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4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맥주값? 이런··· 싱겁기는. 언제적 일인데 그걸 갚으러 와?”
“오래됐다고 해도 제겐 잊을 수 없는 맛이었거든요.”
“하하하. 그때 네가 맥주 마시던 모습은 나도 기억난다. 마치 꿀 빨아 먹는 곰처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먹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일만 아니었으면 나도 한 잔 하고 싶어지더라.”
“목이 좀 타긴 했죠. 여름이기도 했고···.”
여름이어서가 아니라 난생처음 겪는 이별에 충격이 컸었다. 지금의 나라면 그런 이별, 의연하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나 싫다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여자 따위에 충격을 받기에는 나는 너무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나는 달랐다. 세상에 여자는 그녀 하나였고, 당연한 것처럼 영원히 함께 할 거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에 품에 안겨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어린 나에겐 끔찍한 충격이었다.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애원해서라도 마음을 돌려 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그나마 남아 있던 내 마지막 자존심 덕분이었다. 자존심은 지켰지만, 쓸쓸하고 씁쓸한 뒷맛 때문인지 목이 미친 듯이 탔다.
그런 날 마신 맥주니 그 맛이 당연히 남다를 수밖에···. 그런데 처량했던 내 모습을 누군가 지켜봤다고 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의 행동은 내게 일명 이불킥(너무 민망해서 자다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고 해서)이나 마찬가지인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그래. 난 동수 네가 그렇게 맛있게 마셔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니까 외상값을 갚으러 왔다는 식의 싱거운 소리는 그만해.”
“그래도 꼭 갚고 싶어요. 사장님.”
“어허. 이 녀석이···. 이제 나이가 서른 넘었지 않아? 그럼 상대방이 건넨 호의를 계산적으로 갚으려는 게 실례라는 거 알잖아.”
“알죠. 하지만 호의에 호의로 갚는 건 실례가 아니지 않아요?”
“호의로 갚아?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너 설마 아직도 미정이랑 헤어진 거 잊지 못해서 정신이 이상해지고 그런 건 아니지?”
“사장님! 저 안 미쳤거든요!”
“그렇지? 일단 겉모습은 멀쩡해 보여. 하하하.”
우리 동지마트로 전화를 걸어 DJ마트에 대한 문의를 했다는 건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전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동훈 사장은 오랜만에 만난 친동생을 대하듯, 여전히 밝고 유쾌하게 나를 반겨줬다. 그 모습을 보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이런 긍정적인 성격의 사람이라면 DJ마트 프로젝트의 첫 번째 시범마트를 맡겨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와···. 사람을 이렇게 순식간에 보내버리시네요. 그런데 사장님. 혹시 오늘 약속 있지 않으세요?”
“있지. 약속. 동지마트랑 상담할 게 있어서 팀장인가 하는 사람이 온다고 그러더라. 어··· 그런데 그걸 동수 네가 어떻게 알아?”
“제가 여기 오기로 한 그 팀장이거든요.”
“뭐? 동수 네가? 네가 거기 팀장이라고? 동지마트면 대기업이잖아. 그런데 네가 벌써 대기업 팀장이라고? 팀장이면 보통 과장보다 높지 않아?”
“제가 좀 잘나가요. 흐흐.”
“똥수야! 이 녀석··· 축하한다. 정말, 정말 잘 됐어. 군복 입고 지나가는 사람 보면 네 생각이 나곤 했는데, 이렇게 잘 돼서 오다니 내 마음이 다 편하다.”
나의 장난스러운 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나의 성공이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뻐해 줬다.
“와···.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그럼 좋지. 너랑 나랑 든 정이 얼만데. 난 솔직히 15년 본 미정이보다, 4년밖에 못 본 네가 더 정이 가더라. 그래서 미정이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을 때, 내 동생 일처럼 속상하더라. 그래서 걔가 괜히 미워지고 그랬어.”
“에이. 그러지 마세요. 군대 2년 기다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요. 그걸 못 기다렸다고 욕먹을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녀석 참. 진짜 철 들었나 보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그럼요. 제 나이가 벌써 31살이잖아요.”
“자꾸 미정이 이야기해서 미안한데, 걔가 너 이렇게 잘나가는 거 알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할 거다.”
“왜요? 전에 듣기로 애 둘 낳고 잘 먹고 잘산다고 그러던데요. 크흠··· 아니에요.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걔가 어떻게 살든 이제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이제 일 이야기로 들어가시죠.”
“그럴까? 그런데 동수야. DJ마트라는 거 정말 가능성 있는 거 맞아? 너야 당연히 그 회사 사람이니까 좋다고 말하겠지.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좀 불안해. 실패하면 정말 거리로 나앉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거든. 나 혼자면 어떻게든 일어날 수 있는데, 가족까지 있는 입장이라 그러기도 쉽지 않아. 아까 네가 외상값 이야기했지? 인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부끄럽지만, 외상값 갚는 셈 치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솔직하게 말해주면 안 될까?”
“100% 된다고 장담하긴 어려워요. 그렇지만 제가 제 이름을 걸로 사장님에게 한 가지 약속은 드릴 수 있어요.”
“그게 뭔데?”
“다른 곳은 몰라도 응암슈퍼는 절대 망하는 일이 없도록 할게요.”
조금 전과 달리 일 이야기가 나오자, 유동훈 사장의 얼굴이 조금 불안해 보였다. 가족까지 걸린 일이니 조심스러운 건 당연했다. 함부로 장담하면 안 되지만 솔직한 그의 모습에 ‘절대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덜컥 약속해버렸다.
