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1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아니에요. 동수씨가 이런 이야기까지 해줘서 오히려 제가 더 고마워요. 직장인들 사귀는 언니들 말을 들어보면 남자들은 자기 회사 이야기 절대 안 해준대요.”
“사람마다 다르겠지.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해도 이해를 못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걸? 시연이는 전공이 경영학이라서 그런가 내가 회사 이야기를 해도 금방금방 이해하잖아. 말하는 재미가 있어.”
“동수씨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어요. 뭐랄까? 학교에서 글로 배우는 경영학이 아니라 정말 살아 숨 쉬는 경영학을 동수씨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기분이거든요. 맞다! 혹시 미래가 동수씨에게 뭐라고 안 그랬어요?”
“미래씨가 내게? 아! 마케팅 관련 책을 내라고? 하하하. 미래씨 이야기 들어보니 네가 부추겼다며?”
미래씨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시연이에게 그 사실을 물어보지 못했다. 왠지 물어보기가 민망하다고 해야 하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나를 평가받는 기분이 들어 물어보기 조심스러웠었다.
“네.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이 항상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미래가 친구가 되면서 그런 호기심을 풀었어요. 동수씨가 미래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우리 둘이 만나면 동수씨 이야기만 해요.”
“잘해주긴. 그냥 가능성이 있어서 이것저것 가르쳤을 뿐인데.”
“동수씨에게는 그냥 사소한 일일지 몰라도 미래는 다른가 봐요. 동수씨에 대해 말하는 미래를 보면 꼭 존경하는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제자를 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시연아 질투는 안 나? 어떻게 보면 다른 여자에게 잘해주는 건데?”
“질투요? 동수씨가 미래에게 관심이 있어서 잘해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 하하하.”
살짝 당황이 될 정도로 시연이의 대답은 쿨했다.
예전에 정말 집착이 심한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알려고 했다. 바람피우는 남편 대하듯 항상 휴대폰을 검사하고, 여자 동기들과 조금만 문자를 주고받아도 불같이 화를 냈었다.
단순히 휴대폰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삶이 나에게 맞춰져 있었다. 이화여대 정문에서 서강대 후문은 택시로 기본요금이면 갈 만큼 가깝다. 그래서 공강이면 항상 우리학교로 넘어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본인의 과방보다는 우리 경영학과 과방을 더 편안해 했다. 동기 모임에는 어떻게든 끼었고 심지어 MT도 따라와서 상당수 후배들은 나와 그녀를 CC로 오해할 정도였다.
사랑하는 사이니 항상 같이 있고 싶어하는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집요함에 나는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집착이 심할 것 같은 여자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꺼려졌다. 그랬던 나인데 시연이의 쿨함은 이상하게 서운하게 느껴졌다. 집착하는 여자도 싫지만 집착하지 않는 건 또 서운하다. 이런 걸 보면 나라는 놈도 그리 좋은 놈은 아닌 것 같다.
“더군다나 미래를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장희 언니가 그랬어요. 남자는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빠져나가려고 하는 못된 청개구리 심보가 있다고요.”
“장희가 그런 말을 했어?”
“네. 언니가 이것저것 조언을 많이 해줘요.”
“걔가 나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안다고.”
“아뇨.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요. 제 친구들은 남자친구 대부분이 학생이거든요. 직장인 남자들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물어봤어요. 언니가 말하길 직장 동료는 스포츠로 이야기하면 하나의 팀이래요. 팀이 잘 돌아가려면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일에 있어서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어요.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사적으로 연락을 자주 한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쿨해질 필요가 있대요. 회사는 공적인 공간이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동수씨를 믿어요.”
“쳇!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녀석이 누구 앞에서 훈계야. 하여간 그 녀석은 이론만 빠삭해. 현실에선 형진이 바쁘다고 맨날 징징거리면서 말이야.”
우리 동지마트 회계 감사를 시작으로 형진이가 많이 바빠졌다. 같이 일하면서 녀석의 착실하고 꼼꼼한 업무 스타일에 만족한 고현호 이사가 괜찮은 회사 몇 개를 소개시켜준 덕분이었다.
회계사라는 게 일만 잘한다고 능력을 인정받는 건 아니다. 일을 잘하는 건 당연한 거고 고위직에 오르려면 영업도 잘해야 한다. 여기서 영업이란 고객들을 유치하는 것이고, 동지마트에 이어 다른 회사까지 소개를 받은 형진이는 그 공으로 순식간에 팀장으로 승진했다.
주가 조작 관련 스캔들 이후 형편이 어려워진 오영 회계법인 입장에서는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경력이 그리 오래된 건 아니지만 유례없이 빨리 승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미래의 처남이 소개해준 일이다.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수도 있는 고현호 이사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일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예전보다 데이트를 많이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바빠진 형진이를 이해해주기는커녕 자주 안 만나준다면서 마음이 변했네 어쩌네 하며 내게 전화해서 투덜거리던 사람이 바로 장희다. 그런 녀석이 시연이에게 그런 조언을 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풉. 그게 언니 매력이잖아요. 행동으로 옮기긴 어려워도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서 그런지 제게는 큰 도움이 되는 걸요. 그런데 동수씨. 제가 언니 말을 참고는 해도, 그렇다고 질투를 안 하는 건 아니거든요.”
