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6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뭐야. 뭔데 매장 오픈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이렇게 몰렸어?”
출근길에 동지마트 송파점에 길게 늘어진 줄을 보며 체크무늬 바지를 입은 여직원이 의아한 듯 호기심을 드러냈다.
“몰랐어? 오늘 윤시연 작가 사진전 및 사인회를 개최하잖아.”
“윤시연 작가? 그게 누군데?”
“너 동지마트 직원 맞아? 어떻게 윤시연 작가를 모를 수 있어?”
“헐! 윤시연이 대체 누구길래?”
그녀의 질문에 옆에 있던 파란코트를 입은 여자는 말 대신 손가락으로 매장 입구에 있는 대형 광고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시연의 활짝 웃는 표정을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아! 맞다. 맞아. 저 모델 이름이 윤시연이라고 했지. 그런데 저 사람이 작가였어?”
“나야말로 ‘헐’이다. 넌 대체 지금까지 어디 살다 이제 온 거니? 그동안 얼마나 이슈였는데 그걸 몰라.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 이 책 이름 못 들어봤어?”
“으엑? 진짜? 진짜로? 나 분명 그 책 읽었는데. 정말 그 책을 저 사진 속 모델이 쓴 거야? 헐, 대박사건!”
체크바지 여자의 호들갑에 파란코트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래 사람 이름을 못 외우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읽은 책의 작가 이름까지 기억 못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진짜 대박사건이긴 하다. 동지마트에서 일하면서 윤시연 작가가 누군지 모르는 네가 진짜 대박사건이다. 이것아! 그럼 넌 윤시연 작가의 남자친구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남자친구? 하긴. 저렇게 예쁘니 남자친구가 있기도 하겠네. 그런데 내가 대체 왜 저 여자 남자친구까지 알아야 하는데? 나 원래 연예인들 연애사에 별로 관심 없거든. 넌 그런 말도 몰라? 이 세상에서 제일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는 말. 우리 이제 나이도 있는데 연예인들 연애 이야기는 관심 좀 끄고 살자.”
“어이구. 연예인이 누굴 사귀든 나도 이젠 그런 거에 별로 관심 없거든. 그런데 윤시연 작가 남자친구가, 아니지 약혼했으니 약혼자지. 윤시연 작가의 약혼자가 바로, 바로, 바로. 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뭐야? 누군데? 누군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설마 저기 오는 저 남자는 아니지?”
파란코트 여자가 말을 하다 멈추자 체크바지 여자가 의아한 듯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파란코트 여자의 시선 끝에서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한 남자를 발견하는 순간 고양이 앞에 쥐처럼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꼈다.
“왜 아니겠어. 윤시연 작가의 피앙세가 바로 멀리서만 봐도 무시무시한 기세를 느낄 수 있는 마동수 팀장이야. 어때 놀랍지?”
“대.박.사.건. 진짜 대박이다. 말도 안 돼. 나 분명히 ‘너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 그 책 읽었단 말이야. 그 책에서 나오는 남자는 절대 마동수 팀장님 같은 남자가 아니었어. 다정다감하고 로맨틱하고 귀엽기까지 한 멋진 남자였다고.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얼마나 부러워했었는데. 내 이상형도 그 책 속의 남자로 바뀌었을 정도였다고. 이건 사기야. 두 사람이 절대 동일 인물일 수 없어. 당장 따져야겠어.”
“어머, 어머.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가서 뭐라고 할 건데?”
“뭐라고 하긴? 책 속의 남자와 마동수 팀장님은 서로 다른 사람이니 이건 사기다. 고로 책값을 변상해라.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어휴···. 그 작가 남자친구가 누구였더라? 그 남자가 지나가면 저승사자 본 것처럼 몸이 굳는 녀석이 가서 따질 용기가 있어?”
