죠. 이번 일을 계기로 3-마트는 더욱 탄탄대로를 달리겠지만, 그런 것까지 우리가 신경 쓸 여유는 없습니다. 그럼 이사님. 피해자 직원들에 대한 보상 준비는 잘 되고 계십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주식을 담보로 이미 대출 신청을 해뒀어. 5일 안에 보상 건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으니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
“그런데 이사님. 필요한 돈이 무려 25억 원입니다. 돈을 못 받을 수도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못 받아도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웬만하면 받을 수 있을 거야. 우리 동지 그룹 법무팀을 움직여서 완전히 탈탈 털어버릴 거거든. 혹시 총무팀장과 인사팀장에게서 돈을 못 받아내면 용역업체 배후에 있는 천호파에게 대신 보상하게 하면 돼.”
“네? 깡패들한테요? 위험하지 않아요?”
“쯧쯧. 마 팀장아. 너는 동지그룹이 뭐라고 생각해?”
“재계 서열 5위의 대기업이요?”
“대한민국에서 서열 5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 조직폭력 단체 하나 감당 못 할 것 같아? 그리고 이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아버지가 가만히 안 계실 거야. 아버지와 대적하느니 어떻게 해서든 그 돈을 토해내는 게 천호파 입장에서도 좋을 거야.”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이번 일은 그냥 단순히 동지마트의 일이 아니라 동지그룹과도 관련된 일이다. 특히나 동지마트를 정상궤도에 올리려고 노력했던 회장님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그런 식으로 호박씨를 깐 직원들을 그냥 내버려 둘리가 없다.
은혜는 10배로 원한은 100배로. 이게 바로 우리 회장님의 슬로건 중 하나이며, 동지그룹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럼 돈을 빼앗긴 천호파도 가만히 있진 않겠군요.”
“당연히 그렇겠지. 총무팀장과 인사팀장이 그 돈을 전부 토해내도록 죽도록 괴롭히겠지. 손해 본 걸 그냥 웃으며 털어버릴 놈들이 아니니까.”
‘죽도록 괴롭힌다.’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그 대상이 총무팀장과 인사팀장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이 될 수도 있다. 조폭이라는 것들에게 상식을 기대하면 안 된다. 괜한 욕심을 부렸다가는 가족 자체가 산산조각이 날지도 모른다.
“가족들이 피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총무팀장과 인사팀장이 최악의 선택은 안 하리라 믿어. 그리고 오영 회계법인에서 1차로 올린 보고서를 보니 농산물 납품 비리에서도 꽤 많이 해먹은 것 같더군. 그러니 그 돈은 충분히 갚고 남을 거야.”
“그 소식은 아직 못 들었는데, 많이 해먹었답니까?”
“대충 봤는데도 10억 원이 넘더라. 어휴. 망할 놈들. 그러니 동지마트가 이 모양 이 꼴이지. 위에서는 비자금 만든다고 휘청, 아래에서는 자기들 배 불린다고 휘청. 지금까지 안 쓰러진 게 용해.”
“지금부터라도 체질 개선을 해야죠. 어쨌든 5일 안에 보상을 끝낼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이군요. 그럼 부장님. 수사 발표 시기에 맞춰서 언론을 적절하게 움직일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솔직히 이건 거의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습니다. 비정규직 직원들의 등골을 빼먹는 대형 할인 마트. 후폭풍이 엄청나겠죠. 대기업에 대한 성토도 대단할 겁니다. 그 와중에 사비를 털어 피해자들에게 전액 보상 조치를 한 경영자. 언론만 잘 이용하면 순식간에 영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짜릿합니다. 이게 진정한 미디어 마케팅의 묘미거든요.”
“오! 그럼 우리 이사님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시게 되는 겁니까?”
“아마 많은 사람에게 고현호라는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질 겁니다.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생각입니다. 마 팀장이 이렇게 멍석을 깔아줬는데 이것도 제대로 못 받아먹으면 마케팅 3부 부장 자리를 내놓아야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학수 부장님이 저렇게 호언장담을 할 정도면 이제 이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등을 맡길 수 있는 믿을만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 확실히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부장님. 단순히 이사님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에서 멈추면 뭔가 아쉬울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든 동지마트의 매출과 연결을 시켜야 하는데, 제가 그쪽까지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은 안 됩니다. 혹시 괜찮은 방법 없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후속 조치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학수 부장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현호 이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말해도 돼. 어차피 마 팀장에게도 이야기해 둔 일이니까.”
“용역비리와 농산물 납품 비리까지 모두 깨끗하게 정리한 후 새로운 광고모델을 등장시킬 겁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깨끗하면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진 모델이 필요하겠죠.”
“설마 시연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이미 이사님과 광고 모델을 하기로 구두 계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긴 한데 새로운 동지마트를 알리는 정말 중요한 광고 모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연이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충분히 통합니다. 안 그래도 동지랜드에서 찍었던 모델 사진들을 봤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동지마트 모델로 활용하기 아까울 정도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 동지그룹 이미지 모델로 발탁을 한다고 해도 큰 효과를 볼 정도로 대단한 외모더군요.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습니다.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제 여자친구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니 민망하네요.”
김학수 부장의 극찬에 괜히 무안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대단한 정도가 아닙니다. 이건 전문가인 제가 드리는 말씀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당장 연예인을 한다고 해도 외모만으로 탑클래스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연예인에는 관심이 없답니까?”
“네.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합니다. 예전에 유명했던 여자 앵커를 보며 꿈을 키웠다고 하더군요. 본인도 그렇게 당당하고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다고요.”
“오! 그래요? 아나운서를 해도 충분히 성공할 겁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아나운서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거든요. 왠지 2000년대 초반 이후 명맥이 끊긴 대형 여성 앵커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군요.”
김학수 부장님은,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고지식한 사람이 아니라 기분파라고 생각할 만큼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어쨌든 시연이에 대해 그렇게 극찬을 해주니 나로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자. 그럼 두 사람 이야기는 끝난 거야?”
“아닙니다. 아직 할 이야기 많이 남았습니다. 그동안 미디어 마케팅, 특히 소셜미디어 마케팅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오늘 제대로 배워보고 싶습니다.”
“하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님이 마 팀장을 보며 꼼수 마케팅의 일인자라고 평하시더군요. 그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안 돼! 오늘은 그만. 이 사람들이 진짜 일 중독자들도 아니고. 그만해. 지금부터 일 이야기하면 벌칙으로 위스키 글라스로 원샷! 알았지? 그럼 이제 즐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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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재산 내역은 조만간 한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마 동지마트 주식을 매입할 때 언급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랑은봄비처럼, 카시니츠님 오탈자 지적 감사합니다.
꿈꾸는 여인님 형가사까지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형가사는 나중에 꼭 제대로 수정하고 싶은 글입니다. 여러가지로 많이 부족했거든요. ㅠㅜ 그리고 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