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2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나는 천성기와 여순희가 가져다준 동영상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지만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벌이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물론 세상에는 박연하 전무보다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도 많다. 그러나 연쇄 살인범이나 아동 성범죄자들도 그녀처럼 대 놓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쁜 짓을 벌이지는 않는다. 정신병자가 아니고는 저런 짓을 벌일 수가 없다.
“휴······.”
옆에서 나와 함께 동영상을 지켜보던 고현호 이사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지 답답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수고했어. 기대 이상이야. 이 정도면 내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원래라면 박장대소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을 거다. 이 정도면 최소한 절반 이상은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그러나 참혹한 동영상을 보고 나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흔적도 없이 싹 사라졌다.
그렇다고 너무 감상적으로 빠지는 것도 곤란했다. 그래서 조금 무미건조하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박연하를 도발한 것 때문에 영상 속 매니저라는 남자가 안 겪어도 될 고초를 겪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고의로 그런 건 아니잖아.”
“고의가 아니라도 제가 원인 제공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제가 도발하지 않았다면 박연하가 그렇게 미친 짓을 벌이지는 않았겠죠.”
그렇게 말하는 천성기의 표정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슬퍼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여려 보여 그동안 어떻게 흥신소를 운영해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일에까지 죄책감을 가지는 건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해. 자신에게 너그러운 것도 문제지만 쓸데없이 단호한 것도 좋지 못한 습관이야. 박연하가 그런 히스테리를 부린 게 꼭 성기 네가 원인이 아닐 수도 있잖아. 인과관계가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굳이 자책할 필요가 있을까? 그건 나비의 날갯짓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이 일어났다며 나비를 원망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아.”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자꾸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팀장님.”
“내게 부탁이라도 있나 보지?”
“네.”
“뭔데? 말해봐.”
“팀장님은 이 동영상을 어떻게 활용할 계획이십니까?”
“글쎄. 그건 내가 네게 말할 이유가 없지 않아? 난 박연하 전무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달라고 의뢰했고 너와 순희씨는 그 일을 완벽하게 해냈어. 그럼 두 사람의 역할은 끝난 거야. 내가 이 동영상으로 뭘 하든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은데.”
말하는 뉘앙스나 표정을 보니 천성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흔들리는 눈에서 그의 생각이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심술궂게 대답했다.
“팀장님. 그래도 어쩔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은혜는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좀 더 놀려먹으려고 했는데,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마음이 약해졌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좀 심술궂고 사악한 면이 있지만, 저렇게 진심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까지 그렇게 대하긴 어려웠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적당한 때에 언론에 공개할 거야.”
“네? 그게 정말이십니까?”
천성기는 내 말에 금세 반색한다. 확실히 알기 쉬운 캐릭터였고, 그만큼 순진하다는 의미였다.
“그래. 이사님이나 내 목표가 포에버마트를 흔드는 일이니까. 성기 네가 구해온 이 동영상은 박연하 전무뿐만 아니라 포에버마트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어줄 거야.”
“휴우···.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하하하.”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어.”
“그게 뭡니까?”
“성기 네가 간절하게 말해서 내 계획을 말해줬지만, 방금 내가 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해. 이 사실이 밖으로 새나가면 이번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알고 있습니다. 꼭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당장 동영상부터 공개할 계획은 없어.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할 거야. 물론 최종목표는 동영상 공개야. 그렇지만 천천히 빠져나갈 구멍 없이 완벽하게 그물을 친 다음 공개할 거야. 그러니 절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나를 믿고 기다려. 혹시나 불순한 생각으로 우리에게 건넨 동영상 말고 복사본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제거해.”
“누··· 눈치채셨습니까?”
“바보라도 눈치챘을 거야. 네 얼굴에 다 드러나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너나 여순희씨가 나 몰래 엉뚱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는 건 실망스러워.”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상수 형님이나 윤권이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그만···.”
“그래. 그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이쪽 일을 하기에는 두 사람은 너무 여린 것 같아. 인면수심이 되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래도 독기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아도 순희랑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단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팀장님이 주시는 성공보수는 그 돈은 매니저와 여직원에게 넘길 생각입니다. 그리고 탐정 사무소는 정리해서 같이 경주에 내려가려고요.”
성공보수가 무려 1억 원이다. 그걸 포기하겠다고 하는 천성기가 나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일부를 떼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전액이라니, 순간 뭐 이런 바보같은 인간이 다 있나 싶었다.
“됐어.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마. 차후 적절한 보상은 우리가 할 거야.”
“아닙니다. 팀장님은 의뢰를 하셨고 방법은 우리가 선택한 겁니다. 그러니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성기야!”
“네. 팀장님.”
