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5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주말을 이용해 시연이와 함께 포항에 있는 본가를 방문했다. 원래는 동생 내외와 조카인 마수리도 함께 가려고 했으나 수리가 갑자기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우리 둘만 내려왔다. 아쉽게도 나이 어린 삼촌과 그보다 인생을 두 배 이상 산 조카의 만남은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그러니까 우리보고 레스토랑인지 뭔지를 운영하라고?”
“네. 내가 모시고 있는 이사님이 내가 이쁘다고 특별히 좋은 기회를 주셨거든요. 그거 하나만 있으면 아버지, 어머니 노후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번 기회 놓치지 말고 레스토랑 한 번 해보세요.”
“너희 아버지 아직 회사 다니시잖아.”
“아버지는 회사 계속 다니시고 어머니가 운영을 해보라는 이야기죠.”
“내가? 강수는 어쩌고? 백일도 안된 애를 놓고 때놓고 다니라고?”
“그건 아니죠. 부지를 매입해서 거기에 건물을 지으려면 최소 몇 달은 걸리니까 그때까지 어머니가 돌보시면 되죠. 그리고 그때부터는 보모 두세요.”
“네 아버지 밥은?”
역시 이게 문제였다. 아버지는 지금 다니고 계신 회사를 천직으로 알고 계시고, 우리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꼬박꼬박 밥을 차려주는 걸 천직으로 알고 계셨다.
“레스토랑은 어차피 점심부터 하잖아요. 오전 근무일 때는 밥 차려 주시고 여유있게 레스토랑 가시면 되고요, 오후 근무일 때는 점심 드시고 같이 출근하세요. 그리고 야근일 때는 매니저에게 맡기고 쉬시면 되겠네요. 처음부터 막 열심히 안 하셔도 돼요. 제가 믿고 맡길 수 있는 괜찮은 매니저 구해서 어머니 하는 일 많이 줄여 드릴게요.”
“그래도 갑자기 레스토랑이라니···. 당신은 어떠세요?”
여장부 같은 우리 어머니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는 항상 아버지에게 넘긴다.
“흠···. 확실히 성공 가능성은 있는 거냐?”
“100% 성공할 수 있다. 이런 건 사실 없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는 좋아요. 요즘 제가 맡고 있는 동지 마트가 많이 유명해지면서 덩달아 동지 푸드쿡도 상승세를 타고 있거든요.”
“그래도 직장이 있는데 다른 일을 한다는 게 괜찮을지 모르겠다.”
“아버지. 아버지 내년 연세가 이제 겨우 만으로 55세입니다. 요즘 세상에 그 나이면 할아버지 취급도 못 받아요. 아저씨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벌써 정년퇴직해서 연금받고 사는 거 좀 그렇지 않아요? 강수 생각도 하셔야죠. 강수가 초등학교를 들어가서 가정환경 조사를 하는데 아버지 직업이 백수라면 애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거 대신에 레스토랑 운영 이렇게 해놓으면 좋잖아요.”
“그도 그렇구나.”
“게다가 그냥 놀면 금방 무기력해진다고 해요. 그러니까 계속 일하셔야죠. 지금처럼 힘든 일 말고 레스토랑같이 좀 여유 있는 일을 하면서 여가 생활도 하고요. 지금 제가 권해드리는 레스토랑이 젊은 사람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거든요. 그런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버지 어머니도 젊게 사실 수 있을 거예요.”
전쟁터와 다름없는 이전투구의 현장에서 말발 하나로 살아남은 나다. 순진하게 한곳에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신 아버지를 설득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다.
“여보. 동수 말을 들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우리 강수도 생각해서 젊게 살아야죠. 다른 친구들 부모들은 제 큰형인 동수보다 어린 사람도 있을 텐데 우리가 그냥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살아봐요. 얼마나 기가 죽겠어요.”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 아가.”
“네. 아버님.”
“아직 결혼은 안 했어도 약혼을 했으니 네가 우리 집안 맏며느리 아니냐. 네 생각은 어떠냐?”
“저도 동수씨와 같은 생각이에요. 옛날하고 많이 다르잖아요. 인생은 60부터라는데 아버님 어머님은 아직 시작도 안 하신 거잖아요. 그동안 열심히 일하셨으니까 쉬시는 거도 괜찮겠지만 푸드쿡 같은 레스토랑 하나 운영하면서 여행도 다니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좋은 곳 많이 모시고 갈게요.”