“아니. 없지. 그렇구나. 저승사자 애인이었구나. 그럼 따질 수 없지. 억울해도 입 다물고 있어야지. 괜히 잘못 보였다가 감방에 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따질 것처럼 보였던 체크바지 여자는 시연의 남자친구가 동수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금세 풀이 죽었다. 동지마트 TF팀을 맡아서 과감한 개혁을 시행했던 동수. 효과는 탁월했지만 직원들 사이에서는 저승사자로 불릴 만큼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네가 감방 갈 일은 없을걸? 솔직히 잡혀간 사람들은 전부 동지마트에서 봤을 때 거물급들이잖아. 우리 같은 잔챙이를 왜 잡아가겠어. 우리가 저지른 죄라고 해봐야 유통기간 거의 다되어서 폐기처분해야 할 빵을 그냥 집에 가져온 거? 그건 솔직히 죄도 아니니까 염려하지 마.”
“그렇긴 하지? 진짜 별달리 지은 죄도 없는데 이상하게 마 팀장님만 보면 온몸이 얼어버린다니까.”
“그건 나도 그렇긴 해. 무뚝뚝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걷는 모습을 보면 다크포스가 마구마구 쏟아진다니까. 아우!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려.”
“나는 꼭 뭐라고 해야 하지? 공포영화를 보는 느낌? ‘엑소시스트’, ‘할로윈 시리즈’, ‘오맨 시리즈’, ‘나이트메어’ 이런 공포영화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 ‘고스트 앤 다크니스’라고 혹시 식인사자 나오는 스릴러 영화 알아? 마 팀장님을 보면 꼭 거기서 나오는 식인사자를 보는 듯 착각이 들어.”
“맙소사. 얘! 그건 가도 너무 갔다. 그런데 잠깐! 이거 뭐지?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냄새? 갑자기 무슨 냄새? 난 아니야. 오늘 샤워도 하고 왔는데.”
“그런 냄새 말고. 방금 말한 공포영화들 전부 네가 좋아하는 영화들이잖아. 특히나 ‘고스트 앤 다크니스’에 나오는 식인사자. 네가 항상 그랬거든. 식인사자라서 무서운데 왠지 섹시하다고. 너 설마···. 아니지?”
“내, 내가 무슨! 아, 아니야. 그릴 리가 없어.”
파란코트 여자의 추궁에 체크바지 여자가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부정했다.
“아니면 아니지 왜 그렇게 말은 더듬고 그래? 그러니까 더 수상하잖아. 너 혹시 마 팀장님만 보면 아래가 젖고 그러는 건 아니지?”
“어머, 어머. 얘가 점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전에 네가 그랬잖아. 공포영화를 보면 이상하게 흥분이 된다고. 가끔 속옷까지 젖어서 깜짝 놀란다고 그랬어!”
“쉿! 좀 조용히 이야기해! 그런데 내가 네게 그런 소리까지 했어?”
“그럼. 전에 술 마시고 내게 이야기했는데. 기억 안 나? 좀 취했다 싶었는데 필름까지 끊겼구나. 솔직히 이야기해봐. 맞지? 그렇지? 응?”
“아, 아니. 그, 그게. 사실은 아주 약간 그럴 때가 있긴 해.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공포영화 즐기듯 감상하는 게 전부야.”
“솔직히 나도 마 팀장님이 좀 멋져 보이긴 해. 무섭게 생겼어도, 뭐랄까···. 짐승남처럼 온몸에서 페르몬을 마구 뿜어내는 느낌을 받거든. 그런 남자가 나만 바라보면 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 현실은 저런 미인과 사귄다는 거지.”
“그러게. 얼굴도 예뻐, 나이도 어려. 글도 잘 쓰는데 남자도 멋지네. 우리한텐 그렇게 무섭게 하면서 윤시연 작가에게는 책에서처럼 다정다감하다는 이야기 아냐? 대체 전생에 무슨 착한 일을 많이 했길래 저런 복을 받았을까?”
