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0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동지그룹? 아··· 거긴 동지마트가 있긴 하지. 그런데 거기 요즘 꽤 상종가라면서? 지점이 많지 않더라도 꽤 짭짤할 텐데, 위험부담 많은 포에버마트 인수에 관심을 가질까?”
“그래서 더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경태 회장의 질문에 박호준 상무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이사회에서 공식적으로 건의하기에 앞서 측근들과 충분히 논의했던 이야기였다.
“어떻게?”
“원래 몇 달 전의 동지마트는 적자투성이의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조만간 동지그룹이 대형할인마트 사업에서 손을 떼고, 다른 대형할인마트에 동지마트를 매각한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고현호 이사가 그곳 책임자로 발령 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딱히 서비스가 나아진 건 아닌데, 적절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믿을 수 있는 기업’이라는 신뢰를 대중들에게 심어줬습니다. 동지마트 광고모델조차 기부천사 이미지를 얻는 바람에 그곳에 대한 대중들의 믿음은 갈수록 공고해졌습니다. 그 덕분에 가격적으로 다른 대형할인마트에 비해 딱히 경쟁력이 있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엄청난 매출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와룡그룹 고 회장의 아들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누구는 수백 개의 지점이 있는 멀쩡한 할인마트를 말아먹는데, 누구는 제 아버지가 실패한 곳을 자기 힘으로 되살리다니. 쯧쯧. 계속 이야기해봐.”
박경태 회장의 자식들이나 손자들도 대부분 외국 대학에서 학위를 따온 인재들이다. 그러나 와룡그룹 세 아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다. 고씨 삼 형제는 세계적으로 손꼽는 최고의 경영 대학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위를 땄다면, 박씨 일가의 자식과 손자들은 쉽게 말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외국 대학을 ‘돈을 처발라’ 가며 어렵사리 힘들게 학위를 얻어냈다.
한쪽은 학위를 ‘땄’고, 다른 한쪽은 학위를 ‘얻어냈다.’는 표현 자체가 두 일가의 차이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의 노골적인 이야기에 이사회에 참석했던 박씨 일가 소속원들은 하나같이 머쓱해진 표정을 지었다.
“방금 설명해 드린 그런 좋은 이미지를 잘 활용한다면 포에버마트가 당면한 문제점을 극복해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포에버마트 시스템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박연하 전무가 저지른 비인륜적이며 비상식적인 행동이죠. 사실 대중들은 그런 일명 ‘갑질’로 불리는 행동에 분노한 것이지 포에버마트 자체에 불만을 가진 건 아닙니다. 그러니 포에버마트가 동지마트로 넘어갔는데도 계속해서 포에버마트에 대해 비난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곳 책임자는 박연하 전무가 아니라 고현호 이사니까요.”
박호준 상무는 포에버마트를 동지그룹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원인이 박연하 전무에 있다는 사실을 콕 짚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모든 책임을 박연하 전무와 그의 아버지인 박호일 부회장에게 넘기는 게, 처음부터 그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의사타진은 해봤나?”
“네. 회장님. 마침 고현호 이사와 박호철 이사가 동갑이고 서로 꽤 친하게 지내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래서 박 이사를 통해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인수 가격만 크게 무리가 가지 않는다면 고대성 회장을 설득해 보겠다고 했답니다.”
“문제는 포에버마트를 얼마에 파느냐는 건데···. 흠···.”
박경태 회장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인수 가격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이사회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중역들 사이 여기저기서 침음성이 들려왔다. 포에버마트 매각이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다들 안타까워하는 표정들이었다.
“포에버마트 매각 말고도 한 가지 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회장님.”
“그래? 그게 뭐지?”
“박연하 전무를 그룹 차원에서 감싸는 일은 그만둬야 합니다.”
“뭣이? 이보세요. 박호준 상무! 아무리 그래도 박연자 전무는 박 상무의 조카입니다. 그런 조카를 기어이 교도소에 넣어야 속이 편하단 말이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잔인합니까!”
“그건 너무 과합니다.”
쾅쾅쾅!
“마지막 경고다. 한 번만 더 소모적인 대화를 하면 정말 이 자리에서 내쫓아 버릴 거야. 개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좋아. 박 상무. 계속 해봐. 포에버마트를 매각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연하까지 포기해야 하는 이유.”
박연하 전무에 대해 손을 떼라는 건 실형을 살도록 내버려 두라는 이야기였다. 그건 포에버마트를 매각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었다. 당연히 반발하는 사람이 생겼지만, 이미 그녀에 대해 큰 실망을 한 박경태 회장은 냉정하게 그들의 불만을 끊어버렸다.
