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6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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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은 오늘도 피곤한 몸을 힘들게 일으켜 하루를 시작했다.
여자 나이 서른하나.
누군가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날 그런 시기였지만, 그녀는 회사 일과 육아에 치여 자신을 꾸며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지금은 그냥 ‘아줌마’일 뿐인 김미정도 누구 못지 않게 아름답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의 인생도 내리막길을 걷고 말았다. 인제 와서 그걸 후회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잘 알고 있지만, 문득문득 이렇게 아쉬움이 드는 건 지금 삶이 그리 녹록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은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동수가 생각날 때가 있다.
이화여대를 다니던 미정과 서강대학교를 다니던 동수는 신촌 연합 마케팅 학회에서 처음 만났다. 큰 키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그의 첫 모습은 솔직히 그녀의 이상형과 정반대였다. 하지만 듬직하고 따뜻한 그의 내면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다.
대학 1학년 여름이 되기 전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누구보다 알콩달콩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처음엔 동수가 미정을 열렬히 따라다녔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그의 매력에 풍덩 빠진 미정은 동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깊어졌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그런 극진한 마음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병역 의무는 마음이 여린 미정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전형적인 서울 중산층 대학생인 미정. 그런 환경은 그녀를 독립적인 여성이 아닌 남에게 의존하는 성향이 짙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런 의존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대학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고치는 경우가 많지만,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챙겨주는 동수로 인해 그녀는 의존적인 여성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동수가 처음 군대를 갔을 때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했던 미정이었기에 힘들어도 기다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동수가 없는 공백으로 인한 외로움과 그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미칠듯한 외로움을 참으며 꾸역꾸역 1년 넘는 시간을 버티고 있을 때, 지금의 남편이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그녀의 완벽한 이상형인 꽃미남 스타일의 세련된 남자. 그의 따뜻한 말고 감미로운 손끝에 그동안 외로움을 참고 견뎠던 인내심은 봇물 터지듯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미친 듯이 남자에게 빠져들었고, 사랑하던 동수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자신을 학대하듯 자극적인 사랑놀음도 마다치 않았다. 그러다 생긴 게 지금 그녀의 첫째 아들이었다.
혼란스러웠지만 남편과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믿고 있던 미정은 당연하리만치 쉽게 결혼을 선택했다. 다행히 출산 예정일이 대학 졸업 후라서 휴학 없이 무사히 학교도 마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얼굴은 예쁘장하고 여심을 녹이듯 세련된 화술을 쓰던 남편은,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한 남자였다. 여자 후리는 것 말고 잘하는 게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아무런 능력도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처음에야 학생이라는 이유로 집에다 손을 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신혼 아파트까지 친청에서 해준 마당에 기약 없이 계속 용돈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면목이 없었다.
무능력한 남편은 여전히 돈을 벌어올 생각이 없었고, 그렇다고 육아에 도움을 줄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몸을 푼 지 고작 두 달 만에 취직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화여대 경영학과 졸업이라는 간판이 있다고 해도, 애까지 딸린 유부녀를 환영하는 직장은 거의 없었다.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 눈높이를 낮춰 계약직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그나마 대기업 계약직이라 직원들에 대한 대우가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염치없지만 아이는 친정에 맡겼고, 그때부터 직장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고단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항상 누군가에게 의존적으로 살던 여린 그녀는 아이 때문에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변했고, 곱던 얼굴은 나이보다 몇 살은 더 들어 보일 만큼 주름졌다.
그녀가 네 번째 직장인 포에버마트.
그동안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열심히 일했지만, 2년 후에 날아오는 건 냉혹한 퇴사통보였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미정에게는 생때같은 아들이 있어 좌절하고 싶어도 좌절할 여유가 없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악착같이 일했고, 그 노력이 통했는지 세 번째 직장에서는 그녀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는 구두 약속까지 받았다.
하지만 무능력한 남편은 끝까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직장 생활에 지쳐 피곤한 마음에 남편의 지분거림을 거절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너무나도 졸려 가슴을 만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있다가 얼떨결에 나눴던 관계에 덜컥 둘째가 들어선 것이다.
아무리 미정을 좋게 본 세 번째 회사라도 임신을 한 그녀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만큼 배려심이 많지는 않았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를 그만뒀고 또다시 친정에 손을 벌려가며 둘째를 낳았다.
그리고 다시 취직한 곳이 바로 포에버마트였다. 나이도 이제 삼십을 넘어 대기업 취직이 쉽진 않았지만, 포에버마트 인사팀에서 대리로 근무하고 있는 친구가 도움을 줘 어렵사리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동안, 포에버마트가 동지마트에 합병되고 말았다. 행여나 대대적인 정리해고가 시행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지만, 오히려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행운을 안았다.
