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8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두 번째 협상을 하기 전 나는 와룡그룹의 서유남 부장을 찾아가 어제의 무례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런데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잠깐 만난 그의 모습은 어제와 달리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제는 열성을 가진 반짝이는 눈빛이었다면, 바라보기 미안할 정도로 무기력해 보였다.
“어제는 제가 정말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아닙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어차피 서로 회사를 위하자고 하는 행동들인데, 이해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로 꽁해서 협상을 제대로 못 하면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는 우리가 불리하겠죠. 그러니 시간 끌지 말고 빨리빨리 협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빨리 협상을 진행하자고 말하는 그의 말에 열정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키진 않지만 마지 못해 무대에 억지로 끌려 나와 책 읽듯 대사를 읊는 의욕 없는 배우와 닮아 있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딱히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습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인수해서 서둘러 포에버마트를 정상화하는 게 훨씬 유리합니다. 제가 어제 말씀 드린 땅콩 스캔들이라는 말에 예민해 하셔서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아···.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어제는 공식적인 자리고 지금은 사석이니까요. 언론에서 다들 땅콩땅콩 하는데 우리만 예민하게 구는 것도 사실 웃긴 일이죠.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린다고 가려지나요?”
서유남 부장은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이야기했다.
“네. 어쨌든 하루빨리 수습해서 땅콩 스캔들하면 포에버마트를 떠올리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죠.”
“워낙 전국적으로 떠들썩한 일이라 쉽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그게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애초에 포에버마트 인수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거니까요.”
“자신감이 넘치는군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말투에서 확신이 느껴져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건 전부 고현호 이사님 덕분입니다. 그분은 제가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항상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서포트 해주시거든요. 그런 신뢰를 받는 데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 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생각합니다.”
“고현호 이사가 그런 스타일이십니까?”
“네. 다른 재벌 2세와 달리 꽤 인간적인 면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을 따르는 것도 그런 매력 때문이죠.”
“허허허. 부럽습니다. 우리 와룡그룹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음··· 그건 좀 힘들겠군요. 그랬으면 애초에 땅콩 스캔들 따위가 일어나지도 않았겠죠. 이런! 제가 손님을 앞에 두고 못난 모습을 보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마 팀장님. 어제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번 협상은 아마도 동지그룹이 원하는 대로 될 것 같습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이따 협상장에서 뵙죠.”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뭐라도 위로의 말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그 눈이 너무 슬퍼보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대기실에서 나와 우리 팀원들 있는 반대편 대기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것저것 꼼수를 부려 이득을 취하려고 노력했는데, 너무 쉽게 결과를 얻게 된 것 같아 조금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의 슬픈 눈동자를 보며 내가 잠시 감성적으로 변해서 그런 것 같았다.
Rrrr
“네. 이사님.”
뭔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 쪽 대기실로 향해는데 고현호 이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그래. 마 팀장. 너 어디야?“
“아. 서유남 부장을 잠깐 만났습니다. 어제 제가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할 것 같아서요.”
“그래? 잘했어. 나중에 또 어떤 관계로 만날지 모르는 데 남은 앙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확실하게 털어버리는 게 좋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그런데 아직 소식 못 들었지?”
“뭘 말씀입니까?”
- 그때 우리가 일부러 터트린 용역비리 사건 있잖아.
“네. 그거 덕분에 엘마트와 포에버마트는 타격을 입고, 이사님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그걸 잊을 순 없죠. 그런데 용역비리 사건이 왜요?”
곳곳이 썩어빠진 동지마트를 쇄신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였던 일 중 하나가 용역비리 사건이었다. 용역회사와 인사책임자가 짜고 비정규직 직원 수입의 일부를 갈취해가는 일종의 착취행위가 동지마트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나도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썩은 부위는 깨끗하게 도려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예 우리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 버렸다. 우리 비리만 드러나면 모든 비난이 동지마트에 쏠린다는 생각에 엘마트와 포에버마트까지 같이 걸고넘어졌고, 그 꼼수가 제대로 통해 대부분의 비난은 다른 두 마트가 떠안게 되었다.
미리 사건을 감지하고 자비를 털어 피해자를 보상한 고현호 이사의 인기가 올라간 건 덤이었다.
그런데 이미 끝난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용역비리 이야기가 다시 나오자 의아했다.
- 그 사건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나 봐. 용역 비리로 회사에서 쫓겨났던 인사부장이 자살시도를 했대.
“네? 자살시도요?”
- 그렇게 놀라진 마. 안 죽었으니까. 다행히 자살 시도를 하는 도중에 인근 주민에게 발각됐나 봐. 큰일이 나기 전에 구조돼서 생명엔 지장이 없다고 그러더라.
“휴···. 다행이네요.”