“대중들의 분노는 이미 포에버마트를 넘어 와룡그룹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포에버마트를 다른 곳에 넘긴다면 포에버마트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사그라질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불씨는 역시 박연하 전무입니다. 포에버마트를 넘긴다고 해도 박연하 전무를 와룡그룹이 계속 비호 한다면 대중들은 어느 순간 박 전무와 우리 와룡그룹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포에버마트에서 시작된 불매 운동이 와룡그룹으로 넘어갔듯이 말입니다. 저도 박연하 전무를 놓는 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와룡그룹이 당면한 위기부터 극복하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박호준 상무는 슬픈 표정으로 박연하 전무의 일을 안타까워했다. 누가 봐도 가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걸 가지고 시비 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박 전무는 내 첫 번째 손녀딸이야. 큰 실수를 했다고 해도 감방에 보내는 건 영 내키지 않아.”
“저도 회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정말 박연하 전무를 포기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중들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뜻입니다. 포에버마트를 넘기고, 1심에서 유죄를 받는다면 국민들도 이번 사태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겁니다. 그렇게 분위기가 차분해져서 더 이상 박 전무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2심부터 최고의 로펌을 고용한다면 실형은 면할 수 있습니다.”
“흠···. 그래. 이번 일이 연하로 인해 일어난 일이니, 책임질 부분은 책임을 져야겠지. 박 상무.”
“네. 회장님.”
“포에버마트 매각 건을 포함해서 이번 사태에 대한 모든 처리는 박 상무가 책임지고 마무리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더 이상의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깔끔하게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박호일 부회장은 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번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 그 자리는 공석으로 둔다. 완전히 마무리되면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할 생각이니 다들 각오 단단히 하고 있도록.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이상!”
박경태 회장의 입에서 기다렸던 말이 나오자, 박호준 상무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시작은 늦었지만, 지금부터가 그에겐 기회였다.
***
“아, 그래? 회장님이 그런 결정을 하셨다고? 어려운 결심을 하셨네. 그래. 잘됐네. 이번 일로 박호준 상무님뿐만 아니라 너도 회장님 눈에 들었으니 앞으로 잘 될 거야. 뭐? 우리 동지보고 포에버마트를 사라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알지. 그래. 그럼. 아무 문제 없이 포에버마트를 합병할 수만 있다면야 좋지. 그렇지만 그건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잖아. 실패하면 나는 그룹에서 쫓겨나게 된다고.”
오랜만에 고현호 이사와 김학수 부장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박호철 이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고현호 이사와 통화 중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말이 오고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의 말투와 달리 웃음이 가득했다. 대충 봐도 오히려 박호철 이사가 고현호 이사에게 제발 포에버마트를 사달라고 사정하는 모양새였다.
지난 월드 베리어스 클럽(World Various Club)와의 제휴가 실패했던 터라, 과연 포에버마트 매각 건이 제대로 성사될지 솔직히 조금 걱정이 됐었다. 그런데 상대가 오히려 매달리는 형국이라니, 역시 고현호 이사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대화 내용과 다르게 여유가 넘치는 듯 코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엉뚱한 그를 보며, 나와 김학수 부장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뭐? 인수가격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흠···. 아무리 그래도 4조 원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 그렇게까지 여력이 될지 잘 모르겠다. 응? 3조 3,000억 원 정도까지 이야기가 나왔다고? 그래? 그 정도면 나도 회장님에게 이야기를 꺼내볼 수는 있지. 그런데 괜찮아? 미니멈 가격을 내게 밝혀도? 그렇지. 우린 친구지. 그래도 미안해서 그렇지. 나야 그냥 혹시나 해서 네게 이야기를 해준 거지. 그게 무슨 큰 도움이라고. 지금 당장은 대답하기는 어려워. 너도 알잖아. 우리 회장님 성격. 아무리 유리해 보여도 싫다고 하면 끝이야. 그래. 일단 이야기는 해볼게. 아···. 이번 협상 실무 책임자가 너라고? 그래. 알았어.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볼게. 응. 내일 다시 통화하자. 수고해”
한참 더 통화하고 전화기를 닫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고현호 이사의 얼굴이, 내가 볼 땐 사악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악당이 따로 없네요.”
“뭐? 야! 마 팀장아. 너 인마. 내가 이 녀석과 친해지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박호준 이 자식이 소문난 바람둥이거든. 우리 애인이 내가 박호준 상무와 요즘 어울리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나 봐. 바람피우는 거 아니냐고 얼마나 닦달을 하던지. 원래 몇 달 더 있다가 귀국할 예정이었는데, 그 소문 듣고 당장 공부 마무리 짓고 귀국한대.”
