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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208화 (208/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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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박서라 개인신상 카드 >

- 이름 : 박서라      - 성별 : 여

- 나이 : 87년 5월생 (만 23세)

- 학력 :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휴학 중

- 가족사항

아버지(일용직), 어머니(가정주부), 남동생(대학생)

TF팀 지원서에는 나이, 이름, 연락처만 적을 수 있게 해놔서 그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동지마트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 박서라라는 이름으로 검색했더니 간략하게나마 몇 가지 추가 정보가 나왔다.

만 23세. 우리나라 나이로 24살이다. 여학생들의 경우 보통 23살에 졸업을 하는데, 24살에 휴학 중이라는 건 예전에도 몇 번 휴학했다는 걸 의미한다.

공립대학을 선택한 것도 그렇고 가족사항을 봐도 확실히 가정형편이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본인의 학비가 아니라 가족의 생활비나 동생의 학비를 위해 휴학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기를 죽이기 위해 했던 말이 너무 심했던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서라씨가 제출한 지원서와 개선안을 보니 나의 말이 상처가 되기보다는 자극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개선안으로 제출한 서류는 굉장히 깔끔했다. 행정학과 출신이라 그런지 보고서에 체계가 갖춰져 있었다. 서술구조도 굉장히 논리적으로 이어져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다.

서라씨의 두 번째 개선안도 꽤 쓸만했다. 그녀는 동지마트의 모든 지점이 아파트 단지와, 그것도 중상급 이상의 주민들이 사는 지역, 인접한 최적의 상권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소비자들에게 좀 더 밀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일반적인 아파트 단지의 가장 큰 관심사는 교육이다. 서라씨의 개선안은 동지마트가 그들의 교육에 대한 니즈를 대신 충족시켜주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쉽게 설명하면 백화점의 문화센터같은 교육 시스템을 동지마트에 접목하자는 주장이었다.

할인 마트에 문화 센터라니,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학원 사업처럼 직접적인 교육이 아니라 여러 가지 특별활동을 제공할 수 있고, 그 대상을 학생뿐만 아니라 주부에게까지 확장시켰다.

유료로 운영하지만 가격은 저렴하게, 대신 동지마트를 많이 이용하는 VIP 고객에게만 자격을 제공한다면 생각보다 큰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이 개선안을 제안한 서라씨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와 비슷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경험까지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녀의 개선안을 가장 궁극적인 형태로 발전시킬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D&Y피트니스 센터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문화센터가 별건가? 스포츠 센터 또한 좀 더 전문적이다뿐이지 문화센터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그녀의 개선안을 보는 순간 D&Y피트니스 센터와 아이두(I DO)라는 이름의 탁아소를 떠올렸다.

특히 아이두는 1년에 2,800만 원이라는 비싼 연회비에도 불구하고 강남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부자동네를 중심으로, 스포츠센터가 힘들다면 아이두만이라도 유치해달라는 요청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처럼 아이두는 이미 고급 유아교육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동지마트에 아이두 교육 프로그램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동지 푸드쿡이 동지호텔의 요리를 캐주얼하게 변형해서 인기를 끌었듯 아이두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이름의 탁아소를 만들면 된다.

스포츠 센터도 마찬가지다. D&Y피트니스 클럽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캐주얼한 느낌의 중급 스포츠 센터를 만든다면 경쟁력은 충분하다. 물론 각 지점마다 사정이 다르니 모든 매장에 도입할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지점별로 어느 정도 차별화를 할 생각이었다.

서라씨의 개선안 덕분인지 한동안 막혔던 아이디어들이 봇물 쏟아지듯 쏟아져 내렸다. 아무 것도 확정된 게 없지만, 머릿속의 나는 이미 윤 스포츠센터로 찾아가 윤 사장님과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동지그룹은 동지마트를 살려보려고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하지만 그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동지마트로 발령이 나면서 그동안 있었던 실패 사례들을 살펴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점은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대부분의 시도는 전부 3-마트나 엘마트를 따라 하기에 급급했다. 아무리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붙는다고 해도 제대로 된 차별성도 없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업체를 앞지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학에서 마케팅 수업을 들으면 가장 먼저 나오는 원칙이 바로 리더십의 법칙이다. 어느 시장에서든 최초가 주는 의미를 능가하는 것은 어렵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그건 대부분 사람이 안다. 그러나 우리나라 두 번째(2대, 3대 대통령도 역시 이승만이다.) 대통령이 누구인지 물어본다면 상당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정답이 윤보선이라고 하면 그제야 ‘아! 맞다.’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게 바로 최초가 가지는 상징성이다.

이런 원칙은 경제활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섬유유연제 시장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섬유유연제라고 할 수 있는 피죤. 덕분에 사람들은 아직도 섬유유연제라는 말 대신 피죤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10년 동안 자취를 하면서 여러 종류의 섬유유연제를 사용해봤지만, 솔직히 피죤이 다른 제품에 비해 품질이 우수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여전히 시장 점유율에서는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리더십의 법칙은 중요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예의는 있는 법. 리더십의 법칙이 절대적이진 않다. 최초의 휴대폰은 모토로라에서 개발했지만, 2010년 현재 모토로라는 엄청난 고전을 하고 있다. 최초의 스마트폰은 IBM에서 만들었지만,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애플의 아이폰이다.

