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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237화 (237/424)

00237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시연이를 동지마트를 위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게 맞는 일일까 아닐까. 요즘 내 머릿속을 괴롭히는 딜레마 중 하나다. 내가 단순히 마케팅 담당 직원이었으면 그녀는 동지마트를 위한 완벽한 상품이다. 아름다운 외모,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글솜씨. 이 두 가지만으로도 시연이는 대중들에게 꽤 큰 호감을 받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껏 이미지 소모가 전혀 없었던 새로운 얼굴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가치를 더더욱 높여준다.

하지만 시연이와 나는 단순히 일적으로 만나는 사이가 아니다. 미래를 약속한 서로 깊이 사랑하는 연인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연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나의 편의를 위해 그녀를 이용하는 건 아닐까 하는 자격지심 아닌 자격지심이 들기도 한다.

며칠 전 그룹 본사에 일이 있어 잠깐 들렀다.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하필이면 재수 없게 이기적 대리를 만났다. 여전히 밉상스러운 얼굴이었고, 여전히 느물거렸다.

“어! 마 대리. 아차! 아니지. 이젠 마 팀장인가? 소식은 들었어. 계열사로 쫓겨나더니 거기서는 좀 잘 나간다면서? 역시 너는 본사보다 계열사가 어울리나 봐. 하하하.”

본사 로비에서 만난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를 나를 반겼(?)다.

본사에서 계열사로 밀려나는 건 본사 직원들에게는 상당히 치욕스러운 일이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 대리는 계열사에서 잘나가느니 계열사가 어울리느니 하며 나를 조롱한 것이다.

“아! 이 대리님. 이 대리님은 여전히 대리시네요. 분발하셔야죠. 아무리 넉넉잡아도 내년까지 승진하지 못하면 계열사에서 과장으로 시작하셔야 하는데 그럼 ‘대우’ 꼬리표가 있어도 팀장인 제가 미안하지 않습니까?”

이제 잘 보일 일도 잘 보일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굳이 기분 나쁜 악담에 참고 들어줄 인내력을 발휘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이 대리 못지않게 느물거리며 그의 아픈 곳을 제대로 찔렀다.

그런데 표정이 별 변화가 없다. 예전의 그였다면 욱하는 모습으로 흥분해서 침을 튀겨가며 욕을 하느라 바빴을 텐데 이상하게 얼굴에 여유가 넘쳤다.

“운이 안 따라서 계열사로 가면 그것도 내 팔자지 뭐. 그래도 누구처럼 애인 팔아가면서 승진에 목메진 않아. 신문에 TV 광고에. 아주 가관이더군. 기둥서방도 아니고 말이야. 흐흐흐. 설마 나중엔 고현호 이사 침대 속으로 애인 밀어 넣을 생각인 건 아니지?”

빌어먹을!

진짜 아픈 말인데, 정말이지 자존심 상하는 말인데 여기서 욱해봐야 나만 손해라 치밀어 오르는 화를 힘겹게 참아냈다. 화낼 타이밍도, 화낼 장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말 치사한 방법이지만 그의 역린인 양지선 팀장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리의 말이 너무 아팠다. 맹렬히 끌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최대한 평온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쯧쯧. 노총각 히스테리입니까? 부러우면 부럽다고 할 것이지 무슨 그런 추잡한 상상을 합니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더니. 왜요. 이 대리님이 좋아하는 양지선 팀장이 이 남자 저 남자 홀리고 다니니 세상 여자가 다 그런 것 같습니까? 그러니 지금까지 애인이 없는 겁니다.”

“뭐, 뭐라고 인마? 네가 봤어? 양 팀장님이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는 거?”

“모르셨습니까? 이런!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 아직도 애인이 없는 겁니다. 이 대리님 깜냥으로는 양 팀장님 절대 감당 못 하니 그만 불쌍한 짝사랑은 내려놓으시죠.”

“내, 내가 언제 양 팀장님을 짝사랑했다고 그래? 이 자식이 진짜 미쳤나? 너 자꾸 없는 말 만들어 낼래?”

내 말에 열이 받은 이 대리가 계속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못 들은 척 계속 내 갈 길만 갔다. 그리고 아무도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비상구 계단 앞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고개를 돌려 씩씩거리며 쫑알쫑알 따라오는 그를 바라봤다.

“이 자식아! 넌 선배 말이 말 같지 않아? 어디서 버릇없이 선배가 말을 하는데 지나가는 개 취급을 해!”

계속 무시하며 갈 길을 간 게 그의 화를 더욱 부채질했는지 이 대리는 내가 돌아서자마자 두 손을 뻗어 나의 멱살을 잡아챘다. 여기서 그가 한 실수는, 너무 화가 나서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곧바로 이 대리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려 벽으로 밀어붙였다. 몸무게가 60kg 정도밖에 나가지 않는 그는 나의 완력을 견디지 못하고 공중에 붕 뜬 채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아. 이 쥐새끼 같은 놈.”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이거 안 내려?”

“야, 이 새끼야.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돼?”

“뭐? 이 새끼? 너 정말 돌았···. 켁켁. 이거 안 놔?”

“진짜 돌대가리네. 이 대리야. 그따위로 명령하면 내가 들어줄 것 같아 안 들어줄 것 같아?”