아! 역시 우리 예쁜 시연이. 어쩜 말을 해도 저렇게 정겹게 할까.
그녀의 말에 아버지 어머니의 표정이 금세 흐뭇해졌다.
“그래?”
“그럼요! 지금은 아버님이 회사에 다니셔서 시간 맞추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내년부터는 자유로워지실 거니까 제가 좋은 곳 많이 알아 둘게요.”
“동수 저 노마가 우리랑 같이 다니려고 할지 모르겠다.”
“동수씨가 싫다고 하면 제가 억지로라도 끌고 갈게요. 그리고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으시면 제게 말씀하세요. 제가 우리 작은 도련님 잘 돌보고 있겠어요.”
“그건 안 돼!”
“네? 왜요 동수씨.”
“오붓한 시간 두 번 보냈다가 셋째 동생 생기는 거 싫거든. 난 반댈세.”
“뭐라고? 이놈이 지금 시연이 앞에서 아버지를 놀리는 거야?”
내 농담에 아버지 얼굴이 붉게 변하셨다. 어려운 아버지였는데, 강수가 생기면서 왠지 조금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부러워서 그럽니다. 지금 나이에도 여전히 뜨거우신 두 분이 부러워서. 그래도 이젠 꼭 피임은 하시는 걸로···. 하하하.”
“크흠···. 그놈 참.”
“그런데 아들. 부지 매입하고 건물 올리려면 돈 많이 들지 않아?”
“높은 건물 짓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많이 들진 않을 걸요. 한 7 ~ 8억 원 정도?”
“뭐? 이놈이 서울 가서 살더니 간덩이가 커졌나. 7 ~ 8억? 그 돈이 누구 집 개 이름이냐?”
어머니의 호통에 나도 순간 아차 싶었다. 요즘 이리저리 돈을 잘 벌다 보니 그 정도 돈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냉정하게 따져 월급쟁이 생활로 그 돈을 모으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적은 돈은 아닌데 2 ~ 3년 정도 하면 그 돈 벌 수 있어. 그러니까 무리할 만해요.”
“돈이 있어야 무리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그동안 우리가 너희 공부시킨다고 돈 모을 새가 있었어? 그리고 지금 돈 다 털어서 망하면 우리 강수는 어쩌고? 네가 키워 줄 거야?”
“당연하죠. 강수는 나랑 상수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래요. 그리고 레스토랑도 걱정하지 마세요. 부족한 돈은 제가 드릴게요.”
로또에 당첨된 돈을 꽁꽁 싸매두면 뭐하나. 이럴 때 써야지.
다른 곳도 아니고 부모님의 노후를 위한 일인데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사실 그동안 로또에 되고도 제대로 해드린 게 없어서 많이 죄송했었다.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저 돈 잘 번다고 했잖아요. 저번에 말씀드린 로열티도 꼬박꼬박 잘 들어오고 연봉도 팀장 달면서 확 올랐잖아요. 그리고 제가 이번에 사둔 동지마트 주식이 제가 살 때보다 3배나 올랐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 복권 당첨됐으니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라고 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변명했다. 내가 로또에 당첨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시연이 밖에 없다. 그렇다고 시연이가 여기서 눈치 없게 ‘우리 동수씨 로또에 당첨돼서 돈 많아요. 어머님.’이라고 할 눈치 없는 여자도 아니다.
“그래? 그런데 네가 준 돈으로 레스토랑 하다가 잘 안 되면 어떡하지?”
“잘 되게 해드린다니까요. 나 못 믿어요?”
동지랜드도 동지마트도 살려낸 내가 독점권까지 인정받은 레스토랑을 망하게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사용하는 격이지만, 부모님을 위한 일에 소 잡는 칼이든 용을 잡는 칼이든 당연히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어머님. 동수씨 믿으세요. 그런 쪽으로 동수씨가 우리나라 일인자일 걸요?”
“뭐? 동수가 우리나라 일인자? 아가. 네가 아무리 동수 저 녀석에게 콩까지가 씌었다고 해도 그렇게 과대평가하면 안 되지.”
아! 슬프다. 우리 어머니가 아들의 능력을 의심하시다니···.
