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8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확실합니까?”
서라씨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이건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비자금의 배후가 누군지 잘못짚어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았다간 오히려 우리 약점만 노출하는 꼴이 된다.
“비자금 배후가 고진성 부회장님인지는 저도 100%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진 속 인물 중에 고진성 부회장님이 계신 건 확실해요. 그렇지 않아도 그 사진을 보여드리려고 일부러 고화질로 출력까지 해왔어요. 여기 보세요.”
그녀는 자신의 서류가방에서 사진을 꺼내 나에게 보여줬다.
사람들의 복장으로 봤을 때 지금보다 최소 10년은 더 지난 사진으로 보였다. 찬찬히 사진을 살피던 나는 대청봉 정상석 왼편에 서서 당당하게 웃고 있는 고진성 부회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누가 봐도 동일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웃음이 닮았다.
“부회장님 맞네요.”
“그렇죠? 그리고 부회장님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키 큰 남자가 바로 그 문제의 이태준이라는 사람이에요.”
“해병대 전우회 모임이군요.”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앞에 두 남자가 들고 있는 깃발에 박힌 그림이 해병대 수색대 마크거든요.”
상어 형상의 물고기가 한 손에는 창을 다른 한 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 그림은 내가 정말 지겹도록 많이 봤던 마크 중 하나였다.
“이상하네요. 저도 혹시나 해서 각 군부대 마크를 전부 검색해봤는데 안 나왔거든요.”
“하하하. 그럴 수밖에요. 엄밀히 말해 저건 비공식 마크거든요. 보통은 사단급, 그게 아니면 독립 여단 정도 되어야 부대 마크가 있어요. 예외로 해병대 수색대처럼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의 경우에는 특별히 별도의 마크가 부여되죠. 하지만 사진에서 나오는 그림은 1사단 수색대 X중대 마크예요.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거라서, 인터넷 검색으로는 알아내기 힘들어요.”
“어쩐지... 그런데 팀장님은 어떻게 아세요?”
“저도 해병대 수색대였거든요.”
“우와! 그럼 혹시 팀장님도 같은 X중대?”
“그건 아닙니다. 본부중대 소속 행정병이었습니다. 그래도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낙하산을 탈 때도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뛰어야 하거든요.”
“헉! 정말이세요?”
“그건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음... 고진성 부회장님이 해병대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저랑 같은 수색대 출신인 줄은 몰랐군요. 그럼 이태준이라는 사람도 같은 부대 출신이겠고.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의 연관성은 확실해지는군요. 그럼 이태준과 총무팀장이 만났다는 증거만 확보하면...”
“여기 있어요. CCTV 복사본이에요.”
서라씨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USB 메모리를 꺼냈다.
“어디 CCTV 복사본입니까?”
“삼도천요.”
“설마 두 사람이 만났다는 한정식 식당을 말하는 겁니까?”
“거기 맞아요.”
“아! 그럼 여기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찍힌 영상이 담겨있겠군요. 그런데 서라씨.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삼도천에서 CCTV 파일을 순순히 넘기던가요?”
“네. 제가 경찰이라고 했거든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이 순진한 아가씨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너무 겁도 없이 행동했다.
“서라씨!”
“네. 팀장님.”
“경찰 사칭은 범죄입니다. 미행에 잠복에 경찰 사칭까지. 이건 경찰 놀이가 아닙니다.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요.”
“그게 시간이 촉박해서...”
“시간이 촉박해도 위험한 일은 안됩니다. 난 우리 팀원이 내가 내린 지시 때문에 다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무조건 안전이 최고입니다. 앞으로는 절대 위험한 일을 하지 마세요. 우리 팀에는 제가 있고, 제가 안 되면 고현호 이사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하세요.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원래 소속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은 정말 고마웠다. 그러나 어린 나이다 보니 너무 의욕이 넘쳐 위험한 걸 위험하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 따끔하게 한마디 하지 않으면 나중에 진짜 큰 사고를 칠지도 모를 일이다.
“죄송해요. 도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그냥... 생각해보니 제 행동이 오히려 팀장님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겠어요.”
“제가 피해를 보는 건 괜찮습니다. 혹시나 서라씨가 다칠까 봐 그랬죠. 앞으로 안 그러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정말 수고했어요. 서라씨가 알려준 정보는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에요. 잠복에다 미행까지 했으면 정말 힘들었을 텐데 이틀 정도는 푹 쉬세요. 휴가입니다. 아! 그리고 이번 일에 결정적인 제보를 한 이수씨에게도 뭔가 보상을 해야 할 텐데. 뭐가 좋을까요?”
“아이스크림이면 돼요.”
“아이스크림이요?”
“네. 이수가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거든요. 그거 제일 큰 사이즈로 사주시면 좋아 죽으려고 할 걸요?”
큰 공을 세워 보상을 하겠다는데 고작 아이스크림이라니. 아직 사회물을 덜 먹어서 그런지 생각하는 게 어렸다. 이렇게 순수한 모습을 보니 왠지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런.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했는데요! 겨우 아이스크림으로 입을 닦을 순 없죠. 자! 받으세요.”
“갑자기 웬 카드예요?”
“그냥 카드가 아니라 법인 카드입니다. 이수씨랑 고기집 가서 특등급 한우 배불리 먹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도 드세요. 그리고 고기랑 아이스크림은 원하는 만큼 포장해서 집에 가져가셔도 됩니다.”
“네에? 정말요? 진짜 그래도 돼요?”
서라씨는 기대에 찬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물론입니다. 이건 그냥 맛보기고, 나중에 비자금 관련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면 그땐 이수씨에게 진짜 제대로 된 포상을 할게요.”