***
사인회가 있는 당일.
사실 좀 걱정을 많이 했다. 요즘 우리 동지마트가 시행하고 있는 마케팅의 상당 부분에 시연이가 연계되어 있다. 효과가 좋다면야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기대보다 호응을 얻지 못한다면 내게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 안 그래도 TV 광고까지 출연해서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사인회까지 열게 되었다. 조금만 삐끗해도 공사 구분도 못 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긴장해서 그런지 밤에는 악몽까지 꿨다. 아무리 아닌척해도 요즘 업무가 꽤 스트레스였던 모양이었다. 건넛방에 있는 윤권이를 불러 스포츠마사지를 받으며 뭉친 어깨를 풀었지만 긴장된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조용히 차를 몰아 동지마트 본사에 도착하자, 매장 입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저건 갑자기 무슨 줄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희한한 일이네요.”
“지금 우리 동지마트에 내가 모르는 바겐세일을 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팀장님 모르게 그런 행사를 진행할 간 큰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렇지? 그럼 대체 저 줄은 뭐지?”
“제가 가서 한 번 알아볼까요?”
“아니야. 같이 가. 어차피 매장도 점검해봐야 하니까.”
꾸준하게 매장을 점검하는 것 또한 내가 하는 일 중 하나다. 종업원은 종업원일 뿐이다. 아무리 주인의식을 강조해도 정말 내 일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주인이 열심히 관리하는 가게와 종업원에게 맡겨두는 가게. 같은 조건이라면 두 가게의 매출은 꽤 큰 차이를 보이는 것처럼 꾸준하게 관심을 가지고 관리해야 회사도 원활하게 돌아간다.
그렇게 송파점 주변을 살피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매장 앞에 늘어선 줄은 점점 길어졌다. 더 이상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매장 점검은 뒤로하고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팀장님. 줄을 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대부분 손에 책을 들고 있는데요?”
“책? 무슨 책? 아! 그러네. 너 눈 좋다며? 책에 뭐라고 쓰여있어?”
“잠시만요? 좀 멀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음···.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보낸다?”
“응? 뭐라고?”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 제목이 그런 것 같은데요?”
윤권이는 아직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큰 눈을 껌벅거렸지만, 나는 제목을 듣는 순간 동지마트 송파점에 늘어선 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진짜? 세상에! 그럼 저 사람들이 전부 시연이 사인회 때문에 온 거야?”
“아! 그렇죠? 형수님이 쓰신 책 이름이 ‘너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였죠? 와! 사람들이 저렇게 몰린 걸 보면 이번 사인회와 사진전은 성공적으로 끝나겠는데요? 걱정 엄청나게 하시더니 감축드립니다. 팀장님.”
“걱정은 무슨. 너 인마. 내가 그런 고루한 말 쓰지 말라고 했지? 감축이 뭐야 감축이. 크흠.”
아침부터 늘어선 줄의 정체를 파악하자 어깨를 짓눌렀던 걱정거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아침부터 스포츠마사지니 뭐니 하며 부산을 떨었던 나 자신이 조금씩 부끄러워졌다.
“어라. 지금 팀장님 부끄러워하시는 겁니까?”
“부끄러움은 무슨. 아침엔 살짝 몸살기가 있었을 뿐이야.”
“에이. 몸살기가 분명 아니었는데요. 제가 유도만 20년을 했습니다. 사람 근육은 딱 만져만 봐도 그 사람 몸 상태를 알 수 있거든요. 아까 팀장님 어깨에 뭉친 근육은 분명 걱정으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어허. 이 녀석이. 하늘 같은 팀장님이 몸살기가 있었다면 그런 거야. 알았어?”
“넵! 걱정은 했지만 몸살기로 있었던 걸로 생각하겠습니다. 하하하.”
“짜식. 하여간 많이 컸단 말이야. 오늘 사람이 많이 몰려서 봐준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시연이 기다리고 있겠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