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7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엄마! 그만 자고 일어나. 놀러 가자. 응?”
오랜만의 휴일.
마음 같아서는 실컷 잠을 자고 싶지만,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째 아들인 종호가 이른 아침부터 미정을 조르기 시작했다.
“아빠는? 아빠 없어?”
“몰라 없어. 엄마. 나 심심해 놀아줘. 응?”
남편이 아들과 놀아주면 좋으련만, 울먹이기까지 하려는 종호의 투정에 어쩔 수 없이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일어났어.”
“놀러 가자. 엄마. 놀자!”
“아들. 엄마가 이야기했지. 밥부터 먹고 놀러 가야 한다고···. 아침 안 먹으면 못 놀러 가요. 알았어, 우리 왕자님?”
“치. 알았어. 그럼 빨리 밥 줘. 배고파.”
“어휴. 지금 몇 신데 밥이야?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엄마가 미안해. 우리 아들 배고팠겠다. 얼른 밥부터 줄게.”
아직 이른 아침일 줄 알았는데, 시계가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다. 몸이 피곤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나 보다. 늦어도 7시 30분에는 일어나는 아들인데, 피곤한 엄마를 위해 1시간 30분이나 조용히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럴 때 남편이라도 도와줬으면 좋으련만, 남편은 아이랑 놀아주면 큰일이라도 난다고 생각하는지 항상 방관하기 바빴다.
아빠가 없다는 종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자고 있던 안방에 없으니 밖으로라도 나간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제 세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바람이라도 난 걸까? 그런 의심이 드는데도 마음이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차라리 바람이라도 피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고 마음 편하게 이혼하자고 할 텐데.
혹시나 싶어 서재의 문을 열어봤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편이 조용히 자고 있었다.
설마 공부하고 늦잠을?
그럴 리가 없다. 밤새 게임을 했거나 아니면···.
그런데 책상 위에 널브러진 휴지들을 보니 후자였다 보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 편으론 이해가 갔다. 둘째를 낳은 이후 잠자리를 거절해왔으니 야동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을 수도 있다.
예전의 미정이라면 불결하다며 기겁부터 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런 남편의 모습조차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이상 애정이 없는 남편과 잠자리를 하느니, 저렇게 혼자서 해결하는 게 피곤하지도 않고 좋다는 그런 생각.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차라리 바람을 피우지. 저 얼굴로 밖에 나가면 아직도 좋다는 여자 많을 텐데, 대체 어울리지도 않는 의리를 지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미쳤지. 미정아! 미정아! 이 바보 같은 미정아! 저런 남자를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나와? 저 인간은 네게 의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그냥 바람피우기 귀찮을 뿐이야. 귀차니즘에 아무 것도 하기 싫어서 하루하루를 그냥 시간만 때우며 무기력하게 보내는 한심한 인간!’
미정은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남편에 대한 연민을 거뒀다.
대체 뭐가 잘못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에게 다가와 달콤한 말을 내뱉던 대학시절 남편은 저런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무기력하게 변해버렸다.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처음엔 이해를 해보려고 대화도 시도했고, 그의 행동을 고치려고 노력도 해봤다. 하지만 항상 ‘알아서 할게.’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렇게 말하고도 정작 알아서 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한심한 남편.
지금은 미정 또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애 딸린 이혼녀보다는 그래도 남편이 있는 유부녀가 더 존중받는다는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의 결혼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처음엔 아이들 때문이긴 했지만, 지금의 남편이 아이들의 정서에 도움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저런 아빠라면 없는 게 낫지 않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여전히 코를 골며 잠을 자는 남편을 뒤로하고, 미정은 서둘러 밥을 짓기 시작했다. 밥솥이 돌아가는 사이 자고 있는 둘째도 깨웠다. 아직 세 살이라 잠이 많다. 잠시 칭얼거렸지만, 엄마인 그녀가 알아주자 금세 정신을 차리고 빙긋 웃었다. 그런데 미정의 품이 좋은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둘째를 등에 업고 반찬을 만들었다.
그 사이 기특한 첫째는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 자는 그녀를 깨우며 놀러 가자고 조르던 아이는 사라지고 의젓한 장남의 모습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엄마. 이제 놀러 가자.”
의젓하게 기다리다 차려주는 밥을 다 먹은 큰아들이 그제야 미정을 보며 놀러 가자며 졸랐다. 평소에 외할머니가 봐주시긴 하지만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이에게 또 다른 의미이다.
“그럴까? 그런데 아들. 어디 놀러 가고 싶은 데 있어?”
