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1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데이트를 빼먹을 순 없다.
띠링!
즐거운 마음으로 퇴근 준비를 하는데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문자의 주인은 시연이었다. 혹시라도 일이 생겼나 싶어 급하게 휴대전화를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동수씨. 미안해서 어쩌죠. 엄마가 갑자기 우리 데이트에 끼고 싶다고 하네요. 히잉 ㅠㅜ 안 된다고 했는데, 오늘따라 엄마가 너무 강경해요. 어떡해요?]
헉!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안 그래도 요즘 데이트마다 따라붙는 혹 같은 윤권이 때문에 불만이 많았는데 이젠 시연이 어머님까지 우리의 만남을 방해할 줄이야.
강하게 ‘안 돼! 오늘은 오붓하게 우리 둘 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라고 나가고 싶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윤권이가 약속이 있어 밤늦게 집에 들어올 예정이다. 녀석이 올 때까지 집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이대로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항상 나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시는 어머님이다.
[조금 아쉽긴 해도 나는 좋아. 요즘 바빠서 어머님하고도 자주 못 봤는데 오랜만에 같이 데이트하자. 내가 어머님 좋아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예약해둘 게. 괜찮지?]
아무리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냈어도, 여기서 내가 ‘너네 어머니는 왜 눈치도 없이 남의 데이트에 끼시는 거야.’라고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문자가 왔다는 건 시연이도 이미 같이 만날 마음을 먹었다는 의미다. 괜히 여기서 솔직한 마음을 말해봐야 나만 소심한 인간이 된다. 이럴 땐 그냥 쿨하게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최고다.
띠링!
[진짜요?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엄마도 좋데요. 고마워요. 헤헤. 저 학교 마치고 집에 왔거든요. 지금 동수씨 회사로 가요~~. 엄마는 따로 레스토랑으로 오라고 할게요.]
역시 두 사람이 같이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왠지 예감이 그랬다. 조금 전에 이상한 문자를 보냈다면 표정 관리 잘 못하는 시연이 때문에 어머님은 내가 싫어하는 내색을 했다는 걸 금방 눈치채셨을 거다.
친한 모녀 사이는 남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기 힘든 묘한 친밀감이 있다. 모정과는 조금 다른 어떻게 보면 우정과 비슷한, 마치 친구처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낸다. 시연이와 그녀의 어머님 사이가 꼭 그렇다.
[아니야. 그냥 집에 있어. 내가 집 앞으로 갈 게. 이때 아니면 내가 언제 두 미녀분과 동시에 데이트할 수 있겠어. 근처에 가면 전화할게. 이따 봐.]
띠링!
[네. 고마워요. ^^ 사랑해요. ~ ♡]
***
“내가 오늘 눈치 없이 두 사람이 데이트에 끼었는데 환대해줘서 고마워. 마 서방.”
내가 예약해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자 시연이 어머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나처럼 질보다 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늘 요리가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두 여성분께서 평소보다 더 맛있다고 하니 고현호 이사를 졸라 개인적으로 부탁을 넣은 게 큰 효과를 본 것 같다.
일개 팀장이 고현호 이사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면 개념 없다 욕먹을 일이지만 우리에게 그 정도 우정은 있다.
“별말씀을요. 어머님이 맛있게 드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주방장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거든요.”
“어머. 정말? 그런데 여긴 예약하기도 어렵고, 주방장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곳인데 원래 친분이 있었어, 마 서방?”
시연이와 약혼한 이후 시연이 어머님은 말끝마다 ‘마 서방’이라고 부르신다. 그냥 ‘동수’라고 아들처럼 편하게 부르셔라고 해도 희한하게 ‘마 서방’이라는 말이 입에 착 달라붙는다면서 계속해서 그 단어에 집착하셨다.
“아뇨. 저처럼 평범한 셀러리맨이 여기처럼 고급 레스토랑 주방장을 어떻게 알겠어요. 제가 모시고 있는 이사님에게 부탁했어요. 어머님.”