내가 벌인 일로 이익을 얻으려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한다. 그런데 그 사실이 무서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냥 혼자 산 들어가 사는 게 맞다. 그 사실을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벌인 일로 인해 자살 시도를 한 사람이 나왔다는 건 마음에 좀 걸렸다.
- 그래. 다행이지. 혹시나 말하는데 괜히 양심의 가책같은 거 느끼지 마. 수천 명의 비정규직 직원들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던 기생충이나 거머리같은 인간이었으니까. 우린 할 일을 한 거야.
“네. 그렇긴 한데, 사람이 죽으려고 시도했다고 하니 마음이 편치는 않네요. 그런데 그 소식을 이사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 어떻게 알긴. 그 소식으로 지금 인터넷이 온통 난리야.
“자살 시도로 인터넷이 난리라고요? 왜요?”
자살 시도를 했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 시도가 일어나는 나라에서 자살 미수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긴 힘들다.
- 포에버마트는 인사부장 한 사람이 저지른 일로 용역 비리사건이 마무리됐었잖아.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봐. 포에버마트 중역들도 인사부장에게 꽤 많은 뒷돈을 받았는데, 와룡그룹과 검찰이 짜고 그 사실을 덮어버렸대. 인사부장이 그렇게 억울하다가 하소연을 해도 검찰에서 들어주지 않으니까 상납장부를 언론사에 뿌리고 자살 시도를 한 거지.
“미친놈. 억울해서 언론사에 장부를 뿌릴 깡으로 살지, 자살은 왜 시도했대요.”
- 상황이 많이 안 좋았나 봐. 그동안 용역회사로부터 받은 돈은 전부 회수 조처되고 회사에서는 잘렸지. 그런 데다가 책임지고 나가면 뒤를 봐주겠다고 한 중역들에게 뒤통수까지 얻어맞아서 배신감이 컸었다더라.
“그러면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살아야지. 나 원 참. 어···! 그럼 뭡니까. 땅콩 스캔들에 용역비리까지 겹쳤으니 이거 장난 아니겠는데요?”
땅콩 스캔들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용역비리 사건이 터진 건 불난 집에 기름을 들어부은 것과 다를 바 없다.
- 그래. 그래서 내가 전화를 한 거야. 안 그래도 여론이 안 좋은 포에버마트였는데, 인사부장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장부가 뇌관이 된 거지. ‘사회약자모임’이랑 ‘비정규직연합’도 불매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분위기야.
단순히 용역비리 사건이었다면 그 화살이 와룡그룹으로 향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게다가 고현호 이사가 말한 두 시민단체는 행동력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조금은 과격한 강성 단체다. 그런 곳까지 불매 운동에 가담한다면···.
윽! 상상만으로도 골치가 지끈거린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겁니까? 말아야 합니까? 협상하는 입장에서는 희소식인데, 뒷수습이 어려워질 것 같아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요.”
- 나도 그게 감이 안 잡혀서 그래. 어쩌면 좋을까?
“휴···. 마음같아서는 배짱을 부리고 싶은데, 시간을 끌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판이 커지면 폭탄만 떠안은 꼴이 되겠죠?”
- 그렇지. 괜히 잘못 인수했다가 와룡그룹으로 향하는 원망이 우리 동지그룹으로 바뀔 수가 있어.
“저 같으면 일단 한 번쯤은 배짱을 부려 보겠습니다.”
- 어떻게?
“그냥 인수단을 철수시킨다고 통보만 해보시면 어떨까요? ‘예기치 못한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진다면 우리도 포에버마트 인수를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일단 회의를 하고 난 후, 그 결과에 따라 협상을 할지 말지 통보하겠다.’ 이렇게요.”
- 한번 마음을 떠보자 이거지?
“네. 저쪽에서도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니 못해도 천억 원 정도는 더 깎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돈으로 용역비리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주면, 이사님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도 있겠죠.”
- 뿐만 아니라 땅콩 스캔들로 나빠진 포에버마트의 이미지를 희석시킬 수도 있고?
이젠 척하면 척이다.
“그렇죠. 완전히 희석시키려면 다른 작업들도 같이 병행해야겠지만, 피해자 보상 건을 잘 이용하면 원래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 오케이. 그럼 그렇게 하자고. 일단 마 팀장은 팀원들하고 대기하고 있어. 내가 와룡그룹 대표에게 협상 중단을 통보하도록 하지. 바로 철수를 할 수도 있고, 저쪽에서 저자세로 나오면 곧바로 협상 재계를 할 수도 있으니 내가 연락할 동안 함구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이사님.”
============================ 작품 후기 ============================
인수 에피소드 빨리 끝내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ㅠㅜ
내일 마무리 짓고 수습과정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는 길에 선추코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