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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362화 (362/424)

00362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조세핀 스톤 이사의 친구인 데이지 오하라 사장 또한, 시연이나 조세핀 스톤 이사에 미치지 못할 뿐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 덕분에 세 명의 미인에 둘러싸여 아주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조세핀 스톤 이사나 데이지 오하라 사장이 놀랄 만큼 시연이의 영어는 유창했고, 그때부터 세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시연이만큼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나는 대화에 끼어드는 걸 포기하고 그냥 열심히 귀만 열어두어야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말이 너무 빠른 데다가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일종의 관용구 같은데 이해 불가)이 자주 나와 알아듣기도 쉽지 않았다. 그저 여유있는 표정으로 웃음을 띠며 알아 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다고 자존심이 상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시연이가 뛰어난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고, 다행히 나라는 인간이 남자가 여자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잘하는 면이 있으면 그녀가 잘하는 부분도 있는 법인데, 사소한 일까지 이기려고 아득바득 심력을 낭비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냥 흐뭇한 얼굴로 자랑스러워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영어 번역본이 손댈 곳이 거의 없을 만큼 완벽하다 했더니, 역시 윤 작가님의 영어 실력이 뛰어난 거였군요. 대단해요. 미스터 마보다 훨씬 뛰어 난대요?]

[하하하. 그렇죠? 제가 그랬지 않습니까? 저보다 낫다고.]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죠. 미스터 마도 열심히 해야겠어요. 윤 작가님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처음엔 몰랐는데 조세핀 스톤 이사가 왠지 나를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과민반응을 수도 있지만 어제 시연이와 나눴던 대화 덕분인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허투루 느껴지지 않았다.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진 않을 겁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담담한 시선으로 조세핀 스톤 이사를 바라봤다.

[하하하. 별말씀을요. 저는 우리 시연이가 자랑스럽기만 한데요. 약혼녀는 나의 라이벌이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라는 의미입니다. 경쟁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죠. 게다가 시연이가 뛰어나면 제가 배울 수도 있고 더 좋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태연한 나의 대답에 여전히 의문을 표하자, 옆에 있던 시연이가 끼어들었다.

[그럼요. 우리 동수씨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요. 마케팅 능력으로는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 우리 동수씨에요.]

맙소사.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 나라고?

시연이가 끼어드는 건 좋은데, 그녀가 나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사실은 잠시 잊고 있었다. 저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시연이의 모습을 보며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네?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 그 말은 곧 한국에서 최고라는 의미인 건가요?]

[그럼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지 몰라도 제 눈에는 분명히 그렇게 보여요. 한국에서는 미다스의 손으로 불릴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어요.]

[와우. 미다스의 손이요?]

시연이의 말이 과장됐다고 생각했는지 데이지 오하라 사장이 얼굴에 웃음을 띠며 물었다. 표정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뉘앙스만 보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쳇! 이 여자들이 정말! 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거 맞거든!

[거짓말 같죠? 그런데 사실이에요. 스톤 이사님 정도면···]

[부탁인데 조세핀이라고 불러줘요.]