“혹시 그 동지그룹 셋째 아들이라는 고현호 이사? 신임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이 그런 개인적인 부탁까지 들어줘?”
“네. 좀 친하기도 해요. 사람이 담백해서 지위를 내세우지도 않고요. 사실 요즘 저를 좀 많이 부려 먹었거든요. 부탁도 안 들어주면 사표 쓴다고 협박을 했어요.”
“뭐? 호호호. 농담도. 그만큼 격의 없는 사이라는 거네. 그 정도 되는 사람이랑 친구처럼 친하게 지낸다니, 우리 마 서방 대견한걸?”
절대 농담 아니다. ‘내가 부하 직원 데이트까지 도와줘야 해?’라고 투덜거리는 고현호 이사 앞에 싫으면 연차 써서 휴가 다녀오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긴 했었다.
“엄마는 참. 당연한 걸 가지고 그래. 우리 동수씨가 회사에서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데. 전에 TV 광고 계약 건으로 동지마트 본사에 간 적이 있거든. 그때 거기서 일하는 직원분들이 동수씨를 보면 정말 깍듯하게 인사를 하더라고. 음. 꼭 윤 스포츠센터 직원들이 아빠를 대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헉! 시연아. 아무리 그래도 윤 사장님과 나를 비교하는 건 아니지.’
윤 사장님은 스포츠센터의 경영자이기도 하고 직원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니까 그렇게 대하는 거고, 나는 직원들을 자꾸 감방에 보내버리니까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무서워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다.
나와 윤 사장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나는 두 사람에게 그런 차이를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어머. 우리 마 서방이 그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어? 역시 우리 딸이 사람 보는 눈은 있구나. 그래서 중학생 때 마 서방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서 그렇게 과외를 해달라고 조른 거구나? 호호호.”
“엄마! 그건 비밀이잖아. 히잉.”
“이것아. 마 서방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비밀은 무슨. 네가 하도 달라붙으니까 마 서방이 불편해서 과외를 그만둔 거라니까. 안 그래. 마 서방?”
“크흠. 아, 아닙니다. 시연이가 워낙 똑똑해서 제가 가르칠 역량이 안 돼서 그만둔 거지 불편해서 그만둔 건 아닙니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 서방이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어. 그때 과외비가 꽤 큰돈이었고, 철부지 꼬맹이가 자기 좋다고 매달리면 실력이 있든 말든 그걸 이용해 계속 과외를 했을 수도 있는데. 마 서방은 안 그랬거든.”
아! 그건 나도 정말 몰랐던 일이었다. 시연이와 다시 만나 처음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을 때 내게 너무나도 큰 호감을 보여주셔서 몸 둘 바를 몰랐었다. 그런데 그런 숨은 이야기가 있는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꼭 그런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
“이제 밥도 다 먹었으니 내가 눈치 없이 두 사람 데이트에 끼어든 이유를 설명해야겠지?”
“응? 그냥 무작정 우리 데이트에 끼어든 게 아니었어?”
“이 맹추야. 엄마가 할 일 없이 무작정 데이트에 왜 끼겠어. 우리 딸은 평소에는 똑똑한 것 같은데, 이럴 때 보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마 서방 봐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표정에 여유가 흐르잖아.”
“정말이에요, 동수씨? 그럼 엄마가 무슨 일 때문에 우리 데이트에 끼어들었는지 알아요?”
“에이. 그냥 혹시라도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건가 생각만 했었지. 나도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
“출판사 일 때문에 그래.”
“출판사요? 요즘 길벗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길벗은 시연이 어머님이 운영하는 출판사의 새로운 이름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마 서방이 해준 충고들 덕분에 다행히 적자는 안 보고 잘 운영하고 있거든. 그리고 우리 딸이 유명해진 덕분에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도 다시 인기를 끌고 있고.”
“다행이네요. 채은성 사장이 말아먹기 전까지는 꽤 괜찮은 출판사였으니 큰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운영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큰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말이지. 그런데 일을 하다보니 이상하게 욕심이 생기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마 서방하고 우리 딸에게 부탁이 있어.”
