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2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회장실에서 나와 동지마트 본사로 이동 중 고현호 이사에게 물었다.
“뭐가?”
“회장님에게 왜 그렇게 강하게 나가셨습니까? 아무리 이사님 아버지라고 해도 회장님 존재감이 어마무시하잖아요.”
“존재감이 아무리 어마무시해도 아버진데 뭐···. 라고 하기에는 솔직히 나도 엄청나게 떨렸어. 만지작거리던 찻잔을 집어 던지시지는 않을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
“그러게요. 이사님이 조마조마했으면, 저는 어땠겠습니까? 아주 안절부절, 속이 타서 뜨거운 찻물을 한 번에 털어 넣고 싶었다니까요.”
“그냥 아버지 앞에서 호기를 한번 부려보고 싶었어. 항상 소심하다고 구박을 많이 받았거든. 개인적으로 아버지같은 경영스타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어쩌겠어. 결국 아버지 눈에 들어야 동지그룹 후계자가 되는 거 아니겠어? 원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지. 그리고 너도 눈도장을 제대로 받아야지.”
“윽···. 회장님 눈도장은 사양하고 싶은데요.”
“이미 늦었어. 솔직히 따로 눈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었더라. 윤 스포츠센터 예비 사위라는 것까지 기억하고 계신 걸 보니 말이야. 그런데 마 팀장은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무섭다면서 무슨 깡으로 내가 차기 총수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한 거야?”
“그게···. 솔직히 좀 욱하긴 했습니다. 당연히 처가 덕을 보고 살 것처럼 말씀하셔서. 그런데 지금은 후회가 좀 되네요. 괜히 미운털이 박힌 건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고요.”
“괜찮아. 우리 아버지 솔직히 마초 기질이 강해서 그런 모습을 오히려 믿음직스럽다고 좋아하시니까. 그래서 나도 아까 호기를 부린 거고. 겉으로 내색은 안 하셨어도, 내심 흐뭇해 하셨을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안다. 오늘 일로 눈도장 하나는 아주 제대로 찍었다. 앞으로 귀찮은 일이 종종 생길 것 같다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포에버마트 인수 준비에 들어가는 건가요?”
“그래야지. 인수준비위원회부터 만들어서 시작해야지. 준비됐어?”
“뭐가요?”
“인수준비위원회는 마 팀장이 이끌어야지.”
“말도 안 됩니다. 이사님.”
생각지도 못한 고현호 이사의 말에 나는 펄쩍 뛰며 거절했다.
“뭐가 말이 안 돼?”
“인수준비위원회는 보통 이사급 이상의 중역이 위원장을 맡는 거죠.”
“그건 내가 하면 되고, 마 팀장은 실무 책임자를 하면 되잖아.”
“제가 알기로 실무 책임자도 최소 차장급 인사가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차장하면 되겠네.”
“네?”
“인수준비위원장에게 주어진 권한 중 가장 막강한 권한이 인사권이야. 더군다나 본사 직원이 아닌 이상 승진에 자유롭잖아. 팀장에서 차장 단다고 뭐라고할 사람 없어. 동지마트에 내려왔을 때 부지런히 승진해둬야지. 그래야 나중에 중역이 돼서 진짜 내 오른팔이든 왼팔이든 될 거 아니야.”
달콤한 말이었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빨랐다. 지금도 이미 과분한 승진가도를 달리고 있다. 서른하나에 그룹 본사 과장급이 된 나다. 그런데 동지마트 차장, 즉 본사 팀장급으로 승진한다면 분명 이리저리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고정호 전무조차 자신의 측근을 승진시키기 위해 무리해서 나를 밀어내고 권희태 과장을 집어넣었을까? 제대로 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점에서 나의 차장 승진은 명분이 부족했다. 포에버마트를 완전히 인수한다면 모를까 지금은 일러도 너무 일렀다.
승진은 좋지만, 너무 주목받는 건 곤란하다. 그럴수록 적만 늘어나 내 삶만 고달파 질 뿐이다.
“참아주세요. 이사님. 지금 우리팀 역량으로는 포에버마트를 인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다들 너무 햇병아리예요. 좀 더 노련한 인물들의 보강이 필요합니다. 실무 책임자도 저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으로 해야죠.”
“죽 쒀서 개 줄일 있어? 누가 그렇게 되면 마 팀장보다 실무 책임자가 더 높은 근무 평가를 받을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네. 이사님이 아끼는 사람 중에 승진이 필요하다 싶은 분을 끌어오시죠.”
“없어. 차장급 승진이 필요한 사람은.”
“그럼 김학수 부장님이라도···. 실무 책임자로 인수 마무리하면 바로 이사로 승진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김 부장은 아직 안 돼. 전면에 내세울 때가 아니야. 어디 좋은 사람 없어?”
좋은 사람. 있긴 있다. 그 양반이 고현호 이사 라인으로 들어올지 말지 장담하긴 어렵지만.
“있어요. 딱 적당한 사람.”
“누군데?”
“조기훈 팀장요.”
“아···. 원래 마 팀장이 있던 팀의 팀장? 그 친구랑 마 팀장이랑 많이 친했지? 내 쪽으로 올 마음이 있을까?”
“설득해 봐야죠. 그리고 이왕이면, 권희태 과장 그 양반 제외하고 그 팀 전원을 데려오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원래 손발을 맞추던 사람들이지?”
“네. 같이 여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적이 있을 만큼 유능하기도 합니다. 그 정도 경력은 되어야지 포에버마트 인수를 실수 없이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겁니다.”
필요한 인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를 밀어내고 대신 들어간 권희태 과장과 배후인 고정호 전무에게 ‘빅엿’을 먹이고 싶다는 심술도 같이 작용했다.
