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0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
“그럼요. 괜찮지 않고요. 저따위 인간이 가슴 한 번 만졌다고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요? 나 정지영이에요. 그 정도로 끄떡도 없어요. 여기서 울고 불면 저런 인간은 더 좋아할 걸요? 자기보다 약한 인간만 괴롭힐 줄 아는 찌질한 놈이니까요. 그러니까 미래씨도 그만 울어.”
여장부같은 대찬 모습은 남자인 내가 봐도 멋있었다.
“과··· 과장님.”
“누가 죽기라도 했어? 바보 같이 울긴 왜 울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이런 일을 겪었다고 움츠러들지마. 그게 바로 저런 변태 같은 놈들이 바라는 일이니까.”
“저···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그럼 괜찮지. 괜찮지 않으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만 해도 화가 나고 억울해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복수를 하는 수밖에···.”
“네? 어쩌시려고요?”
“잘 봐.”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는 정지영 과장을 바라보는 추미래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고 정지영 과장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의, 세 남자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그곳으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 명의 일본인 남자가 잔뜩 경계하며 정지영 과장을 향해 인상을 썼지만 전혀 주눅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역시나 배포가 대단한 여자였다.
그러나 윤권이는 아까의 여유로움이 사라지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나 그들이 그녀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일단은 그녀가 하는 대로 지켜보고 있는 나도 마음이 불안한 건 매한가지였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 걸까? 모두의 시선이 정지영 과장에게 향하는 사이, 그녀는 우리의 예상을 깨고 산보 나온 사람처럼 유유히 그곳을 지나쳤다. 그리고 향한 곳은 바로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이 서 있는 가로등 옆이었다.
자신의 가슴을 만진 파렴치한 인간의 앞에선 정지영 과장. 이건 아니다 싶어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심지어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도 지금의 돌발적인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한 듯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크크크. 뭐지? 아까 내 손길이 그리웠나?)
그는 여자 앞에서 당황한 모습을 보인 자신을 감추고 싶었는지, 더욱 어깨를 펴고 조롱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쯧쯧. 불쌍한 자식. 할 줄 아는 건 약한 여자를 괴롭히는 것밖에 없는 찌질한 자식.”
(뭐라는 거야? 이 여자가 감히!)
“고자 같은 새끼.”
한국어와 일본어가 오고 가는데 희한하게도 대화가 됐다. 둘은 분명 각자 나라 말로 이야기를 했으나 표정이나 억양으로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건방진 년! 이걸 원한 거야?)
자신의 위협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는 정지영 과장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아 버렸다.
그런데도 정지영 과장의 얼굴은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까보다 더 강렬한 비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이런 식의 도발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 한 나는,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얼른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의 그다음 행동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간 정지영 과장은, 소름 끼치도록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어 그의 사타구니를 인정사정없이 움켜잡아버렸다.
(크윽. 이···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짓이야?)
깜짝 놀란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이 얼른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급소를 제압당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쯧쯧. 작네. 작아.”
완전히 당황한 그와 달리 정지영 과장의 행동은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그녀는 왼손의 엄지와 검지로 매우 작다는 세계 공용의 제스처로 남자를 도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히···. 감히······. 크윽···)
“호호호. 이 자식이 아직도 눈빛이 반항적이네. 너 자꾸 그러면 누나가 인정사정도 없이 꽉 잡아버린다.”
(아··· 아니야. 그러지 마.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지금 하려는 거 멈춰, 제발.)
여전히 한국어와 일본어였지만 대화의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
급소를 잡은 손에 아까보다 더 강한 악력이 느껴졌는지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절대 저 자식 편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녀석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으······. 멍청한 자식. 그러기에 어쩌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지영 과장을 도발해.’
만약 저기서 독한 마음을 먹고 손에 힘을 줘버린다면, 그때 느껴질 끔찍한 고통이 절로 상상이 돼버렸다.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을 지켜야 할 두 명의 보디가드도 두 눈만 껌벅이며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괜히 그를 보호한답시고 달려갔다가 자칫 정 과장이 손에 힘을 주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두 사람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여유를 되찾은 윤권이가 내뿜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그들을 더욱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뭐래? 타노미 나니도조? 그게 무슨 말이야? 욕이지! 아니 이 자식이 끝까지···.”