“응! 요 앞에 응암슈퍼에 가고 싶어.”
“뭐? 응암슈퍼? 거긴 갑자기 왜?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라도 있어?”
“아니. 거기 오늘 TV 촬영한다고 했어. 그래서 연예인도 나온대.”
“우리 아들 거길 정말 가고 싶었구나. 아침부터 엄마를 그렇게 깨운 걸 보니.”
“응! 가고 싶어. 다른 애들도 연예인 보러 간다고 했단 말이야.”
어디 멀리 가자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가자고 하는 곳이 고작 집 근처에 있는 응암슈퍼였다. 거기 사장이랑 첫사랑이던 동수랑 친하게 지내는 바람에, 그와 헤어지고는 정말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자주 이용하지 않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갑자기 TV 촬영이라니. 아들의 설명에 미정 또한 호기심이 들었다.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세 사람은 응암슈퍼로 오붓한 모자 나들이를 떠났다.
“여러분! 조금만 협조 부탁 드립니다. 촬영 중에는 잠시만 조용해 주세요.”
응암슈퍼 근처에 도착하자 아들 말처럼 정말 방송 촬영이 있는지, 엄청나게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엄마, 엄마. 저기 봐. 이경구야. 이경구.”
“어머. 그러네. 뭘 찍길래 저렇게 유명한 사람이 왔을까?”
미정은 호기심에 아들과 함께 인파들이 몰린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도 너무 몰렸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어도 벽처럼 둘러친 사람들 때문에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호는 계속 앞으로 가자며 그녀를 졸라댔다.
난감한 상황에 한숨만 쉬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미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종호 엄마도 왔네요.”
“어··· 철수 엄마. 그 집도 철수가 졸라서 온 거예요?”
지금 사는 아파트 윗집의 철수 엄마였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도 그렇지만 종호와 철수가 동갑이라 다른 엄마들보다 친분이 있는 편이었다.
철수도 종호처럼 연예인들을 본다는 생각에 들떴는지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폈다. 그러나 미정과 철수네 사이에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빠의 존재. 철수 아빠는 철수의 손을 잡고 철수 엄마 뒤에 듬직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종호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아들의 얼굴이 마음이 아팠지만, 이웃들 앞에서 그 마음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미정은 어색한 표정으로 철수 아빠와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네. 아침부터 가자고 난리라서요. 덕분에 꼭두새벽부터 얼마나 시달렸는지. 휴···.”
“그러게요. 그런데 애들은 방송 촬영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대요?”
“아···. 응암슈퍼 사장님 애들도 둘 다 철수랑 같은 초등학교 다녀요.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고, 딸은 우리 애들이랑 같은 1학년이잖아요. 걔들이 자랑했나 봐요. 자기 아빠 가게에서 방송촬영 하는데, 연예인까지 온다고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 여기 보세요. 전부 애들에게 끌려온 분위기잖아요. 호호호.”
“그런데 무슨 촬영을 하는 거래요? 철수 엄마는 알아요?”
“응? 종호 엄마는 동지마트에서 일한다면서 응암슈퍼에서 뭘 하는지 모르고 있었어요?”
“네? 응암슈퍼랑 동지마트랑 무슨 상관이라고···.”
“거기서 이번에 DJ마트인가 뭔가 한다면서요?”
“네.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대형할인마트라서 슈퍼 쪽은 잘 몰라요.”
“그렇구나.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데, 응암슈퍼가 DJ마트로 이름을 바꾼대요. 간판도 바꾸고, 내부 인테리어도 바꾸고. 그렇게 해서 동네슈퍼도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슈퍼마켓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주는 프로젝트라고 하네요.”
동지마트에 다니고 있는 미정이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이자, 철수 엄마는 신이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아···. 그걸 응암슈퍼가 하는 거예요.”
“네. 그래서 응암슈퍼 사장님이 완전히 신이 나셨대요. 그렇지 않아도 대형 할인 마트나 편의점 때문에 매출이 줄어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거든요. 다행이지 뭐예요. 이제 TV 출연까지 하게 되었으니 다시 매출이 오르겠죠. 게다가 동지그룹에서 지원해주는 셈이니 다른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슈퍼와 경쟁력에서 떨어지지도 않을 거고요. 안 그래요?”
“네. 정말 잘 됐네요.”
