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4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자! 그만 쉬고 밥 먹자.”
“으악! 밥이다. 밥. 진짜 배고팠어요. 팀장님. 흑흑.”
사흘간 몰아붙인 여파로 정지영 과장과 추미래의 얼굴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초췌하게 변해있었다.
“그래. 알지. 고생했어. 그래서 내가 일부러 오사카에서 제일 맛있다는 초밥집에 들러 특제 초밥으로 사왔어. 많이 먹어.”
“사오신 성의를 봐서 일단 먹겠지만 그래도 정말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건 거의 감금이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래서 아까 미래씨랑 그랬다니까요. 우리 지금 올드보이 찍고 있는 거 아니냐고.”
정지영 과장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초밥을 두 조각을 한꺼번에 입에 넣고, 채 목구멍으로 다 넘기기도 전에 하소연을 시작했다.
“에이. 그래도 올드보이는 너무했다. 내가 두 사람에게 군만두만 주는 것도 아니고. 오사카에서 맛집이란 맛집은 전부 들러 열심히 공수해주는 이런 훌륭한 직장상사를 유지태랑 비교하다니. 뭐··· 생긴 건 좀 비슷하긴 하지만 말이야.”
“컥! 캑캑캑. 팀··· 팀장님 대체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누구랑 생긴 게 비슷하다고요? 네? 지금 혹시 유지태라고 하셨나요?”
“크흠. 정 과장. 체할라. 천천히 먹어. 자! 여기 따끈한 미소국이야. 초밥에는 역시 미소국이지 안 그래?”
“후르릅···. 아! 이거 정말 맛있네요. 아니지. 내가 고작 미소국에 넘어가면 안 되지. 제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건요. 팀장님도 그러셨잖아요. 아이 두는 팀장님에게 자식 같다고. 그런데 누구보다 아이 두에 대해 잘 아실 팀장님은 대체 뭘 하시길래 우리에게 이런 일을 맡기시는 거냐고요! 네?”
내가 손수 미소국까지 떠먹여 줬지만 정 과장의 불평불만은 모터를 단 듯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먹는 족족 입으로 에너지를 보내는 불가사의한 힘이 그녀에게 있는 것 같았다.
“설마 두 사람에게 일 맡기고 놀러 다녔겠어?”
“그렇기야 하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팀장님이 설.마. 우리를 버려두고 놀.러. 다니실 리가 없죠. 그래도 뭐하고 돌아다니는지는 궁금하다고요.”
“첩보놀이 중.”
“첩보놀이요? 뭔가요? 대체 그건!”
“하하하.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동그랗게 눈 치켜뜨고 노려보지는 말라고. 조세핀 스톤 이사 뒤를 밟는 중이야.”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 제휴하기 위해서 반드시 공략(?)해야 할 사람이 조세핀 스톤 이사였다. 일단 그녀에 대한 대랴적인 정보를 본사에 고현호 상무에게 요청했지만, 그 정보가 도착하려면 아직 며칠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직접 발로 뛰기로 했다.
나는 미숙해도, 내겐 유능한 윤권이가 있어 별 어려움은 없었다. 조세핀 스톤 이사도 설마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조심스러움 없이 행동이 자유로웠다.
“뒤를 밟아요? 그 여자 아프다면서요?”
“설마 순진하게 그 말을 진짜 믿은 건 아니지?”
“전부 믿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컨디션이 안 좋다는 말은 믿었죠. 최소한 생리라도 하는 줄 알았다고요.”
“그건 나도 알 수 없지. 어쨌든 사흘 내내 열심히 돌아다니기는 하더라.”
“와···. 진짜 나쁜 여자네. 아프다고 면담까지 미루더니 열심히 돌아다녀요? 아참! 그런데 그 여자 어떻게 생겼어요? 제 예상처럼 예뻤어요?”
“글쎄. 뭐··· 그냥 무난했던 것 같아.”
“음···. 말이 좀 수상한데요. 윤권씨!”
“네? 과장님?”
“조세핀 스톤 어떻게 생겼어요?”
“예··· 예쁘던데요.”
아···. 곧바로 이실직고해버리는 윤권이. 운동할 때는 엄청난 순발력을 보이던 녀석이 이럴 땐 참 어리버리하다.
