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9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일본어로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웬 또라이 같은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선입견을 가지고 또라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또라이였다.
노란색으로 물든 짧은 스포츠형 머리.
뭐······ 평범하진 않지만 그런 걸 가지고 또라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173 ~ 5cm 정도 되어 보이는 평범한 키. 그러나 그의 팔다리는 말 근육이 연상될 만큼 울퉁불퉁했다. 솔직한 말로 내 팔다리보다 두 배는 굵어 보일 만큼 대단한 위압감이었다.
그러나 과하게 근육이 많다고 또라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몸에 붙어 있는 근육량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니까. 평생 저런 몸을 만들어보지 못한 내가, 그의 노력에 대해 비난할 자격은 없다.
문제는 내가 그의 울퉁불퉁한 근육들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거다. 지금은 2011년 초. 그러니까 1년 중 가장 춥다고 알려진 한겨울이다. 그런데 그는 여자들의 핫팬츠를 연상케 하는 짧은 바지와 여자들의 슬립이 연상되는 얇은 끈이 달린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당당히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에이지입니다.)
(누구요?)
(키사라기 에이지입니다.)
“키사라기 에이지? 그게 누구였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팀원들은 없지만, 눈치가 있다면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키사라기 에이지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아! 그 이름이면 다나카 아크로바틱 사장 이름과 똑같은데요.”
“뭐? 다나카 아크로바틱?”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나는 황당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 봤다. ‘다나카 아크로바틱’이라는 말을 들었는지, 남자는 나를 향해 ‘씨익’ 하며 웃음을 지었다.
(혹시 다나카 아크로바틱의 사장이신 키사라기 에이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 키사라기 에이지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우린 지금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의 미팅에서 물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것도 있고 해서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달갑지 않고 별달리 만나고 싶지도 않은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다. 당연히 말투가 상냥할 리가 없다.
(위로가 필요하실 것 같아서 이렇게 당신을 찾아 왔습니다.)
(위로요? 대체 무슨 위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면식도 없는 인간이 뜬금없이 위로라니 무슨 수작인지 알 수 없었다.
팀원들은 구겨지는 내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 그들에게 키사라기 에이지의 말을 그대로 통역해 줄 상황은 아니었다.
(위로가 안 필요하십니까? 제가 알기로 마동수 팀장님은 조금 전까지 월드 베리어스 클럽 관계자들과 만나고 왔을 텐데요. 안 그렇습니까?)
(크흠···. 아사코라는 여자에게 보고를 받았나 보군요. 그래서 혹시라도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 우리가 제휴라도 맺었을까 봐 걱정이 돼서 찾아오신 겁니까?)
(걱정이요? 하하하. 그것참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제가 걱정을 왜 합니까? 어차피 월드 베리어스 클럽이 거절했을 텐데요.)
(그래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주자,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은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혹시 에저튼 가문 아십니까? 모른다면 어쩔 수 없고. 어쨌든 제가 그곳과 좀 친분이 있습니다. 제가 걱정할 일이 일어날 리가 없죠. 하하하.)
마치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듯 은밀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재수 없게 웃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세핀 스톤 이사는 단순히 반대파라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고 했는데,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은 에저튼 가문의 둘째와 우리가 모르는 모종의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봤을 때 이 자식은 그냥 멍청이였다. 그러니 호텔 로비까지 찾아와 굳이 알릴 필요도 없는 사실까지 알려주며 저렇게 통쾌한 듯 바보처럼 웃고 있는 거다. 유치한 아이같은 도발이었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저 바보 같은 웃음을 멈춰버리게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에저튼 가문이 아니고 그 가문의 둘째와 친분이 있는 거겠죠.)
날카로운 나의 지적에 기분 좋게 웃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호. 아주 쭉정이는 아닌가 보군요. 그런 사실도 알고 있고.)
(하하하. 요즘 유명세 좀 얻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봅니다. 아니면 머리가 나빠서 우리가 동지그룹이라는, 다나카 아크로바틱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회사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던가요. 그러니 쭉정이는 우리가 아니라 그쪽이죠.)
(아······. 그래요? 그렇군요.)
지금 상황에서 동지그룹을 파는 걸 보니 나도 참 유치했다. 그런데 이 자식의 반응이 더 가관이다. 마치 대단한 발견을 한 듯 ‘소우 데스까? 소우 데스네.’라고 말하는데 얼굴에는 조롱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 봐야 그쪽은 월급쟁이고 나는 사장 아닙니까?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대단한 동지그룹은 대체 뭐 하고 있답니까? 우리가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 손잡는 동안 그냥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었답니까? 큰 기업도 아무 소용이 없군요. 이거 혹시 동지그룹, 알고 보면 완전히 속 빈 강정 아닙니까? 하하하하하하하)
이제는 아주 바닥을 구르며 웃을 기세였다.
그래. 어쩌면 저 녀석이 아니라 내가 바보였다. 저런 또라이와 말싸움을 해서 이기려고 했던 내가 바보였다. 저런 놈은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인데 상대를 해준 내가 잘못이었다.
“그만 가자.”
“네? 저 사람은요?”
“그냥 미친놈이었어. 그러니까 상대하지 말고 그냥 가자. 말해 봐야 피곤하기만 해.”