“아!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고기랑 아이스크림 먹으면 돈 엄청 많이 나올 텐데요. 괜찮을까요?”
한도액이 2,000만 원인 카드다. 서라씨와 이수씨의 가족이 총출동해서 배 터지도록 최고급 한우를 먹는다고 해도 한도액의 1/10도 쓰기 어렵다.
“괜찮습니다. 그냥 편하게 많이 먹으면 됩니다. 제 돈이 아니라 회사 돈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아, 그렇구나! 그럼 염치 불고하고 잘 쓸게요. 저랑 이수 되게 많이 먹거든요. 나중에 한도액이 초과 됐다고 나와도 책임 못 져요. 헤헤.”
큰 소리 빵빵치며 자신 있게 말하는 서라씨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한 달에 2,000만 원까지 쓸 수 있는 카드라는 걸 알아도 저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을까? 물론 그녀가 불편해할까 봐 한도액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
“서라야. 여기. 여기.”
“민이수 너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 역시 고기 먹는다고 하니 행동이 재빨라 지는구나.”
“호호호. 당연하지! 그런데 아까 전화로 한 이야기가 정말이야?”
“그럼. 팀장님이 이수 너 덕분에 큰 고비를 넘기게 됐다고 법인카드까지 주셨다니까. 짠!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그 법인카드다. 어때?”
서라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동수가 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오! 이것은! 이게 바로 드라마에서만 보던 법인카드란 말인가? 하악하악. 서라야 나 한 번만 만져봐도 될까?”
“음... 살짝 만져만 봐야 해.”
“호호호. 이게 뭐라고 왜 심장이 콩닥콩닥 뛰지.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카드 같은데 말이야.”
“공짜라서 그렇지 뭐. 공짜라면 돌멩이도 씹어 먹을 사람이 이수 너잖아.”
“뭐? 역시 서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그런데 우리 어디 가지? 진짜 한우 먹어도 되는 거야?”
“그럼. 팀장님이 그러셨어. ‘노파심에 하는 이야긴데 혹시라도 소고기 대신 돼지나 닭을 먹고 오면 시말서 쓰게 할 겁니다.’라고 말이야.”
“우와. 너희 팀장님 짱 멋있다. 꼭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같아.”
이수가 선망의 눈길로 서라를 바라보자, 서라는 기가 찬 듯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얼씨구. 언제는 무섭다더니?”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덕분에 고기를 먹게 됐잖아. 그것도 한우로. 호호호. 그런데 한우 어디서 먹지? 혹시 유명한 한우고기 전문점 알아?”
“아니. 한우를 식당에서 먹어볼 일이 어디 있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 버스 타는 정류장 뒤에 식육식당 있더라 거기 갈까?”
“식육식당? 거긴 뭐하는 덴데?”
“와! 내가 서라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는 날이 올 줄이야. 에헴. 식육식당이란 말이야. 식육점처럼 따로 고기를 산 다음, 같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사용료를 내고 고기를 구워 먹는 곳이야. 식육점과 식당을 합쳤다고 해야 할까?”
“일반 고깃집과 뭐가 다른데?”
서라는 이수의 설명에도 이해가 잘 안 가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비자가 자기가 원하는 고기를 눈으로 직접보고 살 수 있어. 그래서 고기 질도 괜찮은 편이야. 아마 가격도 저렴할걸?”
“그럼 거기 가자, 얘. 안 그래도 돈 많이 나올까 봐 걱정했는데 싸다고 하니 마음이 놓인다. 솔직히 우리가 고기라면 환장을 하잖아.”
“콜! 그럼 우리 오늘 허리띠 풀고 제대로 먹어 볼까? 호호호.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는 진리야. 세상에. 고작 자동차 번호판 하나 외웠다고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동수는 고급 한우 전문점에 가라고 법인 카드를 줬지만, 두 사람은 평범한 식육식당으로 향했다.
***
띠링.
[ㅇㅇ카드 사용 승인. 황소고집 식육식당 105,000원 결제.]
“응? 이게 뭐야? 65,000원? 뭐 했길래 둘이서 겨우 저걸 먹어. 1인분에 65,000원이 넘는 식당도 많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식당을 예약해 줄걸.”
동수는 카드 승인 문자를 확인하고 그제야 생각 없이 카드만 건네준 걸 후회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자 또 다시 카드 사용 문자가 도착했다.
띠링
[ㅇㅇ카드 사용 승인. 하겐다즈 도곡 타워팰리스 점 16,500원 결제.]
“아이고. 배터지게 먹겠다면서 둘이서 고작 15만 원도 못써? 쯧쯧. 차라리 돈으로 줄걸. 괜히 호기부린다고 카드를 줘서는... 안 되겠다. 조만간 이수씨까지 껴서 팀 회식 한 번 해야겠군. 진짜 제대로 된 고깃집이 어떤 곳인지 보여줘야지. 넌 왜 웃어. 이놈아.”
동수가 혼자 중얼거리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권이의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
============================ 작품 후기 ============================
매일 연재를 목표로 하다보니 뭔가 시간에 쫓기는 느낌입니다. 지난편을 읽어보니 시간이 촉박하면 마무리가 엉성해지네요.
마음 같아서는 하루에 두세 편씩 쓰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줍니다. ㅠㅜ 계속 열심히 쓰다보면 언젠가 늘겠죠?
요즘 좀 경황이 없어서 댓글을 읽고도 후기에 코멘트를 못 남기네요. 죄송해요. 성실한 작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