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4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2011년 새해가 밝았고, 시연이와 나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첫 일출을 보며 새로운 2011년을 기념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지리산. 그곳 정상에서 일출을 함께 보는 게 꽤 근사할 것 같아 무작정 준비한 여행이지만, 현실은 그다지 로맨틱하지 못했다.
새벽 3시. 등산로가 열리자 중산리 탐방로에서 추위에 떨며 대기하고 있던 우리는 천왕봉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대피소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출발하지 않는 이상, 당일치기 산행으로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출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코스다.
짧지만 그만큼 가파른 등산로. 눈까지 가득 내려 아이젠을 차고도 발걸음을 옮기가 쉽지 않았다. 새해 첫 일출이라 그런지 인파도 많이 몰려 산행은 더디기만 했다.
그래도 꾸준히 운동한 덕분인지 어떻게든 정상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땀을 흘리며 정상에 오른 순간 갑자기 휘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에, 땀에 젖은 몸은 순식간에 체온을 빼앗겼다.
그때부터 해가 뜨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이 내겐 일 년처럼 길게 느껴질 정도로 추웠다. 오들오들 추위에 떨다 보니 로맨틱한 새해 인사는 개뿔! 오들오들 떨며, 콧물까지 하얗게 얼어버린 서로의 모습에 웃음을 참기 바빴다.
그렇다고 아주 나쁘기만 한 산행은 아니었다. 삼 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2011년 새해 첫날부터 볼 수 있었고, 넓게 펼쳐진 구름 위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위풍당당한 태양의 모습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황홀했다.
그 황홀한 감동이 끝나자마자 다시 추위에 떨어야 했던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시연아. 우리 앞으로 새해 일출은 산에서 말고 바다에서 보자.”
일출을 보고 처음 출발했던 중산리 탐방안내소 입구에 도착해 아이젠과 스패츠를 벗으며 내가 했던 첫 마디였다.
“네. 꼭 그래요. 일출은 아름다웠지만, 추위는 좀 힘들었어요. 히잉. 바다는 그래도 산꼭대기보단 안 춥겠죠?”
한겨울 지리산 천왕봉의 기온은 보통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진다. 거기다 오늘처럼 바람까지 강하게 부는 날은 체감 온도가 영하 20도에 육박한다. 아무리 건강한 시연이라도 겨울 산행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강추위였다.
“다음엔 내가 차 안에서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물색해 놓을 게. 그땐 차 안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여유 있게 보자.”
“진짜죠? 그럼 그땐 예쁘게 입고 와도 되는 거네요?”
“지금도 예쁜데?”
“어휴···. 새해 첫날이잖아요. 2011년에 제일 먼저 보여주는 모습이, 이렇게 추위에 파랗게 질린 얼굴이 아니라고요. 정말정말 예뻐서 한해가 끝날 때까지 동수씨가 그 모습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지리산 일출 보러 가자고 했더니 너도 좋다고 했잖아.”
“저도 이렇게 추울 줄 몰랐죠. 호호호. 그러니까 내년에는 꼭 예쁜 코트 입고도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줘야 해요, 네?”
“그럼! 맡겨만 줘. 안 되면 일출 볼 수 있는 바닷가에 집을 지어서라도 준비해놓을 게.”
혹시나 실망한 건 아닌가 싶어 걱정했는데, 밝은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오늘 일출은 너무너무너무 예뻤어요. 앞으로 지리산 일출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정말 감동이었거든요.”
“그래? 그럼 내년에 다시 올까?”
“네에? 아니요. 내년엔 오붓하게 차에서 보내고 싶어요. 일출을 보며 음···.”
“일출을 보며 뭐?”
“일출을 보며 동수씨와 달콤하게 키스도 하고 싶거든요. 헤헤.”
가만 보면 우리 시연이, 갈수록 여우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냥 싫다고 말하면 실망할까 봐, 이렇게 키스로 유혹하며 내 기분까지 헤아려준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건 얻어간다.
이런 모습 때문일까? 우리가 사귄 지 1년 반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설레고 두근거리며 행복하다.
“그땐 꼭 키스해주기로 약속한 거다!”
“네.”
“자! 이건 새해 선물, 그리고 이건 합격 선물.”
다짐을 받기 위해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약속을 한 나는, 차를 타자마자 준비해둔 두 가지 선물을 시연이에게 건넸다.
“우와······! 고마워요. 그런데 동수씨. 갑자기 합격 선물은 뭐에요?”
“뭐긴 뭐야. KBC 아나운서 인턴 모집에 합격한 축하 선물이지.”
“네에? 동수씨가 어떻게 알아요? 그거 모레 발표 아니었어요? 그런데 나 진짜 합격한 거예요? 네? 장난 아니죠? 동수씨···이. 웃지만 말고 말해줘요. 나 궁금하단 말이에요.”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시연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지난해 KBC는 2학년과 3학년을 대상으로 아나운서 인턴사원을 모집했다. 인턴사원이라고는 하지만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졸업과 동시에 정사원이 보장되는, 아나운서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기회였다
아나테이너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아나운서의 예능적 자질이 중요해진 요즘, 시연이의 잠재력에 눈독을 들이던 KBC가 자격 조건을 2학년 2학기 과정의 학생으로까지 낮췄다. 시연이야 당연히 기다렸다는 듯 지원을 했다.
합격하면 빡빡한 일정 때문에 제대로 된 대학생활은 물 건너가는 셈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지원했으면 좋으련만,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니 반대할 수도 없었다.
솔직히 ‘최대한 빨리 취직해서, 조금이라도 일찍 동수씨와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그녀 앞에서 어떻게 내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냥 조용히 시연이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정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지원자가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하게 몰려버린 것이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2~3학년 학생들은 전부 원서를 냈다고 생각될 만큼 엄청난 열기였다.
