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0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룹 본사에 도착한 고현호 이사는 곧바로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서 부회장실이 있는 23층 버튼을 눌렀다.
“우와. 이게 바로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군요. 제가 동지에 다니면서 이 엘리베이터를 탈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럼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는 소감이 어때?”
“평범하네요.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는 뭔가 특별할 줄 알았거든요.”
“어떤 식으로?”
“음…. 내부는 번쩍번쩍 금 도장으로 치장해두고, 엘리베이터걸이 항상 대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죠.”
신입 연수 때 교관이 해줬던 이야기다. 그는 한술 더 떠 맥주나 위스키도 준비되어있다고 했었는데, 순진했던 나는 그 말까지 곧이곧대로 믿었었다.
“뭐? 하하하. 이 친구 진짜 엉뚱하네. 그럴 일은 절대 없지. 특히 우리 아버지처럼 허례허식 싫어하는 양반이 회장으로 있는 한 더더욱. 그런데 전에 친구 회사에 갔더니 정말 엘리베이터걸이 있긴 하더라. 초미니스커트에 배꼽이 살짝 보이는 짧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더라.”
“에? 진짜요?”
“뻥이지. 시대가 어느 시댄데 그런 복장을 입혀서 일하게 하겠어? 마 팀장 의외로 순진하네. 아니면 엉큼한 건가?”
“헐! 농담이셨어요? 진짜인 줄 알고, 뭐 그런 회사가 다 있나 했는데.”
“긴장한 것 같아 농담 좀 했어. 뻔뻔한 게 마 팀장 매력인데 지금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어이없는 농담이었지만 그 덕분에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내게는 카리스마 넘치는 회장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고진성 부회장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부회장님을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되네요.”
“작은아버지가 왜? 마 팀장은 호랑이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았는데. 설마 자신이 없는 거야?”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음…. 부회장님이 까마득히 높은 해병대 선배님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전 세상에서 아버지가 제일 어렵고 그다음이 고등학교 선배랑 해병대 선배거든요.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그럴 수 있는데, 고등학교나 해병대 선배에게 그러는 건 저도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기수문화나 서열문화의 부작용 같기도 하고….”
“이거 의왼데. 지금부터 우리 동지에 마 팀장 고등학교 선배나 해병대 선배가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앞으로 마 팀장에게 푸쉬할 일 있으면 그 사람을 시키면 제대로 통할 것 아냐?”
“나 참. 지금도 충분히 푸쉬하고 계시거든요. 데이트할 시간도 별로 없구먼.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더 놀리고 싶지만 벌써 23층이네. 자! 내리자고. 긴장 풀어. 이제부터 진짜 호랑이를 잡아야 하니까.”
고현호 이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미리 연락받은 비서실 직원들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동기인 진희도 잔뜩 긴장한 채로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고진성 부회장을 방문한다고 짧게 연락을 남기긴 했지만, 도착시각을 알려준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비서실 직원들이 시간에 맞춰서 대기하고 있다는 건, 경비실 쪽에서 연락을 주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걸 의미했다.
항상 털털하게 사람 좋은 모습만 봐와서 회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느끼지 못했었는데, 부회장을 전담하고 있는 문형기 비서실 팀장마저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고현호 이사가 그룹에서 어떤 존재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사님.”
“문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뭘 이렇게 비서실 직원들이 총출동해서 저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안 그러셔도 되는데.”
“비서실 직원들의 당연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뒤에는….”
“몰라요? 마동수 팀장이라고 나랑 동지마트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 알 텐데?”
“안면은 있습니다. 예전에 부회장님과 단독접견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저는 마동수 팀장이 왜 이사님과 함께 여길 왔는지 그걸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에이. 이미 다 파악하고 있으면서 그런 질문을 해요. 저 친구가 내 라인은 건 비서실에서는 다 파악하고 있잖아요. 그냥 라인도 아니고, 내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 중 한 명이잖아요. 그러니 같이 왔죠.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문 팀장님은 너무 의뭉스럽다니까요. 하하하.”
이미 동지마트에서 내가 고현호 이사 라인은 건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황이다. 그러나 본사 비서실에서 그것도 비서실 직원들이 다 듣는 자리에서 나에 대해 그렇게 설명을 했다는 건, 이를테면 축구에서의 오피셜이라고 보면 된다.
소문으로 다 알려져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니 함부로 대하지 마라.’는 공식적인 선언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이제 그룹 어디에서든 고현호 이사를 팔 수 있게 됐으니, 확실히 내게 힘을 실어 준 셈이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소개할 줄 몰랐던 비서실 직원들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한 번 더 훑어 보았다.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 신기한 동물 바라보는듯한 시선이었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마동수 팀장. 우선 승진을 축하해야겠군요.”
“이사님 백으로 승진한 거라서 축하는 부끄럽습니다.”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 비서실에서도 알려진 사실이니 그렇게 겸손할 것 없습니다. 이사님.”
“말하세요. 문 팀장님.”
“부회장님께서 지금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어요. 가자. 마 팀장.”
“네. 이사님.”
나는 여러 가지 증거서류가 든 가방을 가슴에 품고 병아리가 어미 닭을 따라가는 것처럼, 졸졸거리며 고현호 이사의 뒤를 따랐다.