솔직히 예쁘긴 했다. 정말 ‘스톤’이라는 성 때문인지 샤론 스톤과 꽤 닮았고, 몸매도 상당했다. 큰 기에 길게 뻗은 다리와 잘록한 허리 그리고 꽤 풍만한 가슴은 오사카 남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시연이에 비하면 여기저기 부족한 면이 많이 보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혹시 두 사람··· 미행이 목적이 아니라 그 여자 외모에 빠져서 따라다니는 건 아니죠?”
“하하하. 설마. 예쁘장한 얼굴인 건 인정하는데 시연이보다 많이 부족했거든!”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윤 작가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급 외모라고요. 팀장님은 정말 복 받은 줄 아셔야 한다니까요. 아니었으면 조세핀 스톤 이사에 빠져 우리는 나 몰라라 하고 그 여자만 꽁무니만 따라다녔을 거라고요.”
“꽁무니를 따라다녔을 거라는 건 인정 못 해도, 시연이가 여신급 외모라는 건 인정. 그런데 정 과장. 월드 베리어스 클럽에서 연락 온 건 없지?”
“네. 없었어요.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으셨어요?”
“원래 그쪽에서 이삼일 안에 연락 주기로 했잖아. 사흘이 지났으니 나 모르는 사이에 연락이 왔나 싶어서.”
“아뇨. 저···언혀 없었어요. 아프다고 거짓말까지 우리를 피한 여자가 고작 사흘 만에 만나자고 연락을 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팀장님. 조세핀 스톤 이사, 그 여자 대체 뭐 하고 다니던가요?”
“잠깐 다나카 아크로바틱 관계자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대부분은 그냥 놀러 다니더라. 온천도 가고, 근처에 명승지도 가고, 오사카에 있는 유명한 맛집도 돌아다니고, 가끔은 면세점에 들러 쇼핑도 하고···. 어이. 정 과장. 얼굴이 왜 그래?”
조세핀 스톤 이사의 행적을 듣고 있던 정지영 과장의 얼굴이 분노에 찬 듯 붉게 변했다.
“약올라서요. 제가 꿈꾸던 모습이잖아요. 누구는 이상한 남자에게 잡혀 호텔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일만 하고 있는데, 저를 이렇게 만든 당사자는 아주 신나게 여행이나 즐기고···. 그 여자와 저는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는 운명인가 봐요. 이렇게 계속 엇갈리는 걸 보니.”
“크흠···. 방금 말한 이상한 남자가 나는 아니지?”
“그건 팀장님이 알아서 생각하세요. 아이큐가 세 자리만 된다면 그 남자가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겠지만요.”
“오호! 내 아이큐 세 자리 넘어. 그런데 난 아닌 것 같아. 그럼 나는 아니라는 소리군.”
“아·········. 이젠 조세핀 스톤 이사보다 팀장님이 더 얄미워질 것 같아.”
“하하하. 너무 그렇게 약올라 하지 마. 정 과장이 고생한 만큼 조세핀 스톤 이사에게 빅엿을 먹일 수 있잖아.”
“빅엿 좋죠! 그런데 어떻게 빅엿을 먹일 생각이세요? 만나자는 연락도 없는 사람을 두고.”
그건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다. 일단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지. 아니면 놀러 다니는 그녀와 일부러 마주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시치미 떼고 뻔뻔하게 면담 날짜를 다시 잡을지.
“어쩌면 좋을까?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니 너무 하염없을 것 같고. 그냥 우연인 척 만나버릴까? 그럼 면담 날짜는 금방 잡을 수 있겠지만, 스톤 이사의 기분은 굉장히 나쁘겠지? 우연이라고 주장해도 머리가 있으면 우연이 아닌지 알 테니까.”
“그건 좀 어려운 문제네요. 마음 같아서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지만 자칫 처음부터 안 좋은 인상을 주면 실낱같은 희망도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럼 일단 이틀 정도 더 기다려볼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정도면 우리도 충분히 기다려 준 셈이니까요.”
***
이틀을 더 기다렸지만 역시나 월드 베리어스 클럽 측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조세핀 스톤 이사는 일하러 온 게 아니라 관광이 목적인 것처럼 오사카, 교토, 나라, 효고 지역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돈을 펑펑 쓰고 다녔다.