2명을 뽑는 이번 인턴사원 모집에 전국에서 무려 10만 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은 무려 1:50,000. 조금 까다롭게 학점 제한에 영어 점수 제한을 했기 때문에 그 정도였지 아니었으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몰렸을 거라는 예측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호응이었다.
아무리 KBC에서 시연이에게 눈독을 들인다고 해도 시험은 공정하게 치러야 했다. 그리고 아무리 시연이가 뛰어나다고 해도 전국 각지에서 대단한 능력자들이 전부 지원한 이번 시험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장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해 2학년인 그녀가 1년이나 준비를 더 한 3학년 선배를 누르고 최종 합격자 2명 안에 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현호 사장에 선을 넣어 남들보다 빠르게 이번 시험에 대해 알아본 결과, 상당히 큰 점수 차이로 시연이가 1등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기시험에서도 최상위권을 유지했지만 고작 2명을 뽑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생각하면 부족한 점수였다. 그러나 면접을 포함한 실기에서 독보적인 점수를 받았다고 했다. 특히 지면광고와 TV CF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는지 카메라 테스트 등 실전에서는 현역 아나운서인 감독관들이 놀랄만큼 압도적인 역량을 선보였다.
혹시나 유명인사가 된 시연이가 합격하면 그런 사실을 시기·질투하는 일이 생기는 걸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녀의 놀라운 실력에 같이 경쟁하던 수험생들까지 감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원래라면 2011년 1월 3일 월요일에 합격자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나는 일주일 전쯤 그 소식을 들었다. 곧장 달려가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새해 첫날 일출을 보며 멋진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근질근질한 입을 참아야만 했다.
“농담 아니고 진짜야. 아는 사람을 통해 네 합격 소식을 며칠 일찍 전해 들었어. 축하해, 윤시연.”
“정말 붙은 거예요? 진짜죠? 농담 아니죠?
“그런 걸로 농담 안 해. 1:50,000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은 것도 대단하고, 공부 시작한 지 고작 1년 만에 이뤄낸 결과라 더더욱 놀라워. 그렇게 내게 시집오고 싶었던 거야? 하하하.”
“당연하죠. 동수씨와의 결혼은 제 인생 최고의 목표라고요! 히힛. 그런데 동수씨. 나, 한 번만 더 물을게요. 저 정말 합격한 건가요? 이거 꿈 아니죠?”
무려 1:50,000이다. 이정도 경쟁률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 시연이도 그걸 아는지, 자신의 합격 소식이 믿기지 않는 듯 거듭 확인에 확인을 했다.
“안 믿어지면 꼬집어 줄 수도 있어. 얼굴 말고 여기를 말이야.”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시연이를 향해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점퍼 안으로 슬며시 손을 집어넣고 봉긋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흑···.”
“어때? 꿈 같아?”
“음···. 잘 모르겠어요.”
“뭐어? 그렇담 좀 더 깊숙이···.”
“앗! 아···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농담. 꿈 아닌 거 인정할 테니까, 그만요. 히잉.”
짓궂은 행동을 장난스럽게 받아들이던 시연은, 내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화들짝 놀란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은 내 손길을 거절하지 못할 그녀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장난을 그만뒀다.
“합격 축하해.”
“고마워요. 동수씨. 진짜진짜 고마워요.”
“고맙기는. 네가 열심히 해서 합격한 건데, 뭘. 그런데 시연아. 선물은 안 풀어봐?”
“아, 맞다! 선물. 대체 뭔데 이렇게 상자가 커요···? 와아! 코트네요.”
“응. 그건 새해 선물. 인턴이라고 해도 이제 직장인이 되었으니, 직장인다운 트렌치코트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안 그래도 하나 사려고 했는데. 고마워요, 동수씨. 그리고··· 이건 어! 명함지갑이네요?”
“그래. 인턴이라도 KBC는 명함을 준다고 그러더라. 그러니 깔끔하게 명함 지갑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자! 이거 받아.”
“이건··· 동수씨 명함이네요?”
“반갑습니다. 동지마트 TF팀 팀장 마동수입니다.”
“아아··· 반갑습니다. 이번에 KBC 신입 인턴 아나운서 윤시연이라고 합니다. 전 아직 명함이 없네요. 나중에 나오면 꼭 드릴게요. 잘 부탁드려요. 히힛.”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네자 의아한 듯 바라보던 시연이는, 이어지는 내 말에 그제야 이해가 가는 듯 명함을 받고 선물한 명함 지갑 안에 소중히 집어넣었다.
“네 지갑에 내 명함을 제일 먼저 넣고 싶었거든.”
“우와! 감동이에요. 정말정말 고마워요. 동수씨. 그리고 열심히 해서 얼른 동수씨한테 시집갈 수 있도록 할게요.”
“뭐? 하하하하하. 그래. 꼭 기대할게. 새해 복 많이 받아, 윤시연.”
“네. 동수씨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랑해요.”
============================ 작품 후기 ============================
드디어 2011년이 됐습니다.
등산을 좋아해서 등산 이야기를 살짝 집어넣었습니다. ㅋㅋㅋ 한겨울에 지리산을 가보신분만 그 고통을 이해하실 듯. 저는 눈 내린 다음날 일출보러 갔다가 러셀 하느라 힘들어 죽을 뻔 했습니다. 러셀은.. 눈덮인 길을 앞장서서 제일 먼저 뚫고 나가는 겁니다. 이미 앞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을 밟고 가는 것보다 훨씬 힘들죠.
그렇게 열심히 겨울 산을 다닌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이 코 앞이네요. 시간이 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