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3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네. 팀장님 속여서 뭐하게요.”
“그렇지? 우리 집 재산이 많아 사기를 치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고현호 이사 라인에 들어갈 수 있는 거냐?”
예전 같으면 귀찮다고 싫다고 할 양반인데, 반응이 꽤 긍정적이다. 눈까지 반짝였다. 갑자기 팀에서 진상을 부렸을 권희태 과장이 고맙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팀장님도 제 소문은 들으셨을 것 아닙니까?”
조기훈 팀장은 좋은 성격 덕분에 인맥이 굉장히 넓다. 그 덕분에 소문 또한 누구보다 빠른 편이다. 가끔 이상한 음모론과 연결하는 바람에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면 때문에 사람들을 그를 굉장히 편하게 생각한다. 큰 도움이 안 될진 몰라도, 고현호 라인에 조기훈 팀장이 들어온다는 건 중립을 지키고 있는 본사 직원들에게 꽤 큰 영향을 줄건 분명하다.
“무슨 소문? 동수 네가 고현호 이사 오른팔인지 왼팔인지 아무튼 최측근이라는 소문? 설마 그거 그냥 뜬 소문 아니었어?”
“최측근인지는 저도 모르겠고, 측근이라고 할 수는 있죠.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민망하지만, 상당히 신임받고 있습니다. 에헴.”
“젠장!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사실 다들 확실하다고 하는데, 나는 절대 아니라고 했거든. 내가 너를 잘 아는데 절대 그런 위험부담이 있고, 귀찮은 일을 할 녀석이 아니라고. 그래서 난 그냥 헛소문이라고 생각하고 안 믿었지.”
그럴만하다. 고정호 전무가 나를 지리산 연수원으로 발령내는데 개입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빨리 고현호 이사 측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저도 팀장님과 비슷한 일을 겪었거든요. 아무리 중립을 지키고 싶어도 다른 사람 눈에는 똑같이 적으로 보인다는 걸 제가 몰랐습니다.”
“그래. 맞아. 나도 권희태 과장 덕분에 여실히 느끼고 있다. 다들 흑백논리야. 절대 회색은 인정하지 않아. 오히려 뒷배가 없다고 더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럼 같이 일하시는 겁니다?”
“흠···. 그래 까짓것. 인생 뭐 있나. 가끔은 모험도 걸어봐야지. 뭔지 모르겠지만 나도 고현호 이사님 라인 한 번 타보련다.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잠깐 고민하다 제안을 수락하는 조기훈 팀장의 얼굴은 내가 봐도 후련해 보였다.
“포에버마트 인수준비위원회 실무 책임자가 되시면 됩니다.”
“뭐? 나··· 나보고 뭘 하라고?”
“포에버마트 인수준비위원회 실무 책임자입니다.”
“설마···. 아니지?”
“뭐가요?”
“에이. 아닐 거야. 아무리 그래도 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블록버스터를 찍을 리가 없지. 안 그래?”
“뭘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뭘 말하는 건지 대충 알 것 같은데, 솔직히 나야말로 설마 싶었다.
“난 또 뭐라고. 포에버마트 인수가 거의 확정된 게 아니라 혹시 모르니 인수전에 뛰어들어보자 그런 거지? 난 순간 고현호 이사님이랑 너랑 작당해서 땅콩 스캔들을 일으킨 건 아닐까 의심했다니까. 아휴···. 나도 정말 주책이야. 음모론을 좋아하다 보니 진짜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게 되는 거 있지. 후후후.”
“······”
“무··· 뭐야? 왜 말이 없어? 서··· 설마 네 짓이야?”
“콜록. 콜록.”
“와···. 말도 안 돼. 마동수. 이 녀석!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이다니 너 진짜 멋진 놈이구나. 이 또라이 같은 녀석! 하하하.”
“대체 뭘 보고 그런 상상을 하신 거예요?”
조기훈 팀장이 생각해냈다는 건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순간 겁도 났다.
“그냥. 왠지 땅콩 스캔들 흐름이 부자연스러웠거든.”
“어떤 점에서요?”
