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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262화 (262/424)

00262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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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룡은 그동안 이토록 냉정하게 구는 큰 형님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낯설었다. 그는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대신 윤승태 사장이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아낌없이 주는 고마운 나무였다.

그런 소중한 사람과 인연이 끊어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지금도 충분히 부자다. 그리고 잘나가는 피부과 의사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저명한 피부과 의사 다섯 명을 꼽으라면 윤승룡이라는 이름은 무조건 들어갈 정도로 명성과 인망도 두터웠다.

대학 졸업반이던 아내를 그것도 누구보다 성지식이 풍부해야할 의사라는 사람이 임신시켰다는 사실이 미안해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웬만하면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부족하다고 칭얼거렸다. 도대체 뭐가 부족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른한 살에 아내를 만나 허튼 곳에 눈 한 번 안 돌리고 한 사람만 바라본 대가가 이건가 싶어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를 여전히 사랑한다. 집안 내력인지 위에 두 형도 그렇고 조카인 시연이까지 한 번 좋아한 사람은 끝까지 좋아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밉다면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할 텐데 모질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파트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한 윤승룡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와 우동을 주문했다. 맨정신으로 싫은 소리를 할 자신이 없어서다.

우동 국물을 먹으며 빠르게 소주 한 병을 비웠지만, 이상하게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한 병을 더 주문해서 맥주 글라스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 한 번에 잔을 비웠다. 그래도 모자란 것 같아 남은 소주를 다시 빈 글라스에 가득 채워 한입에 털어 넣었다.

썼다.

이제야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계산을 하고 포장마차를 나서자 눈앞이 빙그르르 돌았다. 차가운 밤공기에 금방이라도 술이 깰 것 같아 황급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이제 와요? 아휴. 술 냄새. 당신 술 마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가 그를 맞았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럴 때는 그가 사랑했던 그녀가 맞는 것 같다.

“응. 한 잔 했어.”

“큰 아주버님이랑요?”

“아니. 나 혼자 마셨어.”

“아니 왜요? 큰 아주버님 만나러 간 것 아니었어요?”

“만났지. 만나서 이야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술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딱 한 잔만 했어.”

“딱 한 잔요? 술 냄새가 이렇게 나는 데 무슨 딱 한 잔이에요. 당신 원래 이렇게 술 많이 안 마시잖아요. 무슨 속상한 일 있어요?”

동수에게 확인전화까지 한 임자령은, 큰 아주버님이 남편에게 역정을 낸 게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술 취한 남편의 모습을 보니 안심할 게 아닌 것 같았다.

“형님이 인연을 끊자고 하셔. 내가 마음을 돌리려고 했는데 요지부동이야.”

“네? 대체 왜요?”

“그러게 대체 왜 그랬을까?”

“아주버님도 정말 이상하시네요. 우리 큰아들이 집안 장손인데 어떻게 당신하고 인연을 끊자고 말씀하실 수 있어요. 인연을 끊자는 건 설마 우리 도현이를 윤씨 문중 장손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대체 왜 그랬어?”

“네?”

“대체 왜 그랬냐고?”

처음엔 큰 아주버님에게 향한 넋두린 줄 알았는데, 남편은 그녀를 향해 묻고 있었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녀가 보기엔 절규하는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철렁거렸다.

“무··· 뭐가요?”

“당신 대체 왜, 왜 그랬어.”

“어머 이이가 정말. 지금 술주정하는 거예요?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내일 이야기해요. 술 깬 다음 맨정신으로.”

남편의 슬픈 눈동자를 바라볼 자신이 없어진 임자령은 술주정을 핑계로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이야기에 몸이 굳고 말았다.

“동수 그 친구는 대체 왜 만난 거야.”

“누··· 누가 그래요? 제가 그 사람을 만났다고.”

“듣긴 누구한테 들어. 형님이 말씀해주셨지.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동수를 만났냐고.”

“자··· 자격이 없긴 왜 없어요.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집안 경조사 중 필요한 건 알려야 한다고요. 그래서 만난 거예요.”

“그런데 왜 쓸데없이 상속포기각서를 쓰게 만들었어!”

“어머머. 진짜. 동수 그 사람 안 되겠네. 아니라고 하더니 그새 쪼르르 달려가 시연이에게 고자질을 한 거야. 진짜 그 덩치가 아깝다. 아까워.”

이미 남편은 다 알고 있었다. 여기서 발뺌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임자령은 그녀의 잘못보다는 동수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이 더 괘씸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왜 상관도 없는 당신이 상속포기각서를 쓰게 했느냐고.”

“그게 어때서요? 다 우리 도현이를 위해서 그랬어요. 아들 잘되자고 한 일인데 당신은 그걸 이해 못 해요?”

“형님 혼자 힘으로 일군 곳이 윤 스포츠센터야. 그 일을 하시면서 집안에 손을 벌리지도 않으셨어. 아니지 생활비에 작은 형과 내 학비까지 대셨으니 우리가 형님에게 손을 벌린 거지. 그런데 도현이가 대체 무슨 상관이야.”

“장손이잖아요.”

“그놈의 장손! 장손이면 남의 재산까지 마음대로 욕심내도 된다고 그래? 아니면 내가 당신에게 부족해?”

“네에?”

“내가 부족하냐고. 내가 벌어오는 돈이 부족해서 형님 재산까지 욕심을 내는 거냐고.”