그동안 D&Y 피트니스 센터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인원을 전부 빼버리면 권희태 과장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포에버마트 인수가 마무리될 즘, 필리핀 진출에 지지부진하다는 이유로 권 과장을 솎아내버리고 우리 팀원 전체가 그대로 중국 시장에 진출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시나리오.
필리핀 시장 진출 실패는 전적으로 권희태 과장의 몫이 된다. 고정호 전무가 무리해서 그를 보호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거의 희박한 확률에 가깝다. 고현호 이사처럼 자기 사람을 위해 기꺼이 호랑이 굴에 뛰어들어가는 사람이 많았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아졌을 것이다.
어쩌면 권희태 과장은 나를 대신해 지리산 연수원으로 발령 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의 자리는 함부로 탐하는 게 아니다.
지리산 발령을 받는 권 과장이라니···. 흐흐흐. 생각만 해도 통쾌하다.
“그래 그건 마 팀장이 알아서 해. 나는 어차피 실무 책임자를 마 팀장으로 생각했으니까 사람을 데려와서 쓰는 것도 마음대로.”
“감사합니다. 이사님. 분명히 이사님에게도 도움이 되는 사람들일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도롱뇽을 살리자.’ 따위의 엉터리 시위를 하는 건 곤란해. 알지?”
“헉! 알고 계셨습니까? 정지영 대리가 좀 사고뭉치긴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설마 또 윗도리를 벗을 일이야 생기겠습니까.”
***
“이야! 마 팀장. 이게 얼마 만이야. 소식은 자주 듣고 있어. 요즘 동지마트에서 승승장구한다면서? 그것참. 어리버리 햇병아리 신입일 때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동지그룹에서 제일 핫한 사람이 되다니 사람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축하해.”
고현호 이사의 허락을 받자마자 나는 곧바로 조기훈 팀장에게 연락을 해 약속을 잡았다. 최근 서로 너무 바빠 얼굴을 보기는커녕 전화 통화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그동안 일이 힘들었는지 많이 야여 보였다.
“에이. 팀장님. 그냥 ‘동수야’라고 하세요. 그리고 승승장구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나아졌다면 그건 전부 팀장님 덕분입니다. 솔직히 팀장님 아니었으면 애저녁에 회사를 그만뒀을 거니까요.”
“그냥 네가 운이 안 좋았던 거지. 결국은 어딜 가나 성공했을 거야. 그러니 어울리지도 않는 겸손은 그만 떠는 게 어때?”
“하하하. 역시 팀장님은 저를 너무 잘 아신다니까요. 그런데 일이 많이 힘드세요? 얼굴이 많이 야였어요.”
“네가 봐도 그렇지? 아···. 복스러우면서도 통통한 뺨이 내 동안의 비결이었는데, 권희태 망할 놈의 자식 때문에 10년은 더 늙어버렸어. 젠장!”
“권희태 과장이 말썽을 많이 부리나요?”
“말해 뭐하냐. 아주 상전이 따로 없다. 우리 방식이 전부 구닥다리라면서 자기 방식으로 전부 바꾸려고 하고, 팀웍 따위는 개나 줘버렸는지 독불장군이 따로 없이 행동해. 나는 그나마 그놈 상전이니까 괜찮지, 다른 팀원들은 완전히 하인 취급이야. 미친놈.”
“김수현 과장에게도 그래요?”
“어쩌겠냐. 고정호 전무 라인 아니냐. 더러워도 참아야지. 아무튼 권희태 그 망종 때문에 요즘 팀 분위기 말도 아니다.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나도 라인 하나 잡든지 해야지. 아오!”
낙하산처럼 갑자기 끼어들어온 권희태 과장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는지, 조기훈 팀장은 내가 따라주는 족족 소주를 연거푸 다섯 잔을 마셨다.
“팀장님. 아무리 열 받아도 안주는 좀 먹으면서 드세요. 속 버려요.”
“네가 직접 안 겪어 봐서 그래. 진짜 속에서 천불이 난다니까. 서울대면 다야. 나도 학력고사 몇 문제 더 맞췄으면 서울대 갔다 이거야. 고정호 전무가 자기 대학 후배라고 감싸는 거 보면···. 어휴. 됐다. 여기서 그 이야길 해서 뭐하냐. 술이나 마시자.”
“그런데 팀장님. 팀장님은 학력고사 세대셨어요? 전 수능세댄데.”
“뭐? 이 자식이! 그래! 나 늙었다. 이제 너까지 나 늙었다고 구박하는 거냐?”
“하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팀장님. 권희태 과장이 고정호 전무 줄을 타고 목에 힘주는 게 많이 아니꼬우세요?”
“당연하지.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입이 아플 지경이야.”
“그럼 팀장님도 라인 하나 만드세요.”
난 속상해하는 조기훈 팀장을 보면서 은근히 내 속내를 드러냈다. 원래 이 양반은 누구 라인을 타기 싫어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권희태 과장 때문에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았다.
“뭐? 누구? 설마 고현호 이사?”
“네.”
“요즘 너랑 같이 동지마트 살리는 거 보면 허수아비는 아닌 것 같지만, 지금에 와서 후계자 경쟁에 끼어드는 건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설마 제가 팀장님한테 죽을 자리에 오라고 하겠어요? 조만간 출발선이 같아지는 날이 오게 됩니다. 자세한 건 팀장님이 제 제안을 받아들여야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래도 후계자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합니다. 어떠세요?”
“진짜? 동수야. 그거 거짓말 아니지?”
============================ 작품 후기 ============================
새로운 인물들을 추가하는 것보다 예전 인물들을 데려오는 게 낫겠죠?
동수팀은 이제 곧 완전체가 됩니다. 혹시 폭유 정지영 대리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철거를 막기 위해 상의를 벗어던졌던 문제적 그녀!!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