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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303화 (303/424)

00303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야. 동수야. 김학수 부장님. 진짜 장난 아닌데? 어떻게 거기서 TV 예능을 생각할 수 있냐?”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조기훈 차장이 장난스레 물었다.

“그거야 제가 워낙 좋은 아이디를 냈으니까 그렇죠.”

“너야 뭐··· 그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런지 놀랍지 않거든. 그런데 김 부장님이랑은 처음 일해보잖아. 대단하다고 명성만 들었지 곁에서 지켜볼 일이 있었냐? 솔직히 처음에 김 부장님이 고현호 사장님 측근이라는 사실을 알고 완전 놀랐잖아. 내가 그동안 동지그룹 소식통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 명함 이제 내려놓을까 봐.”

“사실 그동안 좀 조심하긴 했죠. 그런데 이젠 소문이 나지 않겠어요? 이렇게 대놓고 동지마트에 들락거리기 시작했으니까.”

처음 김학수 부장과 함께 일할 때는 될 수 있으면 회사가 아닌 식당 같이 다른 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고현호 사장 사람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늦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포에버마트를 인수하고, 그 공으로 고현호 사장은 그룹 상무직도 겸임하게 됐다. 자신감이 생기자 예전처럼 눈치보며 조심할 필요가 없어졌다.

“금방 소문이 나겠지. 얼마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는 김학수 부장님이 고현호 사장님 측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더 유리하지. 너 같은 쭉정이가 붙어 있는 것보다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김 부장님이 곁에 있다는 게 훨씬 플러스 요인이 될 거니까.”

“기분 나쁜 말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오직 김 부장님 한 분 때문에 우리 쪽으로 가담하는 사람이 생길 테니까요.”

“그런데 두 사람이 같이 일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서로 바라보는 눈빛이 장난 아니던데?”

“눈빛이 뭐가 어때서요? 설마 질투하시는 건가요?”

“그래 인마! 질투다. 너랑 나랑 같이 일한 게 몇 년인데, 이렇게 배신을 때릴 수 있어? 나 서운 해.”

조기훈 차장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실실 웃었다.

“원래 사랑은 움직이는 겁니다.”

“뭐? 이 자식이! 야! 똥수! 너, 여기서 솔직하게 말해봐. 내가 좋아? 김 부장님이 좋아?”

“헐···. 이건 또 뭔가요?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유치하게 왜 이러세요?”

“유치하다니! 난 지금 심각하거든! 누구야? 여기서 한 사람 결정해. 나야? 김 부장님이야?”

“당연히 제겐···.”

“당연히 네겐?”

“시연이 뿐이죠! 노총각들은 노총각들끼리 노시죠?”

조기훈 차장이 서른여덟 살이고, 김학수 부장이 서른일곱 살이다. 둘 다 적은 나이는 아닌데, 안타깝게도 결혼을 못 했다.

“뭐? 노··· 노총각?”

“지금까지 결혼을 못 했으니 노총각이죠. 두 분 다 나이가 삼십 대 후반입니다. 이제 장가가셔야죠.”

“인마!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야!”

“네네. 그렇겠죠. 그렇다고 해둘게요.”

“이 자식이 정말. 기다려 봐. 조만간 청첩장 줄 테니까.”

“그 말씀은 청첩장을 건네면서 해도 늦지 않습니다. 청첩장 주시면 그때 가서 결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는 거 인정해드릴게요. 하하하.”

조기훈 차장과 이런저런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팀원들은 다들 정신없이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전화 상담이 덜 중요한 건 아니지만, 다들 상담에 매달려 자기 일을 못 하고 있는 건 문제였다.

그렇다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말고 자기 할 일을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켜보고 있는 내 입장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얼른 전문 상담요원들을 배치해서 업무 분업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한 달간은 요원한 일이다.