만약 애플사(社)가 모토로라나 IBM을 따라 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두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걸 마케팅에서는 인식의 법칙과 카테고리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동지그룹은 이러한 기본적인 마케팅의 원칙을 무시했고, 그 결과는 처참할 정도의 실패였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어도 어쨌든 나는 동지마트를 다른 대형 할인 마트와 확실하게 차별화를 할 생각이었다. 미래씨 눈에는 주차장 관리 개선안이 좀 더 현실적이라서 눈에 들어왔겠지만 그래서 내게는 두 번째 개선안이 훨씬 더 중요했다. 서라씨야 거기까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녀의 개선안은 어쩌면 쓰러져가는 동지마트를 회생시킬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했다.

과하게 자신만만한 성격이 거슬리긴 했어도 서라씨의 명석함은 진짜였다. 게다가 개선안에 적힌 문체는 정말 그녀가 작성했을지 의심이 들 정도로 겸손함이 느껴졌다. 짧은 시간에 사람이 얼마나 변했겠느냐마는, 서라씨는 지원서를 통해 변화하겠다는 의지는 보여줬다. 나는 그 점을 높이 사고 싶었다.

Rrrr

곧장 서라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 안 듣는 야생마를 버릴지 아니면 조련을 통해 길들일지는 어디까지나 조련사의 선택이다. 기대 이상의 능력을 봤는데 무섭다며 피하는 것은 내 성격이 아니다. 게다가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모양새다. 이 정도 상황도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나는 리더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박서라씨. 동지마트의 마동수 팀장입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내가 누군지 밝히자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방금 서라씨가 제출한 지원서와 개선안을 읽었습니다.”

“벌써요? 생각보다 빨리 읽으셨네요. 저는 일주일 정도는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성격이 뭉그적거리는 걸 싫어합니다.”

“그런 것 같긴 했어요. 동지마트에 보여주신 행적을 보면서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는 분이라고는 생각했었거든요. 혹시 제가 쓴 개선안이 마음에 들어서 전화를 주신 건가요?”

전화 통화에서도 겸손하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의지가 느껴졌다. 얼마 전의 서라씨라면 ‘그럴 줄 알았어요.’, ‘제 개선안은 당연히 마음에 드셨겠죠?.’라는 식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변했다. 나의 반응이 궁금할 텐데도 성격을 누르고 조용히 응대하는 서라씨의 반응이 한편으로는 귀엽기까지 했다.

“어땠을 것 같아요?”

“제가 정말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내용이에요. 그러니 개선안이 아주 허무맹랑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당연히 허무맹랑하지 않았죠. 괜찮았습니다. 그냥 괜찮은 것도 아니고 아주 좋았습니다. 서라씨의 개선안을 토대로 꽤 괜찮은 회생방안까지 만들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다른 개선안도 검토해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아마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좋을겁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저... 그런데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 아이디어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의미죠?”

“네. 맞습니다.”

“모집공고를 보면 상위입상자의 경우 본인이 원한다면 TF팀에 우선 채용한다고 나와 있던데 그 내용은 아직도 유효한 건가요?”

“물론입니다.”

“어머! 저, 정말인가요? 그럼 이제 전 TF팀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건가요?”

기쁨에 들뜬 목소리였다. 전혀 가식적이지 않고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서라씨가 원한다면요.”

“원해요! 정말 진심으로 기다렸던 소식이에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제가 다시 말씀드리죠. 동지마트가 동지그룹의 계열사이긴 해도 전망이 밝은 곳은 아닙니다. 솔직히 망해가는 곳이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저는 서라씨를 정직원이 아니라 계약직으로밖에 고용할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정직원은 공식적인 채용공고를 통하거나 아니면 일정 근무기간이 지난 비정규직 직원이 그 대상입니다. 물론 나중에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훨씬 큰 반대급부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건 아직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지금 제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동안 동지그룹에서 동지마트를 살려보려고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시도들은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로 끝났죠. 그런데 왠지 팀장님이라면 다를 것 같아요. 항상 합리적이라고 자부했던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막연히 그런 느낌이 들어요. 이름도 없던 동지그룹을 재계 서열 5위로 만든 지금의 회장님조차 실패한 일을 성공으로 만들 수 있는 팀. 제게 중요한 건 그것 하나예요.”

============================ 작품 후기 ============================

2010년까지 피죤의 시장 점유율은 40%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2012년 폭행사건 이후 점유율이 20% 중반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위에서 언급한 리더십의 원칙이 무조건 맞아 떨어진다고 하긴 어렵죠.

마케팅에서 최초라는 이미지는 아주 중요하지만 예외는 항상 존재하는 법입니다. 아마 얼마 전 있었던 땅콩회항사건을 계기로 대한항공의 점유율도 많이 떨어지게 될 겁니다. 아무리 잘나가더라도 도덕적 흠결이 생기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금방입니다.

연참해달라고 쿠폰까지 선물해주셨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당하지 않게 개연성을 찾아보려니 연재속도가 느려지고 있습니다. ㅠㅜ 연참은 노력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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