“과대평가가 아니에요. 우리 아빠 회사도 동수씨가 도와주면서 예전보다 매출이 1.5배 정도 늘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동지랜드랑 동지마트라고, 동수씨가 맡은 회사마다 매출이 확확 늘어서 사람들이 난리예요. 얼마 전에는 헤드헌터가 동수씨를 스카우트하려고 연락까지 왔었다니까요.”
“헤드헌터? 동수 아버지. 헤드헌터가 뭐예요?”
“쉽게 말하면 일자리 소개 시켜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직업소개소를 말하는 건가요?”
“그거랑 다르지. 거긴 일용직 사람들을 소개해주는 곳이고, 헤드헌터는 고급인력을 소개해주는 일을 하는 전문가들이야. 그런대서 연락이 왔다면 동수가 정말 능력을 인정받는가 보구나.”
“아가. 아버님 말씀이 맞냐?”
“네. 어머님. 거기서 동수씨를 서로 데려가려고 줄을 섰어요. 연봉을 몇억씩 준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고요.”
“뭐라고? 몇억? 그게 진짜야?”
“그럼요. 옆에서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니까요. 얼마나 자랑스러웠다고요. 헤헤. 그러니까 어머님. 안심하세요. 두 분이 운영할 레스토랑 마케팅은 동수씨가 알아서 해줄 거예요. 그리고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도 도울게요.”
“그래? 우리 맏며느리가 돕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동수 저 녀석이야 못 믿어도 우리 시연이는 믿지. TV 광고까지 나왔잖아. 네가 온다고 하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릴 거야.”
나보다 시연이를 더 신뢰하는 어머니가 서운했지만, 솔직히 시연이가 도와준다면 그것만큼 확실한 광고효과는 없다.
“그럴까요? 그럼 어머님이 원하시면 한 일주일 머물다가 갈게요.”
“아서. 공부하는 학생을 그렇게 오래 붙잡아둘 순 없지. 그런데 아가. 오늘 시간 좀 되냐?”
“그럼요. 오늘은 어머니 옆에서 자려고 부모님께 허락도 받아왔는걸요.”
“그래? 그럼 이따 저녁에 반상회 하는데 같이 가자.”
“반상회요?”
“그래. 반상회. 아니 글쎄. TV에 나오는 시연이 네가 우리 예비 며느리다 말을 해도 사람들이 안 믿잖아. 안 믿는 건 좋은데, 사람을 거짓말쟁이 취급을 하더라니까. 어이가 없어서.”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말이야. 오늘 나랑 같이 가면 아마 사람들 깜짝 놀랄 거야. 갈 수 있지?”
“그럼요. 당연히 같이 가야죠. 가서 제가 TV에 나온 그 윤시연입니다라고 말씀드릴게요. 염려하지 마세요. 어머님!”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시연이가 자기 일처럼 발끈하며 어머니와 함께하겠다고 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흐뭇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부모님 앞이 아니었다면 당장 내 품에 안아버리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그런데 아가.”
“네. 아버님.”
“내일 간다고? 아침 일찍 가?”
“아니요. 저녁까지 먹고 갈 생각인데요. 아버님 뭐 시키실 일 있으세요?”
아침 먹고 살 생각이었는데, 시연이가 눈치 빠르게 말을 바꿨다.
“내일이 우리 제강부 체육대회거든. 가족동반인데 네 어머니가 강수를 낳아서 움직일 수가 없네···. 크흠···.”
“갈게요. 아버님. 저랑 동수씨랑 가서 아버님 열심히 응원해 드릴게요. 그런데 어머님 혼자 계시면 심심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다녀와. 동수 아버지. 며느리 자랑 한다고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눈치 봐서 점심 식사만 하고 오세요. 저녁은 내가 우리 시연이 좋아하는 걸로 준비해놓을 테니까 오붓하게 가족끼리 식사하고 서울로 보냅시다.”
“내가 무슨 며느리 자랑을 한다고···. 흠흠.”
“아휴. 부끄러워하시기는. 아가 네 아버님이 글쎄.”
“임자!”
“호호호. 알았어요. 알았어. 그만할게요.”
뭐지. 이 낯설면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분위기가 너무 밝아서 오히려 내가 가족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게 새로 태어난 강수 덕분인지 아니면 시연이 덕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낯선 기분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전 이렇게 훈훈하면서 소소한 가족 이야기 좋아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