“네. 동지마트 DJ마트 사업팀 추미래입니다. 네. 은평구 응암동에 있는 응암슈퍼요. DJ마트 신청을 하고 싶어서 전화 주셨다고요? 잘 생각하셨어요. 사장님. 전화로는 자세한 설명을 하기 힘들어, 전문적으로 상담을 해줄 직원을 파견해 드리고 있습니다. 상담을 듣고 저희와 함께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편안한 마음으로 설명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낯익은 이름이 들렸다.

‘응암동에 있는 응암슈퍼.’

거기라면 나도 아는 곳이다. 내 첫사랑이 살던 응암동. 응암슈퍼는 첫 사랑이었던 그녀를 사귀면서 수백 번은 들락날락했던 곳이다.

시연이를 생각하면 가까이하지 않는 게 맞겠지만, 마음씨 착한 그곳 사장님에게 여러모로 많은 신세를 졌던 걸 생각하면 그냥 모른척할 수 없었다. 짐을 맡기는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너무 늦은 데이트로 버스가 끊겨 집에 갈 수 없었을 때 택시비를 선뜻 빌려주기도 하셨던 고마운 분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변심했을 때 낙심한 채로 길을 가는 나를 불러서 아무 말 없이 건네주시던 맥주의 맛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이미 첫사랑은 아이가 둘이나 있는 아줌마가 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 받았던 고마움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미련이 남았으면 모를까, 그냥 지나간 옛 기억일 뿐인 첫사랑 때문에 내가 받은 은혜를 모른척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지금 당장 상담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저희도 이번 프로젝트를 가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담할 수 있는 직원들을 따로 교육 중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최대한 빨리···. 잠시만요.”

“미래씨. 내가 간다고 해. 거기 나도 아는 곳이거든. 사장님이 시간이 되시면, 지금 찾아뵙겠다고 전해줘.”

“네? 팀장님요? 팀장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네. 그렇게 말씀 드릴게요. 아···. 죄송합니다. 저희 팀장님이 마침 응암동에 볼일이 있으시다고 직접 가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시간 되세요? 다행이네요. 저기··· 응암동에 있는 응암슈퍼라고 하셨죠? 팀장님이 거기 어딘지 아신다고 합니다. 아마 2시간 안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직접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설명을 듣고 꼭 저희 동지마트와 함께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마워. 미래씨.”

“아니에요. 팀장님. 그런데 정말 팀장님이 직접 설명하러 가시게요?”

내가 직접 상담을 하러 간다고 하자, 추미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응. 내가 그 집을 아는데, TV 예능에 출연한다면 첫 번째 가게로 적당해 보여. 규모가 너무 작은 구멍가게도 곤란하고, 조금은 부유한 느낌의 중형 마트도 첫 주자로는 문제가 있어. 바로 근처에 3-마트 은평점도 있으니, 대형 할인 마트를 상대로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지도 좋은 체크 포인트가 되겠지.”

“네? TV 예능에 출연을요?”

간부급 회의에서 이제 방금 결정한 사항이니, 추미래 입장에서는 금시초문일 만했다.

“응. 시범 마트를 선정해서 이전과 바뀐 모습을 TV를 통해 알릴 생각이야. 러브 하우스처럼 말이야.”

“러브 하우스요? 와···! 팀장님도 일본 만화 좋아하세요?”

“응? 일본 만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러브 하우스라면서요? 와타나베 아유의 러브 하우스 말씀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시범 마트를 러브 하우스처럼 한다는 게 좀 이상하긴 하네요.”

“뜬금없기는. 신동엽의 러브하우스 몰라?”

“아···. 신동엽의 러브하우스요. 들어본 것 같기는 해요. 워낙 어릴 때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요.”

“뭐? 그럼 요즘 미래씨 세대에서는 러브하우스하면 만화책이 먼저 떠오른단 말이야?”

“꼭 그런 건 아니겠죠. 제가 워낙 일본 만화를 좋아해서 그럴 거예요.”

“그런 거겠지?”

“그럼요. 그러니까 팀장님. 너무 낙담하진 마세요. 호호호.”

낙담하는 내 표정이 보였나 보다. 하지만 위로를 한답시고 건네는 말이 내게 그리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시연이와 동갑인 그녀. 그녀와의 사이에서 느낀 세대차이가 왠지 나와 시연이의 차이 같아 괜히 마음이 허전했다.