그렇다고 그냥 아무런 계획도 없이 똥배짱으로 약속을 한 건 아니었다. DJ마트 시범 운영의 첫 번째 주자라는 이슈와 상징성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설사 비효율적이라도 안 된다면 그룹 역량까지 동원해서라도 일단 첫 번째 프로젝트는 성공시키고 볼 생각이다.
고작 동네 슈퍼 하나 성공시키기 위해 그룹 역량까지 동원한다는 게 웃긴 일이지만, 수조 원이 투입된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에, 나도 유동훈 사장 앞에서 이런 식의 호언장담을 할 수 있었다.
“뭐? 그게 정말이야? 정말 약속할 수 있는 거야?”
“그럼요. 제가 여길 찾아온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혹시 러브하우스 보셨어요?”
“러브하우스? 예전에 신동엽이 나와서 했던 예능 프로그램을 말하는 거야? 그거라면 잘 알지. 나도 꽤 즐겨봤으니까. 그런데 그게 왜?”
“저는 여기 응암슈퍼를 러브하우스와 비슷한 포맷으로 TV에 내보낼 생각이에요. 혹시 사장님이 TV에 나오면 절대 안 되는 이유 같은 거 있으세요?”
“TV? 우리 응암슈퍼를 TV에 나오게 한다고? 나올 수만 있다면 나야 대환영이지. 그런데 네게 정말 그럴 힘이 있는 거야?”
“당연하죠.”
“동수야. 정말 믿기지 않아서 물어보는 건데, 돈이 많이 들고 그런 건 아니지?”
“사장님은 한 푼도 낼 필요가 없어요. 간판 바꾸는 거야 이미 우리가 약속한 일이고, 매장 리뉴얼도 우리 측 전문가가 무료로 새롭게 꾸밀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고 러브하우스처럼 대대적인 변신이 아니라,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향으로 리뉴얼을 할 생각이에요. 디스플레이 스페셜리스트(일명 진열 전문가)의 손길을 거쳐 효율성을 가장 먼저 고려할 거니까, 비용이 많이 들 일도 없어요.”
“휴···. 갑자기 이게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난 그냥 DJ마트가 괜찮아 보이길래 전화를 걸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TV 출연이라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 동수 너, 내게 장난치는 거 아니지? 아니면 사기라든가. 나, 진짜 돈 없다. 사기 치려면 다른 사람 알아봐 줬으면 좋겠어.”
유동훈 사장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일단 속는 셈 치고 믿어보세요. 사장님에 7년 전에 주신 맥주가 이렇게 돌아온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금전적인 요구는 절대, 한 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혹시라도 제가 돈을 요구한다면 언제든지 그만두셔도 됩니다. ”
“그래? 그럼 좋아! 까짓것! 한번 해보자. 만약 잘 안 되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되겠지.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대충 DJ마트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알아보셨죠?”
“그럼. 당연하지. 나도 여기저기서 알아보고 너희 회사에 전화를 건 거야. 프랜차이즈랑도 개념이 다르더라. 가맹을 대가로 어떤 금전적 이득도 취하지 않고, 우리나라에 있는 동네슈퍼를 단지 유통망으로만 이용하겠다는 생각. 그 생각이 정말 멋져 보였거든. 말 그대로 상생이잖아. 그렇지 않아도 3-마트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망할 자식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가게 근처에 프리데이까지 세운다고 하잖아.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네? 프리데이요? 그게 정말입니까?”
이건 나도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TV 방영을 포기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응. 너도 알지? 여기서 큰길로 쭉 나가면 초원초밥이 있잖아. 거기 건너편에 있던 낡은 건물. 거기 건물을 헐고 새로 짓고 있어. 이제 시작해서 몇 달 여유가 있긴 하겠지만, 프리데이가 들어오는 건 맞아. 동네 상권 문제 때문에 말아 많아서 쉬쉬하고 있긴 한데, 거의 기정사실이라고 보면 돼. 혹시··· 동수야. 프리데이 때문에 TV 출연을 취소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몰랐던 일이라 잠깐 당황한 것뿐이에요. 어떻게 보면 더 잘된 일일 수도 있어요.”
“더 잘된 일? 그게 왜? ”
“어차피 프리데이는 우리 DJ마트랑 부딪혀야 할 곳이에요. 그 첫 번째 충돌지역이 바로 응암동이 되겠네요. 그렇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요. 거긴 건물을 새로 짓고 인테리어까지 모두 끝낸 다음에 오픈할 거고, 우리는 여기 응암슈퍼를 리뉴얼만 하면 되잖아요. 방송 나가는 것까지 생각하면 약 3주 ~ 5주. 그럼 우리가 여길 선점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프리데이가 뒤늦게 영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거예요.”
“그럴까? 요즘 보면 프리데이도 3-마트만큼이나 잘 나가던데.”
“믿으세요. 아까도 말씀드렸죠? 3-마트는 방심하고 있어서 프리데이에 큰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 동지는 첫 번째 시범마트 오픈에 그룹 역량을 투입할 거라고요. 완전히 기습이죠. 그렇게 되면 아무리 3-마트라도 마땅히 방법이 없을 겁니다. 다음 시장에서는 몰라도 이번 시장에서는 무조건 우리가 이깁니다. 그러니 저 믿으시고, 이번 프로젝트 같이 하세요. 제가 응암슈퍼를 은평구에서 제일 잘 나가는 동네슈퍼로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 그러자. 동수야···. 정말, 정말 고맙다.”
============================ 작품 후기 ============================
25일은 제 생일입니다.
이런 날 오붓한 시간을 함께 보낼 애인이 없다는 게 참..... ㅠㅜ
열심히 글이나 써야죠? 그죠? ㅎㅎㅎ
서글프지만 해피버스데이 투 미~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일선물 셈치고 선추코 좀 주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