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5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윤권의 움직임에 아까와는 달리 놈들은 뭔가 당황한 듯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바로 광우가 말한 기세 싸움이었다. 광우는 윤권에게 조언만 하고 돌아간 게 아니었다. 패거리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줬다. 자칫 먼저 덤볐다가는 지금 바닥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사내처럼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 그들의 몸을 굳게 하고 저절로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 자식들이! 다들 정신차려! 뭣들 하는 거야. 상대는 한 놈이야. 고작 한 놈이라고. 지금부터 물러서는 놈이 있으면 내가 먼저 고자로 만들어주지.”
기세가 완전히 꺾어버리자 아차 싶었던 말총머리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협박 아닌 협박에 윤권과 대치하고 있던 사내들은 물러나는 걸 멈추고 주춤주춤 앞으로 향했다.
“이얍!”
제일 어려 보이는 사내가 눈치를 보더니 제일 먼저 뛰어들었고, 그 뒤에 나머지 열 명이 차례로 뒤따랐다.
콰득!
“커억!”
사타구니를 조심하며 엉거주춤 뛰어오는 모습에 윤권은 목표를 바꿔 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조금 전 싸움과 달리 모든 체중을 실은 혼신의 힘이 담긴 주먹이었다.
아래만 신경을 쓰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턱이 박살난 녀석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공격 하나로 싸움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달려드는 패거리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고, 윤권은 자신의 공격이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기백백해졌다.
양 떼 속에서 마음껏 흉포성을 드러내는 이리처럼 윤권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빠각!
“으아악!”
강력한 로우킥에 왼쪽 다리가 부러지면서 또 다른 적이 쓰러졌다.
“젠장! 마음이 찜찜했는데, 누군지 이제야 기억이 났어! 저 미친 최광우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광우를 봤을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찝찝함의 정체가 뒤늦게 드러났다.
고자요정 최광우.
대중들에게는 귀여운 애칭이지만 불법을 저지르는 패거리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덕분에 원한도 많이 맺었다. 그러나 깊은 원한을 가지고 덤벼들었던 몇몇 유명 조직이 광우 한 사람에게 와해됐다는 믿기 힘든 소문이 나면서 그는 대적불가의 재앙으로 통했다.
최광우를 만나면 그냥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말이 마치 만고진리처럼 이 바닥에 떠돌았다. 아니, 만나면 이미 늦었다는 말도 들었다.
말총머리는 그제야 그에게서 아무 기세를 느낄 수 없었다는 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라는 의미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 그의 몸을 잠식했다.
1 대 11의 싸움이었지만 기세를 탄 윤권이 이미 승기를 잡고 있었다. 저 한 명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광우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자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으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싸움에 빠져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말총머리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러나 채 한 걸음도 옮기기 전에 절망과 같은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대체 언제?’
“워워. 이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새끼가 부하들은 죽든지 말든지 내버려두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놈인데. 바로 말총머리 너 같은 놈 말이야.”
이미 퇴로에는 열 명이 넘는 남자들이 마치 유니폼처럼 민소매만 입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뭐··· 뭐냐? 너희들은?”
“그러는 넌 뭐냐? 그리고 넌 여기가 어딘지 모르고 왔어?”
“여··· 여기가 어딘데?”
“서울지청 광역수사대 훈련장.”
“뭐?”
“그럼 여기서 문제. 서울지청 광역수사대 훈련장에서 이 추위에 민소매만 입고 이곳을 배회하고 있는 우리는 누굴까?”
“경찰?”
“오···. 정답. 난 ‘짭새’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경찰이라고 불러주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앞을 주시했다. 기세를 보니 1 대 1로 붙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열 명이 넘는 사람을 뚫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
“와우! 진짜 혼자서 11명을 이긴 거야? 미친··· 저 자식 정체가 대체 뭐야?”
그 말에 말총머리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경찰이라며 이죽거리던 남자의 말처럼 그 자리에는 윤권 혼자만 서 있었다. 많이 지쳐보였지만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승리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그를 대신해 시간을 벌어줄 동료 한 명 없는 상황.
“글쎄요. 대장님 제자쯤 되려나요?”
“젠장. 어째 대장 주변에는 어떻게 하나같이 괴물들만 득실득실하냐.”
“하지만 박 경위님. 저런 녀석 열 명이 덤벼도 대장님에겐 안 될 걸요?”
“대장은 원래 괴물이었고···. 야 인마! 눈깔 그만 돌려. 그래 봐야 도망 못 가니까.”
퇴로를 막고 있던 경찰들이 윤권에게만 관심을 보이자, 말총머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재빨리 탈출로를 찾았다. 그러나 박 경위라고 불린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경고를 했다.
“······”
“새끼. 아무리 그렇게 두리번거려도 도망갈 곳이 없다니까 그러네. 그런 데가 있었으면 우리가 벌써 도망갔지. 안 그래들?”
“크크크크크. 그건 그렇죠. 여긴 인마. 지옥야, 지옥. 우리뿐만 아니라 몸으로 나랏밥을 먹고 사는 인간들은 대부분 여기 와서 피눈물을 흘린 곳이라고. 그런데 여기를 제 발로 기어들어 오다니··· 너도 참.”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을 잘못 보고 따라온 겁니다.”
“뭐?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하하하하하하하. 내가 최근에 들어본 소리 중에 최고의 개소리다. 이렇게 똘마니들까지 잔뜩 끌고 와 놓고 사람을 잘못 봐? 하하하하하하.”
“하.하.하. 제가 시력이 약해서.”
“개소리한다. 아까 분명히 ‘마동수 팀장’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데 사람을 잘못 보긴, 개뿔! 어이, 말총머리. 잡소리 그만하고 이제 곱게 잡히는 게 어때?”