“그렇죠? 호호호. 저는 여기 사장님이 친절하고 유머감각도 있으셔서 웬만하면 응암슈퍼를 이용했거든요. 장사가 잘 안 돼서 슈퍼를 접는다는 소문이 들려서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어···!! 엄마. 저기 봐. 저기! 저기 엄청 예쁜 누나 온다.”
철수 엄마와 응암슈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종호가 그녀의 손을 흔들려 호들갑을 떨었다.
“엄청 예쁜 누나? 누구?”
“쩌어기. 저쪽에서 오잖아.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누나.”
미정이 어딘지 찾지 못해 두리번 거리자, 종호가 답답한 듯 손을 쭉 뻗어 큰 도로 방향을 가리켰다.
“아··· 도로쪽이었어? 얼마나 예쁜 누나길래 우리 아들이 이리도 좋아하는 지 한 번 볼까? 엄마보다 더 예쁘면 안 되는데. 호호호.”
그녀는 종호를 향해 싱긋 웃어주며 아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역광이라서 그런지 얼굴을 정확하게 알아보기 힘들었다. 단지 키 큰 두 남녀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촬영장을 향해 다가오는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들은 여자 쪽을 보라고 졸라댔지만 미정은 키 큰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누구더라. 누군데 이리도 내 눈에 익숙한 걸까?
남자를 바라보는 미정의 마음은 종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졌다. 익숙한 모습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살짝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눈과 미정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마동수.
보자마자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그리운 얼굴이었다. 그녀가 동수에게 이별을 통보했을 때, 한번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우연이라도 동수와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멋진 슈트를 입고 당당하게 걸어오는 모습은 예전보다 훨씬 세련되고 멋있었다. 조금은 사납다고 생각했던 그의 눈매는 세월이 지나며 서글서글하게 변해있었다. 그런 변화가 미정의 마음을 사납게 할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왼편에 있는 여자에게도 눈이 갔다.
아들이 말한 것처럼 ‘예쁜 누나’였다. 아니 그런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도 감히 질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여신같은 미모의 여자를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다, 미정은 그제야 자신의 행색을 깨달았다. 멀리 나가는 것도 아니고 동네 슈퍼에 구경 가는 일이었다. 꾸밀 이유가 없어 부스스한 머리에 오직 실용성만 강조된 촌스럽지만 편한 바지를 입고 나왔다.
‘아차’ 싶었다.
옛 연인 앞에서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했다. 더군다나 그의 옆에 있는 여자는 마치 극과 극처럼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못 본 척 얼른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걸어가는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미정을 알아본 듯 동수는 그녀를 향해 작게 고개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마치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듯 무심한 얼굴을 하던 그는, 옆에 있던 여자가 뭐라고 말을 하자 금세 환하게 웃으며 왼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머···. 정말 예쁘네. CF에서 보는 것보다 실제로 보니 더 예쁘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미정의 심정을 눈치채지 못한 철수 엄마가 동수의 애인을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누군지 아세요?”
“당연히 알죠. 윤시연 작가 아니에요. 요즘 동지마트 CF모델인데, 어떻게 종호 엄마가 못 알아봐요?”
“아···. 너··· 너무 예뻐서 못 알아봤어요.”
“그렇죠? 제가 봐도 정말 현실적이지 못한 외모네요. 그런데 저 남자가 책 속에 등장한 그 남자인가 보네. 잘 어울린다. 역시 남자는 저렇게 듬직해야 해.”
“저 남자 아세요?”
“잘은 몰라도 윤시연 작가 애인 아니겠어요? ‘너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의 주인공. 소문에 의하면 동지마트에서 엄청나게 잘나간다고 하던데, 그래서 여기도 같이 왔나 봐요. 그런데 종호 엄마는 동지마트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워··· 원래 포에버마트였는데, 합병됐잖아요. 그래서 아직 동지마트는 낯설어요.”
“아. 그렇구나. 어쩐지.”
미정은 변명하듯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동수의 뒷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의 도착에 촬영장은 금세 소란해졌고, 그 유명하다는 개그맨 이경구까지 다가와 서로 인사를 나눴다. 예의 바르지만 당당한 모습. 그는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멋있게 성장했다.
그리고 문득 친구인 세희가 해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동지그룹 셋째 아들의 최측근이며, 준재벌 집안의 외동딸과 약혼한 사람의 이름이 마동수였다는 사실을.
입맛이 쓰고 속이 쓰라렸지만,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뿐 미정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조잘대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 작품 후기 ============================
주인공 첫사랑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입니다.
뭔가 통쾌한 복수 같은 걸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어떠셨는지 모르겠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는 길에 선추코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