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1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고정호 전무의 실각 소식을 들은 나는 재빨리 고현호 사장을 찾아갔다.
강력한 라이벌이 한 명 떨어져 나갔다고 샴페인을 터트리며 축하할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본격적인 경쟁을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3명일 때는 상대의 눈치를 보느라 조심했다면, 이젠 사각의 링 위에 올라 1:1로 서로 마주하게 된 상황이었다.
더 이상 빈집을 털리거나 어부지리를 당할까 걱정할 필요 없이 오직 단 한 명의 상대만 집중하며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마 팀장을 잡으려 들었던 녀석들의 배후가 큰 형님이었다는 거네. 어휴···. 형님은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하신 거지. 마 팀장아.”
“네. 이사님.”
“그런 일을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걸 왜 사장님께서 미안해하십니까.”
“어쨌든 내 형님이잖아. 그리고 결국은 나를 견제하려고 생긴 일이고.”
“사장님과 저는 한배를 탄 사이잖아요. 그런 소리 하시면 섭섭합니다.”
“아는데 그래도 면목없다. 마 팀장 네가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야.”
이렇게 진심이 뚝뚝 묻어날 정도로 걱정해주니 내가 고현호 사장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다.
“윤권이가 고생했죠. 저는 싸움 구경하느라 흥미진진하기만 했어요. 하하하.”
“그런데 윤권이는 괜찮은 거야?”
“네. 가벼운 타박상 말고는 말짱하답니다. 워낙 통뼈라 어디 부러진 곳도 없고요. 정말 튼튼한 녀석이거든요. 그래도 고생했으니 보너스라도 두둑이 챙겨줘야죠.”
“보너스라면 나도 따로 챙겨줘야겠는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동지마트의 에이스를 구해낸 일이잖아. 두둑한 보너스 기대하라고 해.”
“와! 아버님도 고생했다고 따로 보너스 챙겨준다고 하셨는데, 사장님까지 챙겨주시면 녀석 완전히 부자 되겠는데요?”
“잘했으면 성과급을 받는 게 당연하잖아. 아··· 그리고 윤 사장님에게도 감사해야겠는걸. 적절하게 아버지를 찾아가 주신 덕분에 손쉽게 큰 형님을 밀어낼 수 있었잖아.”
“아참! 사장님! 대체 윤 사장님이 뭐라고 하셨길래 고정호 전무가 그렇게 단숨에 실각한 걸까요? 알아서 해결하신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하긴 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크게 벌어질 줄은 몰랐거든요.”
“형님이 실각한 이유? 그게 추측이 안 돼? 아직 우리 아버지 성격 모르나 보네. 하긴 마 팀장이 우리 아버지 성격을 파악하는 게 쉽진 않은 일이지. 계기가 되긴 했겠지만 윤 사장님 때문은 아니야. 아버지가 제일 혐오하는 스타일이 폭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드는 거야.”
“회장님이요?”
“물론, 그렇다고 우리 아버지가 정정당당한 사람이라는 건 아니야. 치사하고 야비해도 머리를 쓰면 좋은 방법이고, 폭력을 쓰면 나쁜 방법이라고 생각하셔. 솔직히 머리 하나는 끝내 주는 분이잖아. 그런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큰 형이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 거야. 들키지 않았으면 모를까 윤 사장님이 다음날 바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따지기까지 했으니 오죽 화가 나셨을까? 솔직히 그런 상황에서도 큰 형에게 동지 유업이라도 넘겨 준 게 의외야. 아버지라면 빈털터리로 쫓아낼 줄 알았거든.”
“그런 거였어요? 난 또 윤 사장님이 굉장히 극단적인 항의를 한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고정호 전무의 실각은 그만큼 갑작스러웠다.
“그럴 리가. 만약 극단적으로 항의했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났겠지.”
“그렇죠? 어쩐지 우리 회장님 성격을 나도 잘 아는데, 결과가 너무 의외라서 당황했어요.”
