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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276화 (276/424)

00276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원래도 잘 지냈지만 어제 반상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머니와 시연이는 마치 친 모녀 사이처럼 친근해졌다. 둘이서 조용히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데 궁금해서 물어봐도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시연이가 이렇게 배신을 때릴 줄이야.

두 사람이 반상회에 다녀오는 사이 나와 아버지는 강수를 돌보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애를 본 적 없는 나나, 우리를 키울 때 육아는 여자 일이라며 뒷짐만 지고 계셨던 아버지나 어설프긴 마찬가지였다.

강수가 몇 번이나 울어서 애를 업고 반상회를 하는 곳을 달려갈까 고민했지만, 시연이까지 대동한 엄마의 외출을 감히 방해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신지 땀을 뻘뻘 흘리시며 강수 앞에서 열심히 노리개를 흔들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상수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는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처럼 몇 번을 걸어도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다.

“여보세요. 응. 웅이 엄마. 우리 큰 며느리? 호호호. 벌써 그 소식이 거기까지 갔어? 무슨 일이긴 그냥 나도 보고 싶고 우리 막내도 보고 싶어서 내려왔지. 누가? 우리 동수가? 에이. 그 녀석이 그럴 리가 있나. 우리 큰 며느리가 나 보고 싶다고 내려온 거지. 호호호. 그럼그럼. 내가 이야기했잖아 TV CF에 나오는 모델이 우리 며느리고. 내가 언제는 거짓말할 사람인가. 그렇지! 우리 며느리가 책도 썼지. 그럼. 뭐? 그 책이 웅이 엄마한테도 있다고? 그래서 사인을 받고 싶다고? 곤란한데. 아니 지금 서울 가는 건 아니고. 애들 아버지 체육대회에 따라간다고 하네. 억지로 데려가다니. 내가 우리 막둥이 때문에 못 나가니까 아버님 혼자 쓸쓸해 하신다고 한사코 따라간다고 했다니까. 호호호. 사인 받고 싶으면 웅이 엄마도 체육대회 가면 되지.”

내가 태어나서 우리 어머니가 저렇게 자주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아주 입이 귀에 걸리다 못해 찢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일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연이가 언제 한사코 따라간다고 했다고 저런 거짓말을 하실까. 내가 민망해서 시연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내게 윙크를 해줬다.

본가가 있는 지곡동은 포스코 직원들만 사는 아파트 단지다. 한 집 건너 한 집은 아는 사람이라 소문이 눈 깜짝할 사이에 퍼진다. 특히 어제 어머니와 시연이가 반상회에 참석한 이야기는 이 동네에서는 10년에 한 번 생길까 말까 한 대단한 뉴스(?)나 마찬가지다. 동네 아줌마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덕분에 꼭두새벽부터 우리 집 전화통은 불이 난 것처럼 요란하게 울려댔다.

지금 통화하는 웅이 엄마는 내 친구 어머니다.

음···. 친구라고 할 수 있으려나. 포항제철 유치원부터 포항제철 고등학교까지 13년을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 친구는 친구다. 친구는 친군데 친구라고 하기 애매한 그런 어색한 녀석이다.

쉽게 말해 나랑 사이가 안 좋다. 여러 가지로 서로 안 맞는 친구였고 그것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이상하게 주는 것 없이 미운 녀석이 바로 웅이다.

나랑만 안 좋은 게 아니라 어머니끼리도 사이가 안 좋다. 그러면서도 저렇게 서로 전화를 주고받는다는 게 남자인 나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저렇게 가끔 안부를 나누며 서로의 속을 긁으시곤 한다.

솔직히 웅이 그 녀석이 학창시절 나보다 공부는 잘했다. 그리고 나보다 좋은 대학을 갔고, 나보다 좀 더 잘나가는 대기업에 취직했다. 정말 이상하게 나보다 조금씩 잘나가는 바람에 그동안 우리 어머니 자존심 좀 많이 구기셨다.