“와룡그룹이 어떤 곳이냐. 일제 강점기, 6·25를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의 엄청난 굴곡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꿋꿋하게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 중 한 곳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곳이 와룡그룹이야. 권불십년이라고 했어. 하지만 와룡그룹에게는 그 말이 통하지 않았지. 그게 바로 와룡그룹의 진정한 저력이야. 어떤 부침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그건 다른 어떤 대기업보다 정치권이나 언론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 그런 곳이 언론에 집중포화를 받는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거기다 와룡그룹이 대응책을 내놓을 때마다 동영상이든 인터뷰든 적절한 뭔가가 튀어나와, 어렵게 준비한 대책들을 전부 빈 깡통처럼 쓸모없게 만들었잖아. 상당히 조직적이었다고. 누군가가 일부러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와룡그룹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였다니까. 그게 계속 의문이었어.”
“그래도 그걸 저랑 연관시키는 건 좀···.”
“그렇지. 무리가 있지. 사실 혼자 이상한 망상을 하긴 했어. 와룡그룹이 흔들리면 가장 이득을 보는 곳. 아니면 포에버마트가 흔들리면 가장 이득을 보는 곳.”
“그럼 우리가 아니라 엘그룹이 아닐까요?”
“그래. 누구나 한 번쯤은 엘그룹을 의심했을 거야.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꼬은 거지. 그 누군가의 목적이 처음부터 포에버마트였다고 가정해봤어. 3-마트는 독과점법 때문에 포에버마트를 인수하지 못하고, 와룡그룹이 엘그룹에 포에버마트를 팔 가능성은 거의 없어. 결국, 대박마트와 동지마트가 가장 유력할 수밖에. 유통에 전혀 관심이 없는 기업도 포에버마트만 인수한다면 단숨에 대형할인마트 시장의 1/4을 차지하는 셈이니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다른 대기업이 없어. 그리고 내가 알기로 대박마트 쪽 모기업이 요즘 엉뚱한 일을 벌이다가 큰 낭패를 보는 사람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여력이 없어.”
“결국, 남는 곳은 동지마트네요.”
“그렇긴 한데, 솔직히 그냥 혼자만의 상상이었지. 아무리 또라이라도 땅콩 스캔들 같은 엄청난 사고를 일부러 일으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네가 좀 전에 포에버마트 인수위원회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런데 포에버마트 인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설마’라는 생각이 퍼뜩 드는 거야.”
“제가 제 무덤을 판 꼴이네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포에버마트를 인수할 가능성은 있는 거야?”
“그럼요. 90%? 그래서 팀장님 보고 실무 책임자를 하라고 한 겁니다. 실무 책임자로서 포에버마트 인수를 완수하면 큰 공을 세우는 거잖아요.”
“네 머리에서 나온 이야긴데, 내가 왜?”
“이제 같은 편이니 굳이 상관없잖아요. 같은 편이 된 기념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흠···. 포에버마트 인수라···. 만약 동지마트가 포에버마트를 인수하게 되면, 고현호 이사는 정말 다른 두 형과 같은 출발 선상에 설 수 있겠는걸? 아까 동수 네가 한 말이 그 말이었어?”
“네. 잘 선택했다 싶으시죠?”
“그렇긴 한데, 안 본 사이에 네가 상상 이상의 또라이로 변한 것 같아 살짝 걱정이 되긴 한다. 포에버마트를 인수한 다음에는? 그다음 계획도 있어?”
“물론이죠. 일단 포에버마트를 안전하게 인수하고, 그다음에는···.”
***
“아차! 윤 스포츠센터에 먼저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고정호 전무와 권희태 과장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다는 생각에 너무 들떠 있었나 보다.
조기훈 팀장과 술을 마시며 밤새도록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 이번 일에 대해 하나하나 점검하다가 윤 사장님을 깜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의로 필리핀 진출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일인데, 조기훈 팀장을 만나기 전에 당연히 윤 스포츠센터를 방문해 자세한 설명을 해야 했다.
단순한 파트너십 관계라면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다. 좀 돌아가더라도 대신 중국 시장에서 대박을 터트리면 크게 미안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윤 스포츠센터는 내게 예비 처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아무리 공과 사를 분명히 한다고 해도 윤 사장님을 모른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순서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곧장 윤 스포츠센터로 넘어갔다.
“어쩐 일이야?”
“하하하. 아버님 뵌 지가 너무 오래돼서 보고 싶어서 왔죠.”
“뭐? 나 방금 팔에 소름 돋았어. 갑자기 그런 말도 안 되는 느끼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뭐, 내게 죄라도 지었어?”
“서운하게 왜 이러세요. 진짜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야 이놈아! 갑자기 찾아와서 ‘보고 싶어 왔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아? 약 팔지 말고 솔직히 털어놓지?”