“네가 그 돈으로 죄책감을 덜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가 가. 그런데 어떻게 그 돈을 전달할 생각이지? 그냥 찾아가서 무작정 ‘저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라도 할 생각이야? 아니면 몰래 돈이라도 놓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우리가 계획한 일이 밝혀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한두 푼도 아니고 1억 원이라고. 설사 계획이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두 사람이 그 돈을 받게 된 사실이 알려지면 오히려 고초를 겪게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어? 혹시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이번 일을 유도한 거라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인간들이 늘어날걸.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는 꼴이 된다고.”
“네? 그러면 어쩌죠?”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적절한 보상은 나중에 우리가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그래도···.”
“됐어. 정당한 일에 대한 대가는 받아가는 게 예의야. 그런데 경주는 갑자기 왜 내려 간다는 거지?”
“아···. 그게 순희 고향이 경주입니다. 거기 내려가서 태권도 도장이라도 운영해보려고요.”
“그래? 경주 어딘데?”
“경주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합니다. 안강이라고 포항과 경주 사이에 있는 시골 동네거든요.”
“안강 알지. 내 고향이 포항이잖아. 그런데 거긴 꽤 시골인데 태권도 도장이 잘 될까 모르겠다. 흠···. 혹시 말이야. 레스토랑 매니저 같은 거 해볼 생각 없어?”
“네? 레스토랑 매니저요? 죄송하지만 한 번도 그런 일은 해본 적이 없어서.”
“안 해봤으면 배우면 되잖아. 몇 달간 열심히 교육받으면 충분히 잘할 수 있어. 혹시 동지 푸드쿡이라고 들어봤어?”
경주에 내려간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절로 부모님이 운영하실 레스토랑이 떠올랐다.
사실 두 분이 식당일에 올인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솔직히 그러길 바라지도 않는다. 믿을만한 사람을 두고 두 분은 여유롭게 노후를 보내는 게 내가 생각할 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천성기와 여순희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들어봤습니다. 요즘 들어 굉장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경주나 포항에 푸드쿡은 없다고 들었는데요.”
“없지.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포항에 매장 하나를 여실 거야. 아버지는 아직 회사를 다니시고, 어머니는···. 이런 말 하기 좀 민망한데, 늦둥이를 낳으셨거든.”
“네? 늦둥이요?”
“웃지 마! 그렇게 됐어. 어쨌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레스토랑에 완전히 신경을 쏟기 어려워. 믿을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고 싶었는데 마침 네가 경주에 내려간다고 하니 혹시나 싶어서 제안하는 거야. 보수는 충분히 넉넉하게 줄 거고, 포항에서 산다고 하면 아파트까지 제공할게. 레스토랑 매니저를 하는 동안은 계속 사용할 수 있어.”
아파트를 사주는 것도 아니고 숙소처럼 제공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파트 한 채를 사서 사원 숙소로 등록하면 세금 혜택도 받을 수 있고, 나중에 아파트값이 오르면 시세 차익도 얻을 수 있다. 내게도 절대 손해볼 일이 아니다.
“아··· 아파트까지요?”
“그래.”
“제가 잘할 수 있을지···.”
“잘할 수 있어. 난 성실하고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한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쨌든 갑작스러운 제안이니까 당황스러울 거야. 시간을 줄 테니까 순희씨랑 상의해봐.”
“감사합니다. 팀장님. 자꾸 팀장님에게 신세를 지는 것 같습니다.”
“아니야. 신세. 이번 일을 수락하면 내가 신세를 지는 거지. 우리 부모님을 도와주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꼭 긍정적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상수도 아마 네게 정말 고맙게 생각할 거야.”
항상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불안했는데, 천성기와 여순희처럼 인간적인 사람들이 곁에 있어 준다면 훨씬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래서 만약 두 사람이 수락한다면 아파트도 부모님이 사시는 곳 근처로 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행여 혼자 김칫국물을 마시는 꼴이 되지 않을까 천성기가 가장 좋아하는 선배인 내 동생을 파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여간 마 팀장 너는 잔머리 대마왕이라니까.”
천성기가 밝은 얼굴을 하며 여순희와 상의해보겠다고 회의실을 나가자, 옆에서 그 꼴을 묵묵히 지켜보던 고현호 이사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에이. 그냥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죠. 믿을 수 있는 성실한 사람을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요. 이사님이 봐도 괜찮은 선택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흥신소를 계속 한다면 못 미덥겠지만, 푸드쿡 매니저라면 믿을만해. 충분히. 인간적으로 보면 누구보다 순수한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제가 재빨리 스카우트 제의를 한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고 이사님.”
“응? 왜 갑자기 그렇게 느끼하게 바라봐?”
“동영상도 들어왔으니까 이제 시작해야겠죠? 포에버마트 흔들기 프로젝트.”
“당연하지! 마 팀장아.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고생은 김학수 부장님이 다하겠지만,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연하 그 여자 눈에서 피눈물이 날 수 있도록요.”
============================ 작품 후기 ============================
돌아왔습니다. 원래는 어제부터 연재하고 싶었는데 몸이 너무 피곤해서 하루 늦었습니다. 내일부터 연재속도를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