일본어를 모르는 그들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겠지만 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지금 어딜 가는 겁니까?)
(·········)
(지금 무서워서 도망가는 겁니까?)
“뭐래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마. 바보니까 그냥 상대 안 하고 가면 돼.”
(지금 뭐라고 한 겁니까? 나를 모욕한 겁니까?)
(·········)
아···. 집요한 새끼. 그냥 모른 체하면 포기할 일이지,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은 끝까지 따라와서 말을 걸었다. 그런 그를 상대하기 싫었던 나는 그냥 침묵으로 일관했다.
(바보네. 여기서 도망이나 치고.)
(·········)
(어이. 마 상. 남자 맞아? 응? 말싸움이 안 되니까 지금 꼬랑지를 내린 거야? 그럼 덤벼봐. 왜 내 몸을 보니까 싸우기 무서워? 그럼 왼손으로만 싸워줄게. 쫄지 말고 덤벼.)
(·········)
유치한 데다가 집요하기까지 한 인간이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드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순간 욱하는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여기서 말다툼을 해봐야 녀석이 원하는 대로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내가 키사라기 에이지라는 인간을 너무 쉽게 봤던 것 같다.
“꺄악!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며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낯익은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정지영 과장이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에게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 저 사람이 과장님 가슴을 만졌어요.”
당사자보다 오히려 추미래가 더 놀랐는지, 울먹이는 얼굴로 말까지 더듬거리며 지금 상황을 설명했다.
“뭐? 이런 미친 인간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참고 있었던 화가 주체할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이 자식아. 대체 이거 뭐하는 짓이야?)
(오호. 이제야 나를 상대할 마음이 생겼나 보군요.)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그깟 여자 가슴 한 번 만졌다고, 그게 그렇게 화낼 일입니까?)
(뭐가 어째?)
(아니지. 방금 말은 취소합니다. 그깟 여자는 아닙니다. 아주 풍만해요. 순간 손에서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말입니다. 하하하하하.)
이놈은 바보도 또라이도 아니고 그냥 미친놈이었다. 그런 놈과는 말을 섞은 건 그냥 그 자체가 시간낭비였다. 저 녀석이 원했던 것처럼 차라리 처음부터 주먹으로 이야기하는 게 옳았다.
나보다 두 배는 더 두꺼운 팔다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 재수 없는 자식에게 달려가려는 나를 제지하는 손이 있었다. 윤권이었다.
“팀장님. 팀장님은 빠지시죠. 몸 쓰는 일은 처음부터 제 일이었습니다.”
윤권이는 다른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싸움은 힘이 전부가 아니다.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이 아무리 두꺼운 팔다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릴 때부터 전문적으로 격투기를 배워온 윤권이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런데 윤권이가 만만치 않다는 걸 상대쪽에서도 느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보디가드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녀석을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1:2의 싸움. 그래도 나는 윤권이를 믿었다. 지난번 일 대 다수의 싸움에서 보여줬던 놀라운 움직임이라면 덩치만 커 보이는 두 명쯤은 언제든지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오사카 시내 한복판에서 활극을 벌이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잘못은 우리가 아니라 키사라기 에이지가 했다.
윤권이와 상대의 거리가 코앞까지 좁혀졌다. 여유가 있어 보이는 윤권이와 굳은 얼굴의 두 남자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정지영 과장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그만둬요.”
“하지만 정 과장···.”
“저는 괜찮으니까 그만두세요. 윤권씨도 그만두게 하세요.”
“걱정하지 마. 윤권이 저 녀석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놈 아니야.”
“알아요. 하지만 여긴 우리나라도 아니고 일본이에요. 여기서 대낮에 싸움을 벌였다는 소식이 한국에 알려지면 좋을 게 없잖아요. 어떻게든 상무님과 팀장님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으셨어요?”
“그렇지만 저 자식이 한 짓을 봐!”
“내가 괜찮아요. 팀장님이나 윤권씨가 절 걱정하는 마음은 감사해요.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저쪽은 이곳 오사카에서 굉장히 명망 있는 사람이에요. 경찰이 외국인인, 더군다나 한국인인 우리 편을 들까요? 아니면 저 사람을 편을 들까요?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아요. 심기일전해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는데, 괜한 싸움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가긴 싫어요. 그러니까 팀장님. 이쯤 해요.”
옆에서 울먹이던 추미래와 달리 정지영 과장은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목동 미래 백화점 철거 준비를 하던 거친 인부들 앞에서 과감하게 상의를 벗어버렸던 그 패기가 다시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서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 그녀였다. 여기서 싸움을 벌여 경찰이 출동한다면, 과연 그들은 누구의 편을 들까? 상대는 지역 사회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유명 스포츠센터의 사장이다. 그리고 우리는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이 운영하는 다나카 아크로바티글 밀어내고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 제휴를 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일본에 방문한 한국 직원.
누가 봐도, 월드 베리어스 클럽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우리가 원한을 가지고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을 협박하는 거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정지영 과장의 지적처럼 지금은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여기서 끊어서 죄송. 다음편엔 정지영 과장의 멋진(?) 반격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는 길에 선추코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