“X발. 너 같으면 순순히 잡히겠냐?”
자기가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인지 어색하게 웃던 말총머리는, 정색하는 박 경위의 모습을 보며 숨기고 있던 원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1 대 1로 한 번 붙을까?”
“뭐? 다··· 당신이랑?”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광우라는 걸 확인한 말총머리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광우를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 아니. 나 말고 저 녀석.”
광우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왼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아직도 믿기지 않는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윤권이 황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나 보고 저 녀석을 상대하라고?”
“그래. 이기면 그냥 보내줄게. 너뿐만 아니라 저기 널브러져 있는 네 똘마니들도 전부.”
“대장님!”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고 생각했는지, 옆에 있던 왕 경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광우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너도 알잖아. 네가 저 녀석보다 강하다는 걸. 그리고 저 녀석은 네 똘마니들을 상대하느라 지치기까지 했어. 설마 겁나는 거야?”
“누··· 누가 저따위에 겁을 먹는다고! 이봐. 정말 약속 지킬 수 있어?”
“그럼. 난, 한번 한 약속은 어기지 않아. 물론 조건은 있어. 대신 네가 만약 지면, 나머지 일당을 검거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
“뭐? 나보고 배신자가 되라는 이야기야?”
“이기면 그만 아닌가? 자신 없어?”
말총머리가 발끈해서 반발했지만 광우는 여전히 태연했다.
“당연히 자신 있지! 그런데 만약 내가 지고도 말 안 하면 그땐 어떡할 건데?”
“어쩌긴. 저기 거품 물고 쓰러진 녀석 보이지?”
광우가 이번에는 자시의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광우에게 맞아 급소(?)가 터지는 고통에 거품을 물고 기절한 그의 부하가 쓰러져 있었다.
“그··· 그건 폭행에 고문이라고!”
“폭행에 고문? 하하하. 알게 뭐야. 설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너를 위해 증언할 거라고 생각해? 넌 마동수 팀장을 납치하러 왔고. 재수 없게 나를 만났어. 그리고 격투 끝에 고자가 되는 거지. 우.연.히.”
“이봐! 당신들은 그래도 경찰이잖아?”
말총머리가 항변하듯 주변을 둘러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박 경위는 씨익 웃으며 오른손으로 입에 지퍼를 잠그는 자세를 취했다.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윤권을 이기거나 아니면 져서 남은 동료들을 팔거나. 절대 고자가 될 수는 없다.
“그래! 까짓것. 내가 저런 애송이에게 질 리가 없잖아. 하자고, 해!”
그의 선택에 당황한 건 윤권이었다. 11명을 쓰러트릴 때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광우 형님. 저 지금 진짜 겨우겨우 서 있는 겁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어요.”
“그래? 그럼 입 놔두고 뭐해? 입으로 싸워!”
울상을 짓는 유권에게 광우는 엉뚱한 요구를 했다.
“입으로 어떻게 싸워요? 설마 말싸움을 하라는 이야기에요?”
“당연히 아니지. 넌 아직 입의 위대함을 모르는구나. 인간이 가진 무기 중 어쩌면 가장 강력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게 바로 입이야. 특히 절삭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그··· 그러니까 결국 물어 뜯어라?”
“그렇지! 싸울 때는 체면이고 뭐고 없어. 싸움이 시작되면 무조건 이길 생각부터 해. 방금 전에 내가 하는 이야기 들었지? 네가 지면 저놈들 다 풀어주기로 했다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윤권.
“만약 싸움에 져서 저놈들을 풀어줘야 한다면, 그 대가는 당연히 네가 치러야겠지?”
“네? 광우 형님! 그게 어떻게 제 책임입니까?”
“네 책임이야. 그러니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해.”
“무슨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데요? 설마 말총머리처럼 저도 고자로 만드시려는 건 아니죠?”
“무슨 소리를 그렇게 섭하게 해? 나, 그렇게 막돼먹은 놈 아니야. 고자킥은 언제나 나쁜 놈에게만! 이게 내 원칙이야.”
광우는 마치 대단한 사명감이라도 있는 것처럼 당당했다. 윤권은 일단 아랫도리가 안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가슴에 남아 있던 불안감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럼 저는 어떻게 책임을 지는 건데요?”
“책임이랄 것도 없어. 네가 진다는 건 결국 너를 잘못 가르친 내 탓이잖아. 그러니 나랑 같이 일주일만 합숙하자. 그럼 절대 저놈 따위에 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니까. 어때 이만하면 합리적이지?”
맙소사!
‘합리적이지 않으냐.’고 물으며 씨익 웃는 광우의 모습이 윤권의 눈에는 악마처럼 보였다. 고자가 안 되는 건 다행이지만 광우와 일주일 합숙하는 것도 죽기만큼 싫었다.
“야! 대장과 일대일 합숙을 하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우린, 팀원 전부가 같이 지냈는데도 끔찍하게 힘들었잖아.”
“헬 오브 더 헬이겠죠?”
“지옥 중의 지옥으로 떨어지느냐 아니면 필사적으로 싸움에서 이기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박 경위는 마치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 손뼉까지 치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윤권의 얼굴은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감사하긴 한데요. 팀장님을 일주일 넘게 혼자 둘 수는 없어서요.”
“괜찮아. 이번 사건을 조사한다고 하면 일주일 정도는 동수에게 무술 경관을 붙여 놓을 수 있어. 그러니 마음 놔!”
일단 거절해봤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 더는 다른 핑계를 대기도 구차했다.
이제 윤권에게는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동료애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말총머리에게는 그런 절박함이 없었다.
바로 그 마음가짐이 두 사람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