지금까지 신기할 정도로 잘 알아듣던 정지영 과장이 갑자기 딴청을 피웠다. 정말 못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저렇게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을 욕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으아악. 노노. 아닙니다. 스탑. 스탑. 플리즈. 쏘리. 아임 쏘리. 플리즈. 스탑. 플리즈. 스탑. 마이 미스테이크. 스탑 플리즈. 스탑.)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지자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것 같다. 더욱 다급해진 그는 눈물까지 흘리며 되지도 않는 영어로 정지영 과장에게 필사적으로 사정을 했다.
“아아. 욕이 아니었구나. 난 또··· 그러게 처음부터 영어로 말하지 그랬어. 그래. 그렇게까지 사정하는데 마음씨 착한 누나가 이쯤에서 용서해줄 게. 앞으론 그렇게 살지 마. 알았지! 호호호.”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의 모습을 보며, 그제야 만족감을 느꼈는지 그녀는 요사스러운(?) 웃음을 날리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혹시라도 보복을 하는 건 아닌 지 걱정했지만 그는 넋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하긴. 소중한 곳을 지켜냈으니 얼마나 다행이다 싶을까?
“휴우···.”
정말 녀석의 거기(?) 터트려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던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솔직한 말로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의 그곳이 터진다면 나로서도 환영할 일이다. 녀석이 한 짓을 생각하면 터지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잘라버려도 시원찮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까 정지영 과장이 지적했듯 이곳은 일본이다. 아무리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이 먼저 성추행을 했다고 해도 거기를 터트릴 정도의 상해를 입힌다면, 그녀를 법으로부터 보호하기는 힘들었다. 처음부터 가장 이성적이었던 그녀도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끝낼 생각은 아니다. 여기서 그냥 넘어갈 내가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과 꼼수와 잔머리를 동원해 반드시 복수할 생각이다. 지금은 일단 참고 있는 것뿐이다.
“봤지?”
자리에 돌아온 정지영 과장은 한껏 고무된 얼굴로 추미래에게 물었다.
떡하니 입을 벌릴 채 그녀가 하는 행동을 모두 지켜본 추미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잘 봤지? 이렇게 하는 거야. 미래씨도 예쁘니까 분명히 똥파리 같은 녀석들이 달려들 거라고. 그때마다 바보같이 눈물이나 흘릴 거야?”
“아··· 아니요.”
“주저앉아서 누군가가 도와주길 기다릴 거야?”
“아니요.”
“태준호 대리에게 달려가 전부 일러주면서 대신 혼내달라고 부탁할 거야?”
“아니요. 절대 아니요.”
“그렇지? 그러니까 당황하지 말고 확 움켜잡아버려. 남자는 바로 거기가 약점이거든. 거기만 제압해버리면 천하의 효도르도 미래씨에게 덤비지 못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그럼요.”
마치 사이비교주와 광신도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지영 과장이 추미래에게 좋은 걸 가르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절대 떨면 안 돼. 여유를 가져. 아까 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떨면 안 돼. 그냥 웃어.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콱 잡아버려. 그럼 게임 오바야. 알았지?”
“네. 과장님!”
“호호호. 그래. 그래야 내 수제자 답지. 그러니까 오늘 같은 일을 겪어도 앞으로 울지마!”
“넵!”
“그렇지. 대답도 그렇게 씩씩하게 해야지. 그건 그렇고 팀장님.”
그런데 추미래와 살가운 사제지간처럼 이야기를 나누던 정지영 과장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응? 왜왜왜?”
“호호호.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제가 팀장님 거길 터트릴 것도 아닌데.”
깜짝 놀란 내가 말을 더듬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그럼 절대 그럼 안 되지.”
“당연하죠. 팀장님이 윤 작가님을 울리지만 않는다면 절대 그럴 일 없어요.”
“하하하. 당연한 걸 가지고 그래. 내가 시연이를 울린다면···.”
“울린다면요?”
“그건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일 거야.”
“와···! 그 말 꼭 기억할게요.”
“그럼. 그럼. 그런데 왜?”
“상황이 정리된 것 같으니 이제 그만 가시죠?”
“그럴까? 알았어. 가자고. 윤권아! 눈싸움 그만하고 인제 그만 가자.”
“네. 팀장님.”
나의 부름에 윤권이는 후다닥 우리 쪽으로 달려왔고 녀석과 대치하고 있던 두 남자는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 쪽으로 황급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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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그녀 정지영 과장..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