“아··· 진짜. 제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시고···.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위지. 요즘 바쁘다고 얼굴 보기도 힘든 녀석이, 퇴근 시간도 아닌데 나를 찾아왔으면 볼일이 있는 거지. 당연한 거 아니야?”
“에이. 그동안 제가 바빠서 놀러 안 왔다고 서운하셨군요.”
시연이 작은어머니 사건 이후 윤 사장님과는 더욱 친해졌다. 예전에도 친했지만, 뭔가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누가 보면 사이 좋은 삼촌과 조카 느낌?
누가 보면 예비 장인과 사위답지 않아 버릇없다고 느껴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윤 사장님은 이런 관계를 꽤 즐기시는 눈치였다. 그래서 좀 더 오버해서 살갑게 굴고 있다.
“뭐? 지금 나보고 삐쳤다고 말하는 거야? 이 녀석이 점점.”
“사실 아버님 뵈러 자주 오고 싶었는데 진짜 일이 많았거든요. 땅콩 스캔들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많아서 말이죠.”
“땅콩 스캔들이랑 동수 네가 바쁜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엄청나게 상관이 많았죠. 이건 정말 비밀인데요. 그래도 아버님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릴게요. 그게 ······”
나는 그때부터 땅콩 스캔들이 일어난 배경과 나의 활약상(?)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어디 가서 옮기실 분도 아니고 필리핀 프로젝트 담당하고 있는 팀원들을 빼내려면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무서운 놈.”
모든 설명을 마치자 윤 사장님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한마디 하셨다.
“하하하.”
“이 녀석아!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웃음이 나와? 응? 그러다 잘못되면 네 인생까지 종 칠 수 있는 일이야. 네 녀석 잘못되는 거야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만, 너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 시연이 생각은 안 해?”
말씀은 저렇게 해도, 말투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어제 조기훈 팀장에게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진심으로 나의 성공을 기뻐해 줬다. 반면 윤 사장님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절대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수 없도록 은밀하고 조용히 일을 진행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시연이를 생각해서 더욱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흠···. 누가 너를 걱정했다고 그래. 시연이 때문에 그런 거지. 하필이면 말썽꾸러기 같은 녀석을 좋아해서. 쯧쯧. 물리고 싶어도, 책에다가 ‘나 임자 있는 사람.’이라고 대서특필을 했으니 물릴 수도 없고.”
“그러게요. 며칠 후면 시연이가 쓴 로맨스 소설도 나오는 거 아시죠? 게다가 내년 초에는 그 책으로 드라마까지 제작되고요. 이제 시연이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제게 시집오는 수밖에요. 하하하.”
시연이의 로맨스 소설, ‘여우 같은 남자, 강아지 같은 여자’가 일주일 후에 출판된다. 전작인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가 워낙 성공을 거뒀고 동지마트 광고 모델을 하면서 연예인급으로 인지도가 올라간 덕분에 소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용광로처럼 뜨겁게 끓어 올랐다.
여기서 드라마까지 성공을 거둔다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우리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알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당연히 그럴 리 없겠지만, 시연이와 나는 이제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고 싶어도 눈을 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얄미운 녀석 같으니라고. 너 혹시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이요?”
“여우 같은 남자, 강아지 같은 여자를 드라마로 제작하려는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
“뭐 때문에요?”
“시연이 보고 혹시 여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느냐고 그러더라.‘
“네? 그게 말이 됩니까?”
“이놈아! 말이 안 될 건 또 뭐 있어. 연기 안 되는 가수들도 주인공을 하는 세상이잖아. 게다가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시연이 정도 외모면 탤런트 하고 남지. 안 그래?”
“그거야 그렇죠. 그래도 굳이 연예인을 시킬 필요는 없죠.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거라면 모를까, 여자 연예인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데요.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대중들 관심에 멀어질까 항상 노심초사해야 하고.”
“그걸 잘 아는 녀석이 TV CF에 출연시켰어?”
“그냥 아나운서가 되기 전에 경험 삼아 해보라는 거였죠. 저도 이렇게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고요.”
“알게 뭐야! 땅콩 스캔들도 네 녀석 짓이라면서? 그런 일도 태연하게 벌이는 녀석이, CF 대박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물론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걸 기대하지 않았으면 CF에 출연시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초대박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물론 땅콩 스캔들도 이렇게 엄청난 파장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의도는 했는데, 의도보다 더한 효과에 나도 당황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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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