조롱 섞인 나의 말에 이 대리는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불안한 눈동자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봐. 마 대리. 아니 마, 마 팀장.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다시 한 번 말해봐.”

“무, 뭐를?”

“내 여자친구를 누구 침실에 밀어 넣는다고? 이 미친 새끼야?”

“컥···. 마, 마 팀장. 나···· 좀. 숨을 모, 못 쉬겠어. 큭···.”

분노가 고스란히 손으로 전해졌는지 멱살을 잡힌 채 공중에 매달린 이 대리의 얼굴이 검붉게 변해갔다.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일단은 손에서 힘을 조금 뺐다.

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어이없는 사고를 치는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아니다. 그랬다면 처음 로비에서 이미 화를 터트렸을 것이다. 내겐 이미 엄청난 돈이 있고, 그 돈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사랑스러운 시연이가 있다. 고작 쓰레기 같은 이 대리 때문에 인생을 망칠 만큼 바보는 아니다.

“엄살 피우지 마. 이 개자식아.”

“어··· 엄살이 아니고.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랬어. 마 팀장. 내··· 내가 잘못했어. 그냥 요즘 그룹 내에서 고현호 이사와 관련해서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생각 없이 내뱉었어. 진짜 미안해.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데 내가 심했어. 용서해줘.”

이대로 가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포심이 들었는지 겁에 질린 이 대리는 그제야 주절주절 사과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몰아붙이고 싶지만 사과까지 받은 상황에서 더 해봐야 원한만 깊어질 것 같아 그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것 하나만 명심해. 나는 얼마든지 모욕해도 좋아. 어차피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니까 서로 잘 지내긴 어렵겠지. 네놈이 나를 존중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내 연인, 내 가족을 모욕하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밤에 찾아가 네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지도 몰라. 명심해.”

“아··· 알았어. 며··· 명심할 게. 앞으론 저···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야.”

눈물까지 글썽이는 이 대리를 뒤로하고 원래 가려고 했던 목적지로 향했지만, 그가 내게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특히 고현호 이사와 관련해서 나와 시연이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마음에 걸렸다.

***

사인회와 사진전은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TV 광고까지 찍은 아름다운 미모의 여대생이 작가로 큰 성공을 거둬 사인회를 한다는 소식은 기자들에게도 꽤 먹음직스러운 기삿거리였다. 그 덕분에 꽤 많은 연예담당 기자와 문화계 기자들이 시연이를 취재하기 위해 동지마트 송파점을 방문했다.

단지 동지마트 송파점에서 사인회를 했다는 소식이 기사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된다. 고현호 이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깜짝 스타나 마찬가지인 시연이의 TV 광고 약발이 슬슬 떨어질 무렵이라 더더욱 유용하다.

3층에 마련된 도서 코너에 몰린 사람들의 목적은 물론 사인회와 사진전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사인회와 사진 관람 후 우리 동지마트를 돌아보는 사람도 분명히 생긴다. 가까이 있는 책을 한 권 살 수도 있고, 마침 필요한 생활용품 등을 구매할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적극적인 고객서비스로 그들을 만족시킨다면 추후에 훌륭한 고객으로 변신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사인회를 앞두고 직원들을 독려해서 최대한 좋은 이미지를 남기려고 노력했다. 여전히 시연이에 대한 딜레마가 나를 괴롭혔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무슨 고민 있어요? 걱정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에요.”

무사히 사인회를 마치자 평소의 나와 다르다는 걸 느낀 시연이가 내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아! 아니.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회사 문제요?”

“아니. 그냥 뭐···.”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돼요?”

예전의 나였다면 시연의 이 말을 무시하고 그냥 넘겼을 거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에게 약속을 했었다. 무슨 일이든 서로 비밀을 만들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어차피 이미 고민이 있다는 걸 눈치챈 시연이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그녀에게 어설픈 거짓말로 둘러대 봐야 실망만 안겨줄 뿐이다.

“내가 며칠 전에 본사에 갔다가 이기적 대리를 만났거든.”

“아! 예전에 동수씨를 그렇게 괴롭혔다는 아저씨요? 그 아저씨가 또 동수씨에게 안 좋은 소리를 했어요? 흥! 생긴 것도 이상하더니 되게 이상한 아저씨네.”

이기적 대리의 이야기를 꺼내자 시연이는 혼내주겠다는 듯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도끼 눈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내게는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워 웃음이 났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두통마저 귀여운 그녀를 마주하자 모두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하하. 안 좋은 소리를 이기적 대리가 아니지. 그래도 내가 혼내줬으니 너무 열 받아 하지 마. 사실 요즘 동지마트에서 일하면서 네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 그것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기적 대리가 그 문제를 지적하더라고. 그런데 그 말이 내게 좀 많이 아팠어.”

“무슨 말을 했는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그때부터 나는 요즘 나를 괴롭히고 있는 그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시연이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여전히 다정하고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 줬다.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그녀에게 고민상담을 하는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지만, 나이 차가 있어도 미래를 함께하기로 한 나의 배우자라는 생각을 하자 든든해지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 작품 후기 ============================

이번 에피소드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시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그냥 뜬금없이 나오는 건 아니고 다음 회를 위한 떡밥 같은 겁니다. 시연이 문제가 살짝 불거질 예정이거든요.

혹시라도 이게 뭐야라고 생각하실 독자님들이 계실까봐 살짝 스포를 남겨봅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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