“다··· 당신이 왜 부족해요. 하나도 한 부족해요.”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무뚝뚝해도 한눈팔지 않고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줘 고마웠다.

하지만 여자 임자령과 엄마 임자령은 달랐다.

“아니야. 내가 부족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어. 그런데 자령아. 나는 더 이상 네게 해줄 게 없다. 네가 원하는 걸 모두 채워주지 못해서 미안한데 그게 내 깜냥이야. 우리 이혼하자.”

“여보! 당신 지금 대체 뭐라고 한 거예요? 다시 한 번 말해볼래요?”

“이혼해. 이혼하자. 아니 이혼해줄게. 나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우리 여기서 그만하자.”

“다···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에요? 이혼이요? 아무리 술을 마셨다고 해도 내게 어떻게 그런 막말을 할 수 있어요.”

“나, 정신 말짱해. 어느 때보다 또렷해. 술 마셨다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당신이라는 여자가 이제 무서워. 함께 살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이혼하자.”

윤승룡의 눈빛은 술 마신 사람답지 않게 또렷했다. 임자령은 그게 더 무서웠다. 지금까지 남편은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착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저렇게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이혼을 말하는 남편을 보자 두려워서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싫어요. 못해요.”

“내가 당신이랑 살 자신이 없어졌어.”

“지금 당신은 취했어요. 취한 마음에 무슨 소리를 못하겠어요. 지금 당신이랑 나랑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될 것 같아요. 당신이 제게 서운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이혼이 그렇게 쉽게 입에 담을 말이에요?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맨정신에서 다시 해요. 오늘은 애들 데리고 친정에 가 있을게요. 그러니 당신도 집에서 혼자 생각할 시간을 좀 가지세요.”

“생각한다고 달라지지 않아. 이미 충분히 고민한 일이야.”

“당신만 바라보면서 15년 가까이 살았어요. 그런데 이런 일방적인 통보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아는 당신은 이렇게 충동적인 결정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정말 맨정신이든 아니든 그건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만약 내일도 당신이 이혼을 원한다면 해줄게요. 그 이혼. 당신이 나랑 살기 싫다는 데 나도 당신 바지 끄덩이 붙잡고 추하게 늘어지긴 싫어요.”

이혼해준다고 말은 했지만, 남편이 술에서 깨면 분명 달라질거라 믿었다. 그녀가 아는 남편이라면 분명히···.

임자령은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웠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행동에 아이들은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아이들이 투정을 부리든 말든 그녀는 작은 가방에 아이들 옷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아빠!”

나갈 준비를 하던 도현이가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빠를 발견하고 반색을 하며 뛰어갔다. 유난히 윤승룡을 따르던 큰아들이다.

“아빠아!”

형이 뛰어가는 모습에 둘째도 뒤질세라 아빠의 품으로 달려갔다. 아직은 엄마 품이 더 좋은 아이였지만 도현이가 하는 건 뭐든지 따라 하고 싶어하는 형 바라기였다.

“아이쿠. 우리 아들들.”

두 아들이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달려오자 윤승룡도 무뚝뚝한 얼굴을 지우고 환하게 웃었다. 아내에게 실망했지만, 그런 감정을 아이에게 표출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윽! 아빠한테서 술 냄새나.”

“오늘 아빠가 일이 있어서 술을 좀 마셨어. 술 냄새 많이 나?”

“응. 엄청 많이 나.”

“미안해.”

“그런데 아빠.”

“응?”

“엄마가 지금 외할머니 집에 가자고 하는데 아빠는 안 가?”

“아빠도 가고 싶은데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대신 내일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

“우와! 진짜?”

“내일은 안 돼!”

윤승룡이 두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임자령이 끼어들었다.

“왜에.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준다잖아. 엄마도 같이 먹으면 되잖아.”

“그래도 안 돼. 내일은 아빠랑 엄마랑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러니 외할머니랑 얌전히 놀고 있어.”

“치! 아빠랑 엄마랑 둘이서만 맛있는 거 먹고 오려고 그러지? 다 알아!”

“그런 거 아니야. 아빠가 글쎄 엄마보고···.”

“여보! 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 거야?”

“왜요. 애들도 알아야 하잖아요. 설마 그냥 제게 해본 소리였어요?”

임자령은 남편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안다. 일부러 아이들을 깨워 친정에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시위다.

‘나랑 헤어지면 당신이 목숨보다 사랑하는 두 아들과도 헤어지는 거다. 그래도 정말 나와 헤어질 거냐.’

마치 이런 의미를 담고 남편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영악한 그녀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내··· 내일 다시 이야기해. 당신이 엄마라면.”

“지금 누구보고 충고예요. 먼저 버릴려고 한 건 당신인데.”

“아빠! 엄마! 지금 싸워?”

“아니. 싸우는 거 아니야. 그냥 이야기하는 거야.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 우리 아들들. 오늘 외할머니 집에 가서 푹 자고 내일 보자. 아빠가 보러 갈게.”

“응. 아빠. 내일 꼭 와야 해.”

임자령도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는지 남편의 말에 더 이상의 반박하지 않고, 두 아들과 함께 조용히 문을 나섰다.

아내와 아이들이 떠나자 아무도 없는 어두운 현관에 우두커니 앉은 윤승룡은, 이번 일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 작품 후기 ============================

짧게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죄송한 마음에 오랜만에 연참할게요. 1시간 후에 한 편 더 올라갑니다. 진행이 드뎌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해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ㅠ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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