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8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PC방에서 상속포기각서를 작성한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서류를 작성했다. 단지 상속포기각서에 사인을 하라는 의미였으면 윤 사장님 재산에 관심이 없었던지라 쿨하게 사인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연이 작은어머니의 말이 정말 가관이었다.
‘윤씨 문장의 장손인 자신의 아들이 앞으로 윤 스포츠센터를 물려받을 거다.’
‘시연이는 결혼하면 출가외인이다.’
그렇지 않아도 거슬렸던 사람이다. 그냥 성질 죽이고 그냥 이대로 놔두면 나중에 더 큰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결정했다.
시연이 고모할머니가 좀 걸리긴 했다. 하지만 원래는 남이었다가 시연이 때문에 이어진 인연이다. 그분이 시연이보다 장손인지 나발인지 하는 핏덩이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내가 굳이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속포기각서를 모두 작성하고 서명까지 남긴 나는 곧장 윤 스포츠센터 본점으로 향했다. 스포츠 센터는 밤늦게까지 운영하는 관계로 윤 사장님의 퇴근 시각이 다른 직장인보다 늦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뭔가 새로운 일이 생겼는지 정신없이 뭔가를 하고 계셨다.
“또 무슨 일을 주려고 갑자기 찾아온 거야.”
“네? 제가 아버님에게 무슨 일을 줬다고 그러십니까?”
“몰라서 물어! D&Y 피트니스 클럽에 아이두 캐주얼까지. 신경 써야할 일이 자꾸만 늘어가서 정신이 없다고. 그러니 새로운 일이라면 돌아가.”
“일 때문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용무로 찾아왔습니다.”
“개인적인 용무?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일단 앉아. 차나 한잔 하자고. 나도 좀 쉬어야겠어.”
윤 사장님은 비서를 시켜 녹차 두 잔을 내오게 했다. 나는 말 없이 자리에 앉아 따뜻한 녹차의 향을 음미했다. 고소하면서도 청량한 녹차를 머금자 욱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흥분이 가라앉았다고 해도 지연이 작은어머니의 행동을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차향이 좋군요.”
“그렇지? 보성에 사는 친구 녀석이 정말 구하기 어려운 최상급 녹차만을 골라서 보내 준거거든. 워낙 귀한거라 나도 웬만해서는 잘 안 먹어.”
“네? 저는 입이 싸구려라 그냥 티백 녹차를 주셔도 되는데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얼굴이 좀 흥분되어 보여서 그랬어. 요녀석을 마시면 마음이 차분해지거든. 어때?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빙그레 웃으며 나를 향해 찻잔을 흔드는 윤 사장님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만날 때마다 톰과 제리처럼 나를 구박하지만 나를 아껴주시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질 때가 많아서 항상 감사했다.
순간 내가 괜한 일로 심려를 끼쳐드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강하게 붙잡았다. 돈이라는 건 정말 무서워서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보게 만들 때가 많다. 심지어는 돈 때문에 자신이 낳은 자식을 버리는 사람도 있다.
지금은 그냥 시연이 고모할머니와 작은어머니의 망상일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다. 그러니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윤 사장님이나 시연이를 위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네요. 확실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 비싼 녀석이라 그런지 비싼 값을 하더라고. 참! 그런데 요즘 시연이 때문에 골치가 아파.”
“네? 시연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무슨 일이 있으면 이젠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TV 광고에 나간 이후에 처음에는 연예인 시켜볼 생각이 없느냐고 귀찮게 하는 놈들이 많더니 이제 내 딸인 게 알려지고 나니까 선 자리가 자꾸 들어오네. 그중에는 거절하기 쉽지 않은 사람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선 자리에 내보내실 생각은 아니신 거죠!”
조금 전까지 내게 그렇게 감동을 주시던 분이 갑자기 뒤통수를 치셨다.
아! 진짜 윤 사장님은 하루라도 나를 갈구지 못하면 입안에서 가시도 돋치실 분이 분명하다. 일부러 도발하는 걸 알면서도 순간 욱했다.
“아니 이 녀석이 왜 내게 짜증이야. 그러게 누가 시연이를 겁도 없이 TV 광고에 내보내래? 그것도 그냥 평범한 내용이 아니라, 완전히 진짜 천사로 만들어버렸잖아. 어디서 그런 멋진 딸을 뒀느냐고 정말 탐이 난다고 사방팔방 난리야. 이게 다 동수, 네 잘못이라고.”
“약혼까지 했는데 선 자리를 제의하는 무뢰한 사람이 대체 누굽니까?”
“약혼이 결혼도 아닌데 무슨 대수라고. 그런 말도 몰라? ‘손 붙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다.’라는 말.”
“그래도 결혼을 약속하는 게 약혼입니다. 그런 걸 무시하는 집안이라면 안 봐도 뻔하죠.”
“그래서 거절했어. 신의도 모르는 곳은 처음부터 인연을 맺으면 안 되거든. 앞에서는 웃지만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놈들이 그런 족속들이야.”
“윽···. 아버님!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로 장난을 치십니까.”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제가 뭘 잘 못 했길래요.”
“우리 딸 인터뷰 못 봤어? 나 원 참. 예전에 우리 시연이는 말이야. 꿈이 커서 나랑 결혼하는 거였어.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어. 그런데 인터뷰에서 세상에 네 녀석이 우리 딸의 롤모델이래. 그게 말이 돼!”
이제야 윤 사장님이 내게 심술을 부리시는 이유를 알았다. 솔직히 나도 시연이 인터뷰를 보고 깜짝 놀란 건 마찬가지다.
