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3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는 1위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열심히 고객님들을 섬기겠습니다.”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시연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차분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동지마트로 오세요.”
굉장히 단순한 광고였지만, 그래서 더더욱 시연이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카메라마사지인지 뭔지를 받은 덕분이라며 겸손하게 말했지만, 전문가들의 손길을 거친 그녀의 외모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TV 광고 촬영 내내 낯설 정도로 빛나는 시연이의 모습에 제멋대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광고촬영 팀이었고 그래서 최고의 톱 여자배우들과도 많은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광고작업에 참여한 스텝들은 촬영 내내 감탄사를 터트리기 바빴다.
“광고 어떻습니까?”
광고 촬영이 끝나고 콘티에 맞춰 간단한 편집을 한 영상을 보면서 김학수 부장이 내게 물었다.
“예쁩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예뻐도 너무 예쁜 시연이 모습에 입을 헤벌쭉 벌리고 구경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그냥 속에 있는 말을 해버렸다.
“하하하. 마 팀장 약혼녀가 아름다운 건 저도 잘 압니다. 거의 매일 얼굴을 보는 마 팀장이 그런 반응을 보일 정도니, TV를 통해 방송에 나가면 효과가 탁월하겠군요. 기대가 큽니다. 그런데 제가 물은 건 그게 아니라, 광고 내용이 어땠냐는 겁니다.”
“헉. 죄송합니다. 광고 내용도 괜찮았습니다. 심플하면서도 메시지 전달이 확실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1위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인상 깊었습니다. 1등은 아닌데, 마치 2등인 것처럼. 에이비스(AVIS)가 사용했던 이인자 전략을 우리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변형한 것 같습니다.”
1963년 초 미국. 렌터카 업체 에이비스(AVIS)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2~3%대에서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시장 점유율이 원인이었다. 전년도 적자는 무려 125만 달러. 1952년 창업 이래 누적 적자는 천문학적 액수에 달했다. 경쟁사 허르츠(Hertz)는 70%를 넘나드는 점유율 ‘철옹성’을 쌓고 있었다. 2위라는 개념을 무색하게 할만큼의 압도적 기세였다. 이기고 싶다는 열망은 에이비스 내에 가득했다. 하지만 전략은 텅 비어있었다.
‘지금 우리는 허르츠를 이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비스 파워 향상과 같은 1등을 따라 잡기 위한 대 소비자 정책들이 거기에 담겨 있잖아요. 그 숱한 땀방울들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주면 소비자들이 감동하지 않을까요. 진심은 항상 통하기 마련이니까요.’
에이비스의 고민을 경청하던 한 광고회사 관계자의 조언이었다. 그리고 그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글로벌 산업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2등 마케팅’의 시발점이었다.
‘AVIS is only No2. in rent a cars. So why go with us?’(에이비스는 2등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이 우리를 찾는 이유는?), ‘We are number two. Therefore, we work harder’ (우리는 2등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합니다.)
호소는 소비자들에게 그대로 먹혀들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허르츠의 시장 점유율은 1966년 45%대까지 급락했다. 당시 일부 허르츠 직원들 사이에서는 에이비스를 응원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동정론’에 가까웠을지 모르나 경쟁사에 대한 경계심을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후 에이비스는 2등이 아님에도 2등임을 내세웠고, 경쟁사 점유율을 상당 부분 흡수해 실제 2등을 거머쥐게 된다. 이렇다 할 부작용과 거부감 없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훔친 기업 전략의 대표적 성공담이다.
허르츠 고객이었던 소비자들이 순차적으로 에이비스로 돌아선 이유. 허르츠 직원들이 에이비스에 응원의 눈길을 보냈던 이유. 에이비스는 자신들이 영위하지 못했던 ‘2등’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만들어 ‘진심’을 덧씌움으로써 충성심 강한 고객들을 다수 확보할 수 있었다. 1등에 매몰돼 끊임없는 1등 마케팅에 매달려 있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영화(榮華)였다.
“역시 마 팀장은 알아볼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시연씨가 이번 광고의 핵심입니다. 세계적인 컨설턴트인 니콜라스 로벨은 그의 저서에서 ‘모두에게 주고 슈퍼팬에게 팔아라.’에서 일종의 ‘마니아층’ 즉 슈퍼팬을 잡을 수 있느냐 여부에 사업 성공이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시작점을 시연씨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시연이를 그렇게 열심히 설득한 것이었군요.”
원래 TV 광고까지는 계획에 없었다. 지면광고로만 활용할 생각이었다. 지면광고와 TV 광고는 비용부터가 다르다. 인지도가 없는 시연이를 TV 광고에 내보낸다는 건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동지마트의 개혁을 주도할 TF팀 팀장이 자신의 약혼녀를 광고 모델로 내세웠다가 실패한다면 그건 나뿐만 아니라 시연이에게도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지면 광고가 기대 이상으로 대박을 쳤다. 그녀가 여행 에세이인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의 저자임이 알려지면서 거의 준연예인급으로 인지도가 올랐다. 시연이의 사진이 담긴 쿠폰북을 사용하지 않고 수집하는 사람들조차 생겨났고, 동지랜드에서 제작한 작년도 가을 안내책자는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예전에 활용하다 남았는지 안내책자가 담긴 박스를 발견하고 한번 팔아볼까 고민했지만, 시연이에게 걸려 꾸중(?)을 듣고 압수당했다. 그 책이 팬클럽 이벤트로 활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움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내가 볼 땐 좀 어이없는 이야기였지만, 김학수 부장은 신드롬에 가까운 지금의 현상을 이용해 일명 슈퍼팬으로 불리는 충성고객들을 확보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반대를 했다. 그러나 미디어쪽에서는 나보다 훨씬 전문가인 그가 간곡하게 설득하는 데 덮어놓고 무조건 반대하기도 어려웠다.