“네? 그럼 드디어 사모님을 뵙게 되는 겁니까?”
“사모님은 무슨. 그냥 형수님이라고 해.”
“네에? 그래도 그럴 수야 없죠. 어떻게 제가 형수님이라고 부릅니까.”
“괜찮아. 우리 애인이랑 동수 너랑 공적으로 얽힐 일이 뭐가 있다고. 그냥 편하게 형수님이라고 불러. 우리 애인 그런 거에는 쿨해. 안 그래도 내가 그동안 너한테 도움 많이 받았다고, 보고 싶어 하더라. 귀국할 때 제수씨에게 줄 멋진 선물도 가져온다고 그러더라. 프랑스에서도 구하기 힘든 명품 컬렉션 핸드백이래.”
“시연이한테요? 그럼 저는 요?”
“에이. 장사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이거 왜 이래. 우리 애인이 아무리 내가 아끼는 동수 너라고 해도 다른 남자에게 선물하는 꼴은 못 보거든!”
뭔가 이상한 논리인데 희한하게 납득이 갔다.
“그건 그렇죠. 저도 형수님에게 뭔가 선물을 받으면 이상할 것 같긴 해요. 그런데 박호철 이사가 뭐랍니까?”
“대충 들었을 것 아니야. 우리한테 포에버마트 팔고 싶대.”
“3조 3,000억 원에요?”
“그렇지.”
“헐. 대체 어떻게 사람을 구워삶았길래 그런 것까지 알려준대요?”
지금 포에버마트 가치가 13조 원 정도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와룡그룹이 포에버마트에 가지고 있는 지분이 35%. 대략 3조 7,000억 원 정도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 3조 3,000억 원까지 생각한다는 건 자신들의 가치를 11조 원까지 내려 잡았다는 의미였다. 단위가 ‘조’까 올라가서 실감이 나지 않지만, 4,000억 원은 어마어마한 차이다.
우리가 포에버마트를 인수하면 충분히 정상화시킬 수 있다. 사실 땅콩 스캔들이 일어나기 전 가치를 생각하고, 기존 동지마트 가치까지 고려하면 가치는 17조 원 이상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도 크게 인수가격을 깎을 생각이 없었다. 괜히 인수가격 논란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면 그때는 정말 닭 쫓는 개 신세가 된다. 그래서 어차피 손해 보지도 않을 거 안전하게 가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와룡그룹에서 알아서 저렇게 최소 가격을 알려주고 협상을 시작하는 꼴이니, 우리 입장에서 이건 누워서 떡 먹기, 땅 짚고 헤엄치기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그러면서도 오히려 상대방이 더 저자세다. 역시 고현호 이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별거 없었어. 그냥 조용히 이야기만 들어줬어. 사실 재벌 2세들은 다들 제 잘난 맛에 살거든. 그러니 어떻게든 자기 자랑을 하려고 하지 남의 이야기를 듣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 가끔 추임새나 넣어주면서 칭찬만 조금 해주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어.”
“에이. 그럼 이 세상의 재벌 2세들은 전부 호구가 됐게요?”
“하하. 물론 같은 재벌 2세끼리 그래야 통하지. 뭣도 모르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친한척하면 ‘이 자식이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거야.’라고 하면서 오히려 경계만 할걸?”
“그렇다고 해도 대단하십니다. 이제 회장님 재가만 받으면 정말 포에버마트가 우리 손에 넘어오는 건가요?”
“그래도 완전히 사인하기 전에는 안심하지 말자고. 방심은 금물이야. 참! 마 팀장 너는 이번에 회장님 뵈러 갈 때 같이 들어가자.”
“네에? 아니 왜요? 저는 그냥 빼주시면 안 될까요?”
“어허. 그럴 순 없지. 특별히 회장님이 직접 ‘대우’라는 꼬리표도 떼 주셨는데 감사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어?”
“이사님. 안 가면 안 될까요?”
“안 돼. 마 팀장 네가 회장님을 뵈러 간다는 건 대외적으로도 중요해. 그러니까 잔소리 말고 내일 아침 출근할 땐 최대한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출근해. 알았어?”
“네. 이사님.”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천둥벌거숭이처럼 굴어도 우리 회장님은 무섭다. 많이 만나 본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차가우면서도 무심한 눈빛을 보면 온몸이 발가벗겨진 것처럼 움츠러든다. 꼭 고양이 앞에 쥐가 된 느낌이 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게 직장인의 비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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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추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