내 사랑하는 연인이 나를 존경한다고, 나를 닮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나를 아는데 나라는 놈은 절대 좋은 놈은 아니다. 시연이가 나를 닮아서 능글능글해지고 깐죽깐죽거린다면?
윽···. 그건 상상만 해도 싫다.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연이가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했는지.”
“내가 너를 싫어하는 건 절대 아냐. 같이 일해보니 똘똘하고 듬직해. 하지만 우리 딸은 아니지. 시연이가 너처럼 음흉하고 사악한 녀석으로 변했으면 좋겠어?”
“아니죠. 절대 그러면 안 되죠! 아···. 그··· 그렇다고 제가 음흉하고 사악하다는 건 아닙니다. 절대! 그냥 시연이가 무뚝뚝한 저보다는 다정다감하고 현명하신···.”
“나?”
“아니요. 어머님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흥이다. 이놈아.”
“솔직히 아버님이나 저나 성격 이상한 건 오십보백보인데 순수하고 맑아야 할 시연이가 우리를 닮으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킁···. 그래서 나를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뭐야?”
나의 노골적인 말에 말문이 막히신 윤 사장님이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이걸 드리려고요.”
“응? 이게 뭔데?”
“열어보시면 압니다.”
“어디 보자. 재산포기각서? 이게 뭐냐?”
“말 그대로입니다. 시연이와 결혼해도 아버님의 재산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약속 같은 겁니다.”
“뭐? 누가 네게 내 재산을 준데? 허허. 녀석 참. 그렇게 안 봤는데 혼자 김칫국물부터 마신 거야?”
다짜고짜 재산포기각서부터 들이밀자 뭔가를 오해하신 윤 사장님이 역정을 내셨다.
“저도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이나 보더라고요.”
“누가?”
“시연이 고모할머님하고 둘째 작은어머님께서요.”
처음부터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치려고 온 거다. 누가 그랬는지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고모가? 그리고 작은 제수씨가? 너 똑바로 이야기해. 갑자기 그게 무슨 이야기야.”
“낮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시연이 둘째 작은어머님이 전화를 주셨더군요. 저녁에 잠깐 만나자고요.”
“흠···. 그런데 고모 이야기는 왜 나와?”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고모할머님도 나와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 말씀을 하시더니 바로 재산포기각서를 내미시던데요. 사인하라고요.”
“이것 참 어이가 없어서. 그냥 아무 설명 없이 네게 이걸 쓰라고 했단 말이야? 그래서 아까 표정이 그따위였어?”
“그렇죠. 전 또 아버님이 제게 직접 말씀하시기 민망해서 대신 고모할머님과 작은어머님을 보냈다고 생각했죠.”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했다. 극적인 요소를 위해 그냥 하는 말이다.
고모할머니나 작은어머니도 내가 윤 사장님을 찾아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 못 한 것 같다. 그러니 시연이에게만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겠지.
하지만 윤 사장님과 나는 같이 일할 때부터 쌓인, 말로 설명하기는 약간 애매한, 독특한 유대감이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유대감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딴 비겁한 짓을 해. 내 성격 몰라? 내가 정말 그러기를 원했다면 대놓고 이야기했어. 너도 내 성격 알잖아. 뒤에서 일 꾸미는 거 싫어하는 거. 그런데도 나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히 아버님이 뒤에 있지 않은 이상 고모할머님이나 작은어머님이 무슨 자격으로 제게 재산포기각서를 쓰라고 하겠습니까? 윤 스포츠센터가 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사업도 아니고 말입니다.”
“아 진짜 이 자식이! 나 정말 아니라니까!”
조금 의뭉스럽게 말을 하자 윤 사장님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셨다.
“그런데 그다음 말을 듣고 아버님이 뒤에서 조종한 일이 아니라 두 분이 그냥 자기들 마음대로 제게 각서를 내밀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데?”
“저는 제게 재산포기각서를 건네준 두 분을 보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장님 재산은 어차피 시연이 것이다. 난 하나도 관심이 없다. 나는 시연이를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지 재산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리고 부부 사이에 네 재산 내 재산 따지는 것도 웃기다. 설마 우리 두 사람이 깨지길 바라는 거냐. 그랬더니 작은어머님께서 정색하며 제게 딱 한마디 하시더군요.”
“뭐라고?”
“시연이는 결혼하면 남의 집안사람이라고요. 출가외인인데 윤 스포츠센터를 물려줄 수는 없지 않으냐고. 윤씨 문중의 장손은 도현이니 장차 그 녀석이 윤 스포츠센터를 물려받게 될 거라고 그러더군요.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저도 눈치챘죠. 아버님이 연관된 일이 아니라는 걸요. 그리고 고모할머님과 작은어머님 둘 중 누가 부추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중 한 명이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허···. 그 말 진짜야?”
“어떤 말이요?”
“제수씨가 정말 시연이가 아니라 도현이 녀석이 윤 스포츠센터를 물려받게 될 거라고 했단 말이야?”
“제가 미치지 않고서는 갑자기 재산포기각서를 들고 아버님을 찾아올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만 이야기해! 제수씨가 네 녀석에게 진짜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
“네. 물론입니다.”
“알았어. 동수 네게는 정말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 재산포기각서는 없었던 일로 할 테니 오늘은 그만 나가 봐.”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설명을 듣던 윤 사장님은 갑자기 내게 축객령을 내리셨다.
화가 나셨는지 왼쪽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그렇지만 그의 눈빛은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만큼 차갑게 내려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문을 닫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 작품 후기 ============================
뭔가 해결방법이 약아빠졌지 않습니까?
하지만 얄미울정도로 치사한 성격이 제가 생각하는 동수의 매력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