나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재작년에 결혼도 했다. 7급 공무원 며느리 봤다고 자랑도 자랑도 보통 자랑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왜 장가 안 가느냐고 자기 며느리 밑에 9급 공무원이 한 명 있는데 소개시켜 준다며 또 한 번 어머니의 속을 긁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직 대리인 웅이와 달리 나는 벌써 팀장을 달만큼 잘나가고 있다. 거기다 TV CF에 나오는 모델에 베스트셀러 작가인 시연이가 예비 며느리라는 소식은 그동안 처졌던 우리 어머니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줬다.

그리고 나나 시연이보다 동네 아줌마에게 더욱 부러움을 받았던 건 바로 우리 어머니의 임신 소식. 쉰을 넘은 나이에 임신을 하셨다는 게 나로서는 좀 민망한 소식이었지만, 다른 아주머니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고 한다. 임신보다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우리 아버지가 아직도 어머니를 임심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응? 우리 며느리도 가족인데 당연히 체육대회에 갈 수 있지. 그럼. 가족 동반 아니야. 가족 동반. 내가 우리 며느리에게 특별히 예쁜 사인 해주라고 부탁할게. 그런데 웅이 엄마. 거기 며느리 이번 추석에는 와? 뭐? 또 못 온데? 쯧쯧. 공무원이라며. 공무원은 원래 빨간 날 다 쉬는 거 아니야? 일이 있다고? 어쩔 수 없지. 이야기 들어보니 명절에 더 바쁜 공무원도 있다고 하더라. 그러고 보면 공무원이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우리 작은 며느리는 공무원이라도 교사잖아. 당연히 추석에 오지. 걔는 방학 때도 여기 자주 와. 겨울에 과메기 맛있다면서 여기 와서 일주일씩 놀다 가잖아. 호호호.”

어머니 모습을 보니 왠지 오늘은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계셔야 할 것 같다. 강수 녀석은 어제와 달리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었다.

***

박연하 전무는 누가 따라다니는 걸 눈치라도 챈 건지 아니면 경영진으로부터 행동을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은 건지 최근 들어 행동이 많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렇다고 미친년에 가까운 행동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단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최대한 은밀하게 직원들을 구박할 뿐이었다.

대강의 동선을 파악한 여순희가 부지런히 따라다녀 봤지만, 마땅히 이거다 싶은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기껏 촬영해도 멀리서 찍은 화면이라 확실한 이슈를 만들긴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가까이 다가가 근접 촬영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너무 위험했다. 포에버마트 곳곳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고, 수행원이 두 명이나 따라다녀 괜히 무리했다가는 정체가 탄로 날 가능성도 있었다.

“휴···. 쉽지 않네. 갑자기 왜 저렇게 조심하는 걸까?”

“글쎄. 고객 중에 누군가 항의라도 했겠지. 전에는 애들 보는 앞에서도 난리를 쳤다면서. 종업원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건 무신경해도 자기 자식 교육에 안 좋은 건 못 보는 게 요즘 사람들이잖아.”

“우리가 그 사람들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 우리도 이렇게 조용히 지켜보고 있잖아.”

“그래서 마음이 안 좋아?”

“좋지는 않아. 난 오빠처럼 정의감이 투철하지 않아서 신경 안 쓰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은근히 마음에 걸리네.”

“네가 착해서 그래. 마음 아파도 참자. 우린 그 사람들하고 달라. 조금만 참으면 박연하 그 여자를 나락에 떨어트릴 수 있잖아.”

천성기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순희를 열심히 위로했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착한 그녀가 자신을 위해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요즘 너무 조심해서 틈이 없다. 그 여자. 마음 같아서는 무리하고 싶은데···.”

“안 돼! 그런 생각은 꿈에라도 하지 마.”

“알았어. 나도 무리 안 해. 오빠랑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은데 그런 위험한 짓을 내가 왜 해. 걱정하지 마.”