“물론 빚을 지우겠다는 심리도 있으셨을 거야. 적당한 선에서 해결했으면, 한동안은 동지그룹이 윤 스포츠센터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잖아. 아버지는 그런 게 싫으셨을 거야. 그게 싫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겠지.”
“일종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이군요.”
“글쎄. 참마속인 건 맞지만 읍을 하셨을지는 미지수야.”
“어쨌거나 회장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네요.”
“그래 대단하지. 자식을 쫓아내는 것도 정략적으로 이용할 만큼 아주 징글징글할 정도로 대단한 양반이지.”
빚을 졌어야 할 상황을 자식을 이용해 오히려 상대에게 빚을 지웠으니, 고현호 사장의 표현처럼 징글징글하게 대단한 양반이 맞았다.
“그럼 어쩌면 새로운 테스트가 이미 시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제 추측이 맞을 가능성이 크겠군요.”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테스트가 이미 시작되었다니?”
“조기훈 차장이 아까 그러더군요. 고정호 전무 라인인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실각으로 전부 ‘새’ 됐다고. 그 소리를 듣는데 갑자기 아차 싶었어요. 실제로 그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잖아요. 그 오리알을 누가 많이 줍느냐, 또는 누가 더 건강하고 튼튼한 오리알을 줍느냐가 향후 후계자 싸움에서 정말 중요한 잣대가 되지 않을까요?”
“······ 큭. 아버지다운 테스트군. 마 팀장 말대로야. 맞아. 테스트는 이미 시작됐어.”
“그럼 어쩌실 겁니까? 의도했든 아니든 세력이 불리한 우리로서는 이번이 중요한 기회잖아요.”
“따라야겠지.”
“일단은 많이 줍고 보실 겁니까? 아니면 선별해서 주우실 겁니까?”
“음···. 어려운 질문이네.”
어려운 질문이지만 사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 쉽게 질문을 바꿀게요. 팀웍을 해치더라도 일단 많이 줍고 보실 겁니까? 아니면 함께할 동료를 처음부터 심사숙고해서 고르실 겁니까?”
“마 팀장은 후자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질문을 그런 식으로 바꾸는 걸 보니.”
“나쁜 놈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은 사장님도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처음부터 소수정예였다. 그런데 인제 와서 어중이떠중이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인다면 세력을 늘리려다 오히려 장점만 잃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 마 팀장 말이 맞아.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고 전공까지 바꿔가며 이 길을 택했는데, 일단 성공하고 보자며 아무나 끌어들일 수는 없지.”
“저도 그렇습니다. 나중에 사장님이 동지그룹을 이끌게 되는 날이 올 때 같은 편을 토사구팽했다는 평가는 듣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젠가 잘라낼 사람을 세력 불리기를 위해 데리고 있는 건 좋은 생각 같지 않습니다. 특히 사장님처럼 인간적인 면이 대중들에게 부각된 경우에는, 구설수는 처음부터 피하는 게 좋겠죠.”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럼 고민 말고 알짜배기만 데려오자고. 마 팀장은 생각해둔 사람 있어.”
“저도 항상 ‘카더라’ 통신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겪어본 사람은 없어요. 그런 건 저보다는 아무래도 사장님과 김학수 부장이 논의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가 최근에 동지그룹에서 조금 잘나가는 편이 됐다고 해도, 그래 봐야 계열사 팀장이다. 그룹 이사나 계열사 사장과 친분 따위를 쌓을 수 있는 계급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도 의견 정도는 있을 것 아니야?”
“음···. 아무리 먹음직해도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은 피했으면 좋겠습니다. 고정호 전무가 실각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런 생각부터 한다는 건 기회주의자일 가능성이 크겠죠. 대단한 충성심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신의는 있어야겠죠.”
“그리고?”
“그리고요? 그것 말고는 별로···. 아! 동지 바이오는 어떻습니까?”
“동지 바이오? 거긴 우리랑 그리 사이가 안 좋은 곳이잖아.”
