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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209화 (209/424)

00209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왠지 저라면 다를 것 같다고요? 하하하. 합리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몽상가였군요. 좋습니다. 어차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하는데 정상적인 사람들이 지원할 리는 없겠죠. 이상한 사람들끼리 잘 한번 해봅시다.”

“네. 열심히 할게요.”

“그런데 지금은 어디십니까?”

“오늘은 오전 근무만 있어서 퇴근하는 중이에요.”

“급한 일 없으면 바로 출근하시죠. 숙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네? 지금이요?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서라씨 채용에 관해서는 관리팀에 제가 말해두겠습니다. 앞으로는 계속 우리 팀으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아! 그 말씀을 들으니 제가 정말 팀장님의 팀원이 된 것 같아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지난번 주차장에서 서라씨와 대화를 하면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추리 능력에 관심을 가졌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별것 아닌 몇 개의 정보로 사실과 가깝게 근접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을 뿐 그 능력을 필요로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동지마트를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한 범인이 오리무중이다. 형진이에게 물어봤지만, 자금흐름만으로 비자금의 주인공을 찾는 일은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서라씨였다.

그녀가 그 일을 해낼 거라고 장담할 순 없다. 그러나 회계감사를 통해 드러난 금액만 해도 300억 원이 넘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금액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앞으로 얼마나 늘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걸 찾아서 메꾸지 못하면 아무리 경영을 잘해서 돈을 벌어도 구멍 난 독에 물 붓는 꼴이 되고 만다. 지금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라씨에게 숙제를 내줘 볼 생각이다.

“어서 와요. 서라씨.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10분 정도 지나자 서라씨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때는 주차 도우미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어서 잘 느끼지 못했는데, 긴 머리를 흰 끈으로 질끈 동여맨 수수한 옷차림은 원래 나이인 20대 초반으로 보일 만큼 어려 보였다. 내게 보였던 치기 어린 행동이, 그 나잇대의 사람이라면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일말의 찜찜함도 완전히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저야 말로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가워요.”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 수도 있거든요. 혹시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가나요?”

“아니요. 전혀 모르겠어요.”

“지난번 주차장에서 보여준 추리 능력이면 예상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건 사전에 입수한 여러 가지 정보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에요.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팀장님의 생각을 예상하는 건 추리가 아니라 점이죠.”

“흠...”

“하지만 뭐가 필요해서 저를 부르셨는지는 알 것 같아요.”

“그래요?”

“제 추리 능력이 필요해서겠죠.”

“오! 맞아요. 방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추리하기 어렵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호호호. 그건 팀장님이 제게 알려주신 거나 마찬가지예요. 방금 주차장에서 보여준 추리 능력이면 예상할 수 있지 않으냐고 말씀하셨잖아요. 그 말씀을 듣고 알았어요.”

서라씨의 설명을 들으니 그제야 내가 초보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비자금의 행방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행동으로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이런. 그런 실수를 다 하고, 제가 조급했던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서라씨의 추리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일인데요?”

나의 솔직한 말에 그녀는 반색하며 물었다.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인데,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우리만 아는 일이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오늘 이야기를 전한다면 심각한 법적 책임을 질 수도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물론이에요.”

“좋습니다. 그럼 여기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을 해주세요. 서라씨를 못 믿는 게 아니라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다른 팀원은 이미 서명했고 앞으로 새롭게 들어올 팀원들도 또한 똑같은 서류에 서명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까도 까도 계속 비리가 나오자 우리 팀원이 공유하게 되는 정보들의 가치가 점점 커져 갔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내린 특단의 조치가 바로 비밀 유지 각서였다.

신뢰는 중요하지만 무조건 덮어놓고 사람을 믿는 것은 바보짓이다. 아무 대책도 없이 무턱대고 믿음을 보였다가 처참하게 배신당하는 모습을 본 게 지금까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는 것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는 데 더 나은 결정일 수도 있다.

“어머.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비밀 유지 각서인가요? 어디 보자.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하나. 본인은 동지마트(이하 “회사”라고 한다.)의 직원으로 취득하였거나 장래 취득하게 될 회사의 각종 회계 자료 및 정보(이하 “회사기밀”이라고 총칭함)를 회사가 명시적으로 승인한 이외의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여하한 방법으로든 회사의 사전 서면 승인 없이 제3자에게 공개하거나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본인은 회사를 퇴직한 이후에도 비밀 유지 각서를 엄수하겠습니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죠?”

혹시라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서라씨는 지금 이 상황이 신기한지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뒤에 내용이 계속되니 꼼꼼하게 읽어보시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둘. 만일 본인이 제1항의 의무를 위반하여 회사의 비밀을 제3자에게 누설하는 경우에는 이로  인한 모든 법적 책임을 감수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회사가 입게 될 손해를 배상할 것을 약정합니다. 만일, 본인이 회사의 영업비밀누설과 관련하여 제3자로부터 금전 기타의 이익을 수령한 경우에는 본인은 당해 금원 전부를 위의 손해배상금과는 별도로 갑에게 지급하겠습니다.”

“저기. 팀장님. 여기서 ‘당해 금원’이 무슨 말인가요?”

“해당하는 금액이라는 의미입니다. 용어를 쉽게 만들면 좋을 텐데, 가끔 보면 쓸데없이 법률용어를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있더군요.”