“부탁? 뭔데 엄마?”
“뭔지 모르겠지만 편안하게 말씀하십시오. 어머님.”
“요즘 우리 딸이 동지마트 광고를 찍으면서 굉장히 유명해졌잖아. 덩달아 팬클럽 카페도 활성화되었고. 그런데 시연이가 거기에 두 사람 러브스토리를 연재 비슷하게 기고했다면서?”
“네. 우리 두 사람만의 사랑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읽는다는 게 쑥스럽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시연이 팬카페라서 그런지 대부분이 우리 두 사람을 응원하는 댓글들이라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즘 우리 출판사로 팬들이 두 사람 이야기를 담은 책을 로맨스 소설 형식으로 출간할 생각이 없는지 문의가 많이 들어와. 우리 길벗 직원들이 검토해본 결과 지금 정도의 인지도라면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보다 더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도 있다고 해. 운이 좋으면 드라마나 영화 같은 제2 창작물로까지 진출할 수 있다고 해. 제2 창작물은 작아지고 있는 출판업계의 새로운 돌파구라고 할 수 있어. 두 사람이 싫지 않다면 우리도 한번 도전하고 싶은 일이야. 마 서방은 어떻게 생각해?”
예전이라면 불편할 것 같아 무작정 반대를 했겠지만, 요즘은 거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게다가 나 또한 동지마트 홍보를 위해 시연이를 이용(?)하고 있는 입장이라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예전에 채은성 사장이 내 동의도 없이 여행 에세이를 낸 것 때문에 불같이 화를 낸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머님이 직접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우리 두 사람의 허락을 구하는 상황이다. 마땅히 반대할 이유가 없으면 흔쾌히 승낙하는 게 낫다.
“시연이만 괜찮다면 저는 좋습니다.”
“동수씨만 괜찮다면 나도 좋아.”
“고마워. 둘 다. 출판사를 운영하다보니 딸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쉬운 일이 아니네. 호호호.”
“제가 봤을 땐, 초보 경영자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잘하고 계십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어머님.”
“그래 우리 마 서방이 이렇게 응원해주는 데 힘을 내야지. 그리고 우리 직원 중 한 명이 아이디어를 하나 냈는데, 동지마트도 서점이 있다면서?”
“네. 크지는 않지만 서점 구색을 갖추고 있습니다.”
“요즘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가 다시 인기를 끌고 있잖아. 작가 사인회를 거기서 하는 거 어때? 이왕 하는 거 책에 담긴 사진들을 따로 출력해 전시회도 겸해서. 팬들이 많이 몰리면 동지마트 홍보도 될 것 같은데.”
“아! 어머님. 그거 좋은데요. 안 그래도 서점 등 몇몇 매장을 활성화하려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길벗에서 사인회를 진행해주면 정말 감사할 일이죠. 정말 생각이 있으면 제가 실무자와 협의해서 차질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왕 하는 거 우리 동지마트 서점에서만 독점 판매하는 스페셜 북 같은 걸 따로 제작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스페셜 북? 그건 뭔데?”
“형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이를테면 책에 들어가지 않은 사진 위주로 꾸민 사진집을 만들 수도 있겠죠. 외전이라고 할까요?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지만 형식은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장삿속이지만 시연이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분명 환영할 겁니다.”
“그거 괜찮네. 그래 그건 우리 사위한테 전적으로 맡길게. 아무래도 대학 동기인 진경이가 나으려나?”
“네. 시연이하고도 친하니까 일하긴 편하겠네요.”
“그런데 엄마!”
“응? 왜 그래 우리 딸?”
“사인회 하는데 내 의사는 안 물어봐? 나, 작가거든.”
“어머. 그래서 싫어? 마 서방이랑 하루종일 같이 붙어 있을 수 있는 기횐데?”
“아니. 좋아. 헤헤.”
============================ 작품 후기 ============================
시연이가 요즘 너무 뒷전이에요.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