친구들은 다들 대기업에서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고작 할인마트 정규직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자신이 처량하기도 했지만, 무능력한 남편까지 셋이나 먹여 살려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신세한탄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미정아. 점심시간이지?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자.”
미정을 포에버마트에 취직시켜준 친구 세희가 오랜만에 얼굴을 보였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급격히 친해진 세희는, 그녀의 어려움을 모두 알고 다독여주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였다.
“어서 와. 세희야. 바쁜 일은 끝났어?”
세희는 포에버마트 인사팀에 있다가, 회사가 동지마트와 합병되면서 총무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합병 때문에 관리직들에 대한 압박은 엄청났고, 거기에 새로운 직무에 적응하느라 그동안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말도 마. 위에서 어찌나 쪼는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어. 너는 어때? 새로운 일은 할만해?”
미정은 원래 캐셔파트에서 일했지만,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여성용품 관리파트를 맡게 되었다. 새로운 인사부장이 그녀의 학력을 아깝게 여겨 좀 더 책임 있는 자리로 옮겨준 것이다.
새로운 일이라 알아야 할 게 많았다. 그만큼 몸은 고돼도 예전과 달리 일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원래 하던 일보다 훨씬 재미있어. 보람도 있고.”
“그렇지? 캐셔 업무도 나쁜 건 아니지만 단순 노동에 가깝잖아. 그래도 이대 나온 여잔데, 좀 더 난이도 있는 일을 해야하지 않겠어? 호호호.”
세희는 영화 타짜에서 김혜수가 했던 대사를 흉내 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영화 이후 ‘이대 나온 여자’라는 말이 조롱의 뜻이 되긴 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조차 농담으로 사용할 만큼 밝고 긍정적인 친구였다.
“그래. 이게 다 세희 네 덕분이야. 이렇게 빨리 정규직으로 전환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에이. 그게 무슨 내 덕분인가. 운이 좋았고, 그리고 네가 열심히 일한 덕분이지. 네 그 엉터리 남편만 아니었다면 벌써 정규직 직원이 되고도 남았을 거 아니야.”
“그래도 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힘들었을 거야. 덕분에 정규직도 됐으니까 오늘은 내가 쏠게. 밥에 커피까지!”
“오! 우리 짠돌이 미정양께서 웬일이래.”
“이런 날도 가끔 있어야 하지 않겠어?”
“호호호. 그래. 대신 초콜릿 조각 케이크는 내가 살게. 너무 열심히 일했는지 당이 부족해.”
“초콜릿 케이크? 그거 나도 먹고 싶었는데···.”
초콜릿 케이크는 세희가 아니라 미정이 학생 시절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그러나 결혼하면서부터 억척스럽게 변하더니 그런 군것질도 거의 끊었다. 여린 친구가 그렇게 변한 게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던 세희는 가끔 이렇게 자기가 먹고 싶다는 핑계로 초콜릿 케이크를 나눠 먹곤 했다.
“어이구.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좀 먹어. 허구한 날 남편하고 애들한테만 쓰지 말고.”
“남편이 취직하면. 그때가 되면 여유가 좀 생기겠지.”
“미정아. 매번 이야기하지만, 그냥 이혼하면 안 돼? 대체 몇 년째야? 네가 24살 때부터였으니까 8년째 백수로 지내고 있다고. 경제적으로 그 정도 무책임하면 이혼사유가 된다고. 그러니 마음 독하게 먹고 헤어져.”
“어떻게 그래. 그래도 애들 아빤데. 능력은 좀 없지만, 그래도 희한하게 바람은 안 펴.”
“바람을 안 피우는 거냐? 못 피우는 거지. 바람을 피우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 피우지. 안 그래?”
“왜? 애들 아빠 정도 얼굴이면 용돈 줘가며 연애하자고 덤비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는데, 그래도 한 눈은 안 팔잖아.”
“자랑이다. 자랑. 네 신랑은 여전히 동안인데, 예뻤던 네 얼굴만 나이 드는 것 같아 내가 속상해서 그런다.”
“애들 엄마가 얼굴 예뻐서 어디다 쓰게.”
미정의 자조적인 대답에 세희의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저런 친구가 아니었는데, 저렇게 만든 그의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래. 말을 말자. 원래 김미정이 착한 거 말고는 내세울 게 없었잖아. 그래 속이 터지든 말든 그렇게 평생 착하게만 살아라.”