“그러게요. 삼. 본인은 회사 재직 중에 회사로부터 수령한 영업비밀에 대하여는 복사물, 필사본, 메모, 인쇄물 등 서면 혹은 유형화된 모든 서류와 자료, 샘플 등을 남기지 않도록 하며, 회사의 승인을 받아 이를 보관하는 경우에는 고도의 주의를 가지고 보관하며 퇴사 시나 업무변경 시에는 회사에 반환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서명할게요. 자! 이제 말씀해주시죠.”

비밀 유지 각서를 모두 읽은 그녀는 고민도 하지 않고 단숨에 서명을 완료했다.

“그동안 동지마트를 이용해 비자금을 마련하던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곳이 그동안 고전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죠.”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요. 아무리 다른 마트에 비해 네임벨류가 떨어진다고 해도 이렇게 좋은 지리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적자를 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그런 이유가 숨이 있었군요.”

“비자금뿐만이 아니죠. 이미 뉴스를 통해 보셨겠지만, 용역 비리에 납품 비리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흑자를 냈다면 그건 기적보다 더한 일이었을 겁니다.”

“휴우. 저도 기사로 봤어요. 관련자들 모두 구속됐다면서요? 자기 돈이 아니면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안타까웠어요.”

“돈의 무서운 점이죠. 멀쩡한 사람도 눈뜬장님으로 만들어 버리거든요.”

“그렇다면 비자금도 개인적인 욕심으로 착복된 건가요?”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개인적으로 돈이 필요해서 비자금을 조성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자금에 대해 깊이 있게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게 있습니다. 행당점 지점장 배후에는 고평호 상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서라씨의 말에 행당점 지점장 투신자살 사건의 뒷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놨다.

“그렇다면 비자금과 고평호 상무는 아무런 관련이 없겠군요. 비자금을 만드는 동지마트를 망하게 할 리는 없으니까요. 동지마트를 비자금 창구로 활용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제 두 명밖에 없겠네요.”

“네. 회장님의 동생인 고진성 부회장과...”

“회장님의 첫째 아들인 고정호 전무겠죠. 그럼 혹시 한상질 총무팀장이 비자금과도 관련되었나요?”

“그건 거의 확실합니다. 이번 용역 비리 사건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사람이 제 친구입니다. 그 친구를 통해 비자금 관련 질문을 몇 개 던졌는데, 상당히 겁을 먹은 모습이었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계속 그 말만 반복했다고 하더군요. 계속 닦달해봤는데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냥 소모품 정도로 이용당하고 버러진 것 같았습니다.”

서라씨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나는 그녀의 질문에 최대한 열심히 대답했다. 불과 오늘 오전까지 주차 도우미 아르바이트생이었던 그녀에게 동지마트의 사활이 걸린 일을 맡긴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일주일 아니 5일만 제게 시간을 주세요.”

“네? 그 정도면 됩니까?”

“5일 동안 찾아봤는데, 찾을 수 없다면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이라는 거예요. 지금은 그 정도 대답밖에 못 드리겠어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팀에 합류하자마자 밑도 끝도 없는 일을 맡겨서 제가 죄송합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

“혹시 어제 뉴스 봤어?”

동지마트 본사 휴게실. 지금 동지마트는 온통 신문을 통해 알려진 용역비리와 납품비리에 관심이 쏠려있었다.

“용역비리와 납품비리 사건? 그건 나도 봤지. 한상질 팀장이 목에 힘을 주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래도 좀 심했더라.”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그거 알아? 이번 사태의 배후에 마동수 팀장이 있다는 사실.”

“뭐? 마동수 팀장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행당점 지점장 투신자살도 그 사람 때문이라던데. 가는 곳마다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모양이네.”

“에이. 말은 정확하게 해야지. 그 사람 때문에 자살한 건 아니지. 마동수 팀장이 행당점 비리를 파헤치자 압박감을 느꼈던 지점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라더라.”

“엎어치나 메치나. 어쨌든 정말 무서운 사람인 건 확실하네. 행당점 지점장이 그런 끔찍한 선택을 했으면 위축될 만도 한데, 전혀 개의치 않고 동지마트 본사로 출근하자마자 총무팀, 인사팀, 물류팀까지 눈에 거슬리는 곳은 전부 날려버렸잖아. 게다가 그냥 사표 수리로 끝내는 게 아니라 관련자 전원 구속이야. 지금까지는 그룹 이미지를 생각해 비리가 터져도 쉬쉬하고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마음먹었나 봐.”

“그렇지 않아도 마동수 팀장이 나머지 팀장들을 불러놓고 한마디 했다더라. 만약 성실하게 일 안 하고 태업하다 걸리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헉! 진짜?”

“응. 진짜! 자신은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면서 궁금하면 태업해보라고.”

“으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말은 아닌데, 되게 소름 돋는다. 무서워.”

“그리고 동지마트를 다른 그룹에 넘기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면서, 쓸데없는 기대로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도 했다더라.”

“뭐? 아무리 그래도 망하면 팔아야 하는 거 아니야?”

“망하면 폐업하고 D&Y피트니스 클럽으로 활용할 수 있게 리모델링 한다더라. 절대 남 좋은 일 안 시킬 거래. 진짜 독하지 않아?”

“뭐야. 그럼. 백수가 안 되려면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거야?”

“그렇지. 이제 좋은 날은 모두 끝이야.”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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