처음에는 첩보 영화를 찍는 마냥 꽤 스릴 있었지만 매일 비슷한 모습만 반복하니 미행도 지루해질 정도였다.
“윤권아”
“네. 팀장님.”
“저 여자랑 같이 다니고 있는 수행원 같은 일본인 있잖아. 아무래도 다나카 아크로바틱에서 파견된 사람 같지?”
조세핀 스톤 이사는 고가의 물건을 사거나, 값비싼 음식을 먹을 때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동안 지켜보면서 어림짐작을 해보니 그녀가 쓴 돈은 족히 수천만 원이 넘어 보였다. 아무리 국제적인 월드 베리어스 클럽 이사라고 해도 며칠간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다. 물건은 스톤 이사가 사지만 계산은 수행원으로 보이는 동양인 여자가 자신의 카드로 결제하는 모습이었다.
“네. 월드 베리어스 클럽 소속 수행원이라면 저렇게 종 부리듯 부릴 수 없겠죠. 열심히 허리를 숙이면서 스톤 이사가 물건을 살 때마다 황공하다는 듯 계산하는 모습이 평범하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나카 아크로바틱밖에는 없겠죠.”
“아주 대놓고 뇌물을 받는 셈이네.
“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본사에 보내면 안 될까요?”
“별 효과 없을 거야. 자신은 일본 지리를 몰라 다나카 아크로바틱의 도움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만이니까. 어쨌든 인제 슬슬 지겨우니까 저 여자 쫓아다니는 것도 그만해야겠다. 가자. 여기가 그래도 우연히 마주치기에는 제일 안성맞춤인 것 같아.”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듯 그녀가 하루에 한 번은 꼭 방문하는 곳이 바로 오사카 우메다에 있는 한큐백화점이었다. 철도역과 호텔지구, 여러 유명 쇼핑몰을 비롯한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곳이라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기도 했다.
다나카 아크로바틱에서 파견한 직원이 함께 있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우리도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월드 베리어스 클럽의 연락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거 어때?]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이사님.]
[그래? 그런데 정말 잘 어울리는 거 맞아? 내가 물어보면 전부 괜찮다고 하니, 아사코의 말에 신뢰가 안 가잖아.]
[아니에요. 이사님. 그럴리가요? 이사님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에게는 뭐든 다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게다가 안목까지 좋으셔서 항상 잘 어울리는 것만 고르시는 것 같아요.]
[호호호. 그런 이야기를 평소에 많이 듣긴 했어. 그래도 아사코.]
[네. 이사님.]
[아사코가 보기에 좀 더 잘 어울리는 걸로 추천해줘. 둘 다 살 수는 없으니까.]
[음··· 제가 볼 땐 둘 다 잘 어울리시는데요? 고민하지 마시고 둘 다 고르세요. 키사라기 사장님께서 이사님이 원하시는 건 뭐든 들어드리라고 했답니다.]
조세핀 스톤 이사는 백화점의 한 명품 매장에서 구두를 고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영어로 꽤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나눴고, 덕분에 ‘아사코’라는 여자의 정체에 확실을 가질 수 있었다.
역시 그녀의 정체는 다나카 아크로바틱에서 파견한 수행원이었다.
[그래도 미안해서 그렇지. 지금까지 아사코가 대신 결제한 것만 해도 적은 금액은 아닌데.]
[그런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이사님이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많지 부족한 걸요.]
[사업적으로 제휴하는 걸 가지고 은혜까지야.]
순간 은혜라는 말이 나오길래 뭔가 대단한 관계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제휴를 그렇게 표현한 거였다. 자신을 낮추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드는 특유의 일본식 표현방법다웠다.
이렇게 간도 쓸개도 다 내어줄 것처럼 행동했으니 우리에게 연락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우리도 여기서 그냥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화기애애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크게 심호흡 한 번을 한 나는, 조세핀 스톤 이사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 작품 후기 ============================
조세핀 스톤과의 만남까지 조금 호흡을 길게 끌고 있습니다. 나름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는데 독자님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좀 더 템포를 당겨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