“세희야. 나 안 착해.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마.”
“뭐? 또 예전 첫사랑 군대 간 거 못 기다린 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거야? 그래서 안 착하다고? 그러지 좀 마라. 대한민국 여자 중에 90%는 못 기다려.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 기다라는 사람이 좀 이상한 거지. 그러니 괜한 자격지심 가지지 마.”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거지. 그리고 자격지심 아니야.”
“그래 특별하다고 쳐. 그런데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그렇게 기다린 10% 여성의 90%는 군대 다녀온 남자친구에게 차인다는 거야. 네 첫사랑도 그랬을걸? 그러니 혼자 나쁜 여자니 어쩌니 자학하지는 마.”
“동수는 안 그랬을 거야.”
“내가 안 봤으니 아나. 네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 상상이라도 하면서 위안을 받고 싶다면 말리진 않으마. 그런데 동수? 아··· 그러고 보니 네 첫사랑 이름이 마동수라고 했지?”
동수가 군대 간 다음에 친구가 된 두 사람이다. 그래서 세희는 미정의 절친임에도 불구하고 동수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응. 맞아. 마동수. 이름 좀 특이하지?”
“응. 특이해. 그리고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 나도 알아.”
“뭐? 네가 동수를 알아? 어떻게?”
화들짝 놀란 미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왜 그런 소문 있었잖아. 동지마트의 TF팀 팀장이 포에버마트 합병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그런 소문. 너도 들어본 적 있지?”
“들어보긴 했어. 그렇게 능력자라면서. 그리고 동지그룹 셋째 아들의 최측근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사람이 왜?”
“그 사람 이름이 마동수야.”
“뭐? 에이. 아닐 거야. 동수는 그냥 평범했어. 사람이 진중하고 위트있긴 했지만, 재벌 아들의 측근이 될 만큼 특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냥 이름만 같겠지.”
“그런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참! 동지마트 광고에 나오는 윤시연 작가 알지?”
“응. 알아. TV광고에 자주 나오잖아. 난 처음에 연예인인 줄 알았는데 그냥 작가 겸 학생이라며?”
“그래! 얼굴 엄청나게 예쁜 그 아이. 글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윤시연 작가가 마동수 팀장의 약혼녀라고 하더라.”
“그럼 더더욱 아닐 거야. 나도 그 작가 소문은 들었는데, 집이 엄청나게 부자라면서?”
“정확하게는 나도 모르겠지만, 거의 준재벌급 집안이라는 소문은 들었어.”
“그런 집안들은 서로서로 비슷한 집안끼리 맺어주잖아. 동수 집은 그냥 평범했어. 그러니 절대 내가 아는 마동수가 윤시연 작가의 약혼자일 리는 없지.”
“하긴. 아무래도 그렇겠지? 난 또 미정이 네 첫사랑과 이름이 똑같다길래 혹시나 덕 좀 보나 했는데 아쉽네. 동지마트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건 마동수 팀장이라는 소문이 들리고 있거든.”
세희 성격상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그런 덕을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수심히 가득해 보여 그냥 장난치듯 미정을 놀리는 중이었다.
“뭐?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진짜 동일 인물이라면 네가 내 친구라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일걸?”
“그럴까? 원래 남자들 첫 사랑은 못 잊는다고 하던데.”
“동수는 아닐 거야. 내가 다른 남자가 생긴 걸 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거든. 혹시나 나에게 다시 손 내밀어 주지 않을까 그런 상상도 했는데, 단 한 번도 연락이 없더라.”
“정말? 으엑. 독하다. 설마 널 안 좋아했던 건 아니지?”
“아닐 거야. 동수 성격이 그래. 아니다 싶으면 미련없이 단호하게 돌아서는 거. 그런데 나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으니, 네가 내 친구라고 하면 좋게 볼 리가 없을 거야.”
“어쩔 수 없지. 그냥 열심히 내 능력을 발휘해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에이. 좋다 말았네. 호호호.”
두 사람은 그렇게 수다를 떨며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옆을 노란색 모닝이 조용히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동수 첫사랑 이야기는 이번편에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졌습니다. 다음 편에 마무리 짓도록 할게요. 딱히 비중은 없습니다. 다음 편에 살짝 등장하고, 응앙슈퍼의 방송 출연이 주된 이야기가 될 겁니다.
고무신 거꾸로 신은 첫사랑이 잘나가는 주인공을 보고 후회한다는, 작가의 사심이 다분히 들어간 짧은 에피입니다. ㅋㅋㅋ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제가 왠지 찌질하게 느껴지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