“응?”
“만약 다른 여자와 따로 둘이 만나서 식사를 하거나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건 싫을 것 같아요.”
“내가 그럴 일은 없어.”
“알아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동수씨를 믿어요. 그런데 음···. 제가 동수씨 첫사랑이 아니라서 아쉽고, 제가 동수씨가 기억하는 유일한 여자가 아니라서 서운하기도 해요.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것 아니에요. 저보다 훨씬 동수씨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있을 거고, 저보다 훨씬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마구마구 질투가 나요. 저 좀 흉하죠.”
“아니. 하나도 안 흉해. 그것도 나를 그만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 그래서 오히려 예쁘고 사랑스러워.”
질투 난다는 여자친구를 내가 위로하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지금 말하는 시연이의 질투는 그냥 귀여운 투정처럼 느껴져 오히려 기분이 유쾌해졌다.
“정말요?”
“그럼. 그런데 시연아. 그런 걸로 질투할 필요는 없어.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오직 너니까.”
“아는데 이상하게 슬플 때가 있어요.”
“네 말처럼 난 첫사랑도 기억하고 있어. 그뿐만 아니라 나와 인연이 있었던 여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어.”
“뭐예요?”
“하하하. 뭐야. 우리 시연이 진짜 질투하는 거야?”
“치. 인연이 있었던 이성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데 질투 안 할 여자가 어디 있다고요.”
“나는 내가 제일 처음 이를 뽑았던 여자 치과 선생님도 기억하고, 초등학교 2학년 때 내가 놀린다고 내 팔을 물어버린 여자 짝궁도 기억해. 문방구 옆에 있던 떡볶이집 아줌마도 기억하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여자 담임 선생님도 모두 생생해. 지금 내게는 모든 게 기억일 뿐이야.”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그냥 옆집에 살았던 영희처럼 특별할 게 없는 그냥 일상적인 기억들일 뿐이라는 이야기죠?”
“옆집 영희? 옆집에 영희는 없었는···. 아. 철수와 영희에서 그 영희? 그래 맞아. 그러니까 질투할 필요가 없어. 지금 내게 특별한 기억은 시연이 너 하나니까.”
“우와! 그 말 너무 좋아요. 동수씨. ‘지금 동수씨에게 특별한 기억은 나 하나뿐이다.’ 그 말을 듣는 데 갑자기 눈물이 왜 나려고 하지. 정말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동수씨 나 졸려요. 자고 내일 다시 전화할게요. 사랑해요.”
딱히 감동을 받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시연이는 혼자 훌쩍이더니 갑자기 졸리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 타이밍에서 뜬금없이 훌쩍거리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뭔가 어이없었지만 웃겨서 한참을 웃다가 아직 마무리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곧장 전화를 걸었다.
Rrrr
“네. 김학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저 동지마트의 마동수 팀장입니다. 밤 늦게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마 팀장. 뭔가 급한 일이 생겼나 보군요.”
“조금 전에 아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 제 계좌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 팀장 계좌를요? 드디어 고정호 전무나 고평호 상무 측에서 견제를 시작했군요.”
그동안 김학수 부장이랑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중에는 만약 동지마트가 살아나면 내가 가장 첫 번째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조언도 들어 있었다. 내가 박 차장의 연락에도 침착할 수 있었던 건 김학수 부장의 조언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문제가 될 거리라도 있습니까?”
“저 같은 월급쟁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있습니다. 사실···.”
나는 김학수 부장에게 윤 스포츠센터와 나 사이에 있었던 금전거래를 모두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이런 건 딱히 속일 이유도 속여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해야 김학수 부장도 변수 없이 확실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혹시나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그 돈을 기부를 해버리다니. 정말 마 팀장은 언제나 저를 감탄케 하는군요. 거기에 올 3월에 개인적인 기부도 했고. 이 정도면 제 도움이 필요할까 모르겠군요.”
“그래도 확실한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단지 상대의 견제를 막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확실히 역공을 해야죠. 그럼 저는 방금 마 팀장이 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재미있는 스토리를 하나 만들어보겠습니다. 잘만 활용하면 동지마트의 인지도를 더욱 높일 수도 있겠군요.”
“기대하겠습니다. 부장님.”
“하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 팀장의 기대는 부담스럽습니다. 어쨌든 어시스트가 완벽하게 왔는데 골을 못 넣으면 곤란하겠죠.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일단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김학수 부장과 같이 일하게 되면서 그가 왜 미디어 마케팅의 1인자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고현호 이사와 시연이도 그의 적절한 서포트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관심을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니, 이제는 누구든지 어서 내가 던진 떡밥을 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