“부회장님. 고현호 이사와 마동수 팀장입니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연 문형기 팀장은, 짤막한 보고를 마치고 가벼운 묵례와 함께 물러났다.
“어서 와. 고 이사.”
“안녕하셨습니까. 작은아버지.”
“작은아버지? 사적인 대화를 하려고 온 거야?”
“작은아버지께서 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공식적인 대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제가 아니라 작은아버지께서 곤란해질 것 같아 일단은 사적인 이야기부터 먼저 나누었으면 합니다.”
“흠…. 뭔지 모르겠지만 현호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고. 그리고 자네. 이제 팀장이라고? 작년에 대리였는데 벌써 팀장을 달 수 있나?”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팀장은 아니고 팀장 대우입니다. 그리고 계열사인 동지마트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승진을 했습니다.”
“동지마트? 으흠. 그랬군. 오늘도 해병대 식 인사를 받고 싶지만, 현호가 있으니 생략하도록 하지.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 사적으로 나를 만나서 할 이야기가 뭐지? 사적으로 할 이야기를 비서실에 공식적인 통보를 해서 만남을 정한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말이야.”
고진성 부회장은 우리가 그를 왜 방문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작은아버지. 혹시 동지마트 하면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동지마트라? 회장님이 그토록 살리고 싶어했지만, 결국은 실패한 곳. 그래서 회장님이나 나나 동지마트는 곧 아픔이야. 그런 건 왜 물어?”
“굳이 돌려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죠. 이번에 제가 동지마트를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동지마트 총무팀에 대한 회계감사였습니다.”
“쯧쯧. 시작부터 분란을 일으켰군. 직원들의 첫인상이 안 좋았겠어.”
고현호 이사가 회계감사 이야기까지 꺼냈음에도 고진성 부회장의 얼굴은 평온했다. 순간 우리가 잘못짚었나 의심이 들 만큼 천연덕스러웠다.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겠죠. 그런데 회계감사에서 정말 안타까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누군가가 동지마트를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거든요.”
“뭐? 비자금? 망해가는 동지마트로 대체 누가 비자금을 조성해?”
“그걸 알아보려고 작은아버지를 뵙자고 한 겁니다. 제가 최근에 언론에 용역비리 사건을 터트린 건 아시죠?”
“그래. 비서실을 통해 이야기 들었어. 무모하다 싶었는데 잘 마무리 지었더구나. 그 때문인지 모처럼 동지마트 매출이 급상승했다면서? 고생했어. 녀석. 잘해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대견해.”
어쩜 저렇게 태연할까?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나는 고진성 부회장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들었던 느낌이었다.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정말 어떤 미세한 변화도 없이 한결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더 그가 배후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비자금 사건은 그룹 전체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태연하다? 그건 인위적으로 스스로의 표정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데 용역비리처럼 비자금 사건도 언론에 터트리면 안 되겠죠?”
“뭐? 그걸 말이라고 해? 다른 걸 떠나서 비자금은 고의적인 세금 탈루야. 언론이나 대중들이 우리 동지를 곱게 봐줄 것 같아?”
비자금의 조성방법은 주로 장부조작이 가장 많은데 납품가격 조작, 접대비·기밀비 조작, 가공(架空) 지출, 임금 및 비용의 과다계상, 해외에서의 비용 과다계상, 해외법인이나 지사에 대한 이전가격 조작, 가공부채 계상, 매출 누락, 순이익 조작 등이 있다.
사실 기업은 비자금을 공식장부인 A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따로 비밀장부인 B장부를 만들어 비공식적으로 기록하므로 재무제표 감사에서도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총무팀 직원들을 회유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비자금 유무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방법이든 비자금은 무조건 불법이다. 언론에 알려지면 절대 조용히 끝날 수 없는 일이다. 비자금 조성이 밝혀질 경우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심하면 재벌총수까지도 구속될 수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정부가 대기업을 압박하는 용도로도 많이 쓰였다.
“저도 압니다. 그만큼 심각성을 잘 알기에, 저도 조용히 작은아버지를 찾아왔지 않습니까?”
“흠…. 그랬군. 그래서 공식적이 아니라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 모양이구나. 잘 생각했다. 비자금은 보통 일이 아니니 그룹 최고위직이 아니면 모르게 하는 게 낫지. 그럼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 거냐?”
“어렵지 않습니다. 작은아버지가 동지마트를 이용해 조성한 비자금 전액을 돌려주시면 됩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 작품 후기 ============================
라이벌이라고 해봐야 큰 비중은 없었을 겁니다. 그냥 시연이가 혼자 약간 오해해서 귀엽게 질투하는 모습 정도로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서라의 등장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는 분들이 계셔서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어쨌든 제 마음 속에서도 캐릭터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 지난회에 잠깐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해둬야 나중에라도 제가 엉뚱한 생각을 안 할테니까요.
유명 한정식 집에 사람이 찾아가 경찰이라며 CCTV를 달라고한다고 덥썩 내줄 리가 없겠죠? 보통은 영장 가져와라. 그렇지 않으면 못 준다. 이렇게 나오죠? 그 부분 제가 생각해도 어색합니다. 조만간 수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주식 매입이 내부거래가 아니냐고 걱정하시는 분이 계신데, 단기적으로 치고빠지는 게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