“나랑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어? 그거 혹시 프러포즈?”

“뭐래! 내가 언제 같이 살자고 했냐? 그리고 같이 살고 싶으면 오빠가 프러포즈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진짜? 내가 프러포즈 하면 받아 줄거야?”

“그··· 그건 나도 모르지. 일단 해보기나 하지? 지금 말고. 이번 일 성공하면 그땐 나도 한 번 생각해볼 게.”

“진짜? 그럼 이번 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데, 어쩌지. 음···.”

여순희의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다는 말에 천성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온 몸에서 의욕이 샘 솟았다.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있지. 조금 위험하긴 한데, 내가 약을 좀 올려 볼까?”

“안 돼! 우리 위험한 일은 안 하기로 했잖아.”

“일단 들어 봐. 아주 위험한 일은 아니야. 내가 날렵한 건 너도 알잖아. 문제가 생기면 재빨리 빠져나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무슨 방법인데?”

“별것 아니야. 지나가다가 실수인 척하면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옷에 묻히려고. 항상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다니잖아. 머리는 단정하게 질끈 묶고. 그런 모습을 보면 약간 강박증 같은 게 있을 것 같거든. 그런 사람 옷에 하얀 아이스크림이 묻어봐. 얼마나 싫겠어.”

“그건 나도 싫다. 그런 다음에?”

“오히려 내가 화를 내는 거지. 중요한 건 사람이 좀 많은 곳에서 그래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발작을 안 하지. 당신 여기 포에버마트 직원 아니냐고.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느냐고 막 화를 내면 참을 수밖에 없잖아. 대신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겠지.”

“그래서?”

“그래서? 그게 끝인데. 그다음은 운에 맡겨야지.”

“에이. 그게 뭐야? 그게 정말 끝이야?”

“그 정도만 자극해도 박연하 전무라면 엄청 예민하게 변할 것 같은데. 터질 듯 말 듯한 풍선처럼 말이야. 굳이 바늘이 아니라도 바람만 살짝 불어넣어도 펑하고 폭발할걸.”

여순희가 생각해도 박연하 전무를 자극하는 방법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직원들의 사소한 실수에도 참지 못하고 폭발할 가능성 높았다.

“근데 오빠는 괜찮을까?”

“그래서 사람 많은 곳에서 한다고 했잖아. 그리고 뭐라고 한 들 도망가버리면 그만이잖아.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아이스크림 묻혔다고 포에버마트 경비원들을 전부 동원하기야 하겠어?”

“그렇진 않겠지? 그럼 한 번 해볼까? 오빠만 안전하다면 한번 시도는 해볼 만할 것 같아. 이대로 가면 올해 안에 의뢰를 완수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 그러니까 한 번 해보자. 되든 안 되든 여기서 더는 무리하지 말고.”

“응. 그래도 오빠. 절대 무리하면 안 돼!”

“당연하지.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거든.”

“뭐가?”

“나도 너랑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다고. 그러니까 절대로 무리하지 않을 거야. 안심해.”

“그거 프러포즈야?”

“뭐? 그··· 그래 프러포즈다.”

“호호호. 뭐야. 반지도 준비 안 하고 멋없이. 그래도 생각은 해볼게.”

“이번 일 성공하면 제대로 준비할 게.”

“그래 보던가.”

============================ 작품 후기 ============================

너무 많은 걸 생각하려니 한도 끝도 없군요. 이번 이야기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천성기의 아이디어로 고현아 전무를 화내가 만드는 건 좋은데, 그 때문에 애꿎은 직원이 당하게 생겼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하나...

아무런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건 무미건조하고,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 포장하는 건 치졸해보이고.. ㅎㅎ

그래서 은근쓸적 구덩이 담덤어가듯 얼머무렸습니다. 이게 제 머리의 한계인가 봅니다. 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으셨다면 칭찬의 의미로 선추코.

재미없으셨다면 격려의 의미로 선추코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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