‘거짓말’이라는 노래 제목을 말하면 우리 세대는 GOD의 거짓말을 그리고 요즘 세대는 빅뱅의 거짓말을 먼저 떠올린다고 한다더니, 내가 그 꼴이 된 기분이었다.

“됐거든. 전혀 위로가 안 돼.”

“흑···. 시연이에게는 절대 말 안 할 테니까 용서해주세요.”

“그래? 시연이한테는 꼭 비밀로 해줘야 해?”

“그럼요. 팀장님! 약속 드릴게요.”

“좋아. 그렇다면 용서해주지. 미래씨. 나는 응암동에 들렀다가 바로 퇴근할 테니까, 퇴근 시간 되면 다들 집에 가라고 전해줘. 어제처럼 퇴근 시간 지나서까지 상담전화 받지 말고, 칼퇴근하라고. 오케이?”

“네. 팀장님. 그렇게 전할게요.”

나는 여전히 DJ마트 프로젝트 문의전화를 받느라 정신없는 다른 팀원들을 위해 전달 사항을 남겨놓고, 응암마트가 있는 은평구를 향해 차를 몰았다.

딸랑~!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랜만인데 저 기억하세요?”

“어···? 이게 누구야? 동수 아니야? 허허허. 이 녀석. 이게 얼마 만이야?”

“글쎄요. 아마 7 ~ 8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벌써 그렇게 됐나? 하기야. 네가 군대 있을 때 미정이가···.”

“헉. 사장님!”

내 이름도 기억하는 사장님이니 내 첫사랑이었던 미정이를 기억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이름을 들어서 그런지 ‘미정’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하하하. 미안, 미안해. 지나간 일인데 내가 갑자기 끄집어내서.”

“아니에요. 이미 다 지난 일인데요. 저도 그때 일은 다 잊었습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건 그때 사장님이 제게 주신 맥주 맛이에요. 죽을 만큼 목이 타서 그랬는지 그 맥주가 감로수 같았다니까요.”

“네가 웬만큼 처량해 보였어야지.”

“그냥 이유는 모르고 처량해 보여서 맥주를 건네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 예전에 둘이 사귈 때 얼마나 보기 좋았어. 그런데 네가 군대 가고, 내 기억으로 한 1년 반쯤 됐나? 미정이가 다른 남자 손을 잡고 슈퍼 앞을 지나가더라고.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네가 군복을 입고 넋이 빠진 얼굴로 걸어가는 걸 봤고. 이유를 아니까 모른척하기 어렵더라고.”

“와···. 그 옛날 일을 아직 기억하세요?”

“그럼. 난 우리 슈퍼 오는 고객들 사소한 버릇까지도 기억하는데, 두 사람 일을 잊을 리가 없지. 솔직히 난 네가 그때 그렇게 돌아가고 나서 몇 번 더 찾아올지 알았어. 그런데 어떻게 한 번을 안 오더라. 좀 아쉽긴 했어.”

“죄송해요. 이미 다른 사람이 생긴 사람 붙잡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질척거려봐야 저만 비참해지죠. 그래서 못 오겠더라고요. 사장님한텐 정말 고마웠는데, 그러고 보니 제대로 감사하다는 말도 못했네요.”

“에이. 그런 걸로 감사인사까지야. 그냥 인연이 되면 언젠가 보는 거 아니겠어? 이렇게 다시 만난 걸 보면 인연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 설마 미정이를 못 잊어서 온 건 아닐 테고.”

“하하하. 설마요. 다름이 아니라 사장님에게 외상값 갚으려고요.”

“무슨 외상값?”

“그때 마신 맥주값이요. 그거 갚으려고 왔어요.”

============================ 작품 후기 ============================

좀 뜬금없지만 제 첫사랑이 진짜 응암동에 살았습니다. ㅎㅎ

그냥 다른 동네로 할까 하다가, 지리에 익숙한 곳이라 그냥 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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