동지마트와 동지 바이오가 여러모로 꼬인 사이인 건 맞다. 과거 납품가 문제로 우리 속을 꽤나 썩였고, 우리도 거래를 전면 중단하면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관계가 벌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는 세상이다. 과거의 사실들은 서로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다 어긋난 것일 뿐, 단지 그 이유로 그들을 배척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게다가 고정호 전무가 가지고 있던 세력 중 가장 알짜배기가 동지 에너지와 동지 바이오다.
단지 알짜배기라고 추천하는 건 아니다. 내가 상대해본 동지 바이오 영업부 사람들은 상당히 유능했고, 그들이 보여줬던 분위기도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동종업계 1위인 오즈생활환경에 근접할 만큼 회사를 키워낸 조강재 사장에 대한 평도 매우 좋은 편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저런 사람들이 우리 편이면 참 편할 텐데 그런 생각은 했었다.
“고정호 전무 때문에 사이가 벌어졌던 건 사실이지만 이젠 방해물이 사라졌지 않습니까? 짧게 봤지만 그들이 보여준 에너지는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좋아. 그럼 그쪽은 내가 한 번 알아볼게. 다른 건 또 없어?”
“네. 거기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요.”
“알았어. 좀 쉬는가 했더니 금방 또 움직여야겠군. 아! 그리고 내가 몰고 있는 중형차, 그거 마 팀장이 가져. 난 이사들이 대형차로 바꾸라고 해서 바꿔야겠어.”
“네? 굳이 사장님 차를 제가요?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저도 그 정도 돈은 있습니다.”
“그 차가 그냥 중형차가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중형차가 아니면요?”
“난 안 그러고 싶어도, 비서실에서 내가 그냥 일반 중형차를 타고 다니게 내버려 두지 않아. 겉모습은 중형차라도 유리는 전부 특수강화처리 된 거야. 엔진도 업그레이드된 거고. 돈은 좀 들지만 그런 식의 주문제작도 받아주거든. 일종의 맞춤 자동차라고 해야 하나?”
“와···! 그런 꼼수가 있었습니까?”
“짜식. 꼼수라니!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니까. 너도 재벌가의 아들로 살아봐. 과잉보호가 장난이 아니라고. 물론 실제로 위협이 있기도 하고. 그런 일을 대비해서 마련해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생각해.”
역시 사는 세상이 달랐다.
자동차가 양복도 아니고 주문제작이 가능할 줄이야.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조립 과정을 수작업으로만 하는 유명 자동차 회사도 있다. 그러나 자동라인으로 생산되는 기성품을 별도의 개인 공정을 거쳐 특별한 자동차를 만드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이건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돈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며 H 자동차 회사에 나를 위한 특별한 자동차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고, 그들이 내 요청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 ‘저 허접한 놈은 뭐야.’라고 생각하며 콧방귀도 안 뀔 거다.
“결국은 엄청나게 비싼 중형차를 타고 다니신 거군요.”
“뭐, 그렇다고 엄청나게 비싸다고 하긴 어렵고. 특수 제작이라고 해도, 사실은 내수용이 아니라 수출용 차량에 유리만 교체한 수준이라고 보면 돼.”
“헉! 그런 겁니까? 난 또 자동차 회사에 별도의 공정과정을 거쳐서 만들어 낸 특수차량이라고 생각했는데···.”
“하하하. 엉뚱하긴. 전부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제작되는데 그 자동차 회사 사장이 아니고는 그러기 힘들지. 설마 007에서 나오는 본드카를 상상한 건 아니지? 그런 엄청난 기능이 숨어 있는 차는 아니니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마. 그러니까 차는 받을 거지?”
“당연히··· 받을게요. 솔직히 일반인인 제게는 그 정도도 감지덕지죠. 감사히 쓸겠습니다,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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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용과 수출용 차량의 성능 차이가 좀 나긴 하죠? ㅎ
치사한 놈들...
이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됩니다. 고정호 전무의 낙마가 좀 뜬금없이 느껴졌다면 죄송합니다. 나름 개연성을 부여했지만 결과가 약간 허무했죠... ㅠㅜ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