“성공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경력이 시연씨에게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요즘 아나운서는 순수하게 아나운서의 역할을 하기보다 엔터테이너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아나테이너라는 신조어가 괜히 생긴 게 아니죠. 방송국에서는 아나운서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인지도가 높아야 시청률이 나오니까요. 그런데 시연씨처럼 이미 시작 전부터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인지도도 인지도 나름이겠지만, 다행히 시연씨의 인지도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호의적이죠.”
“솔직히 인지도가 높아지면 분명 무조건 비난하는 사람이 생길 텐데, 저는 그게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연이가 그러더군요. 언젠가 겪어야 할 일이고, 그래서 자기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요. 그 말을 듣고 그냥 믿고 맡기기로 했습니다.”
“역시 씩씩하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연씨가 나중에 아나운서가 되더라도 언론을 통한 이미지 관리는 제가 확실히 해드리겠습니다. 일종의 애프터 서비스라고나 할까요?”
“정말이십니까?”
나는 생각지도 못한 김학수 부장의 약속에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네. 약속드립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있을 악플러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부장님.”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꼽히는 미디어 마케팅의 일인자가 이미지를 관리해준다면 시연이의 미래는 탄탄대로나 다름없다. 그런 기회를 거절하면 바보라는 생각에 사양하지 않고 넉살 좋게 넙죽 인사를 하며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
내 이름은 정영목이다. 동지마트 송파점 신선담당 MD이며 직급은 대리다. MD는 Merchandiser의 약자로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에 대한 구매계획, 판매계획, 상품구매, 판매관리, 재고관리 등을 총괄하는 전문가를 뜻한다.
처음 동지마트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대기업인 동지그룹의 일원이 된다는 사실이 굉장히 자랑스러웠다. 당연히 안 그렇겠어? 동지그룹은 우리나라 재계서열 5위에 드는 엄청나게 큰 대기업이라고.
내가 동지그룹에 입사했다는 소식에 부모님은 동네방네 자랑했고, 동네 이웃들과 친지들은 기꺼운 표정으로 나의 합격을 축하해줬다. 시골이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나 또한 그분들의 축하가 고마웠고, 자부심도 꽤 컸었다.
하지만 그런 자부심은 연수가 끝나고 지점으로 발령받으면서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월급을 적게 주냐고? 아니다.
일이 너무 힘드냐고? 그것도 아니다.
직장 상사가 괴롭히냐고? 음. 딱히 그렇지도 않다.
블랙컨슈머(일명 진상고객) 때문에 힘드냐고? 물론 그것도 아니다.
대체 그럼 뭐 때문에 징징거리냐고?
월급? 대기업 수준에 맞게 잘 나온다. 일? 너무 없어서 한가할 지경이다. 직장상사? 열심히 하려면 오히려 뭐라고 하는 조금 이상한 상황이지만 그것만 아니면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다. 진상고객? 상대를 안 하면 그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동지마트는 다른 마트에 비해 블랙컨슈머가 없기로 유명하다. 친절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진상을 부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내 생활이 부럽다고?
부럽긴 개뿔! 너희는 하는 일 없이 그냥 돈만 받아가면 행복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진 않다. 일이라는 게 꼭 돈을 버는 목적만 있는 게 아니다. 과거에는 단순히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한 노동이었다면, 현대에서 일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평생직장이 아니기에 경력에 필요한 자기 계발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동지마트에서의 경력은 대형 할인마트 업계에서는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일을 하면서 보람도 느낄 수 없다. 나는 영혼없는 로봇이 아니다. 아무 감정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매일 매일 회사를 출근한다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나 다름없다. 회사를 옮기고 싶어도 동지마트의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솔직히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 일이나 도울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요즘 들어 간간이 하는 편이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 암울하기만 하던 동지마트에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어. 선배들은 귀찮게 생겼다고 싫어하면서 얼마 못 가 끝난다고 장담하지만, 나 같이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꽤 반응이 좋아.
매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동지마트를 알아봐 주니까 짜릿한 기분까지 들었어. 며칠 전에는 소개팅을 나갔는데 동지마트에 다닌다고 하니까 ‘좋은 곳에서 일하시네요.’라고 해주더라.
우와! 너희들은 정말 모를 거야 그 말을 듣는 내 기분이 어땠는지.
예전이라면 분명 이랬을 거거든. ‘네? 동지마트요? 거긴 어딘가요? 혹시 슈퍼마켓을 운영하신다는 건가요?’라고 말이야. 그게 얼마나 쪽팔리고 가슴 아픈 일인지 알아? 동지마트 직원이라는 사실이 창피할 지경이야. 내가 구구절절 동지그룹이 운영하는 대형할인마트라고 설명해도 시큰둥한 표정. 그 순간 나 자신이 얼마나 구질구질해지는데.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알아줘! 남들이 알아봐 주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이번에 처음 알았어. 하하하.
============================ 작품 후기 ============================
일을 할때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면 월금이 줄어들어도 괜찮다.
물론 취직하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말입니다. ㅠㅜ
좀 뜬금없는 에피소드가 나왔나요? 직원들이 변하게 되는 계기는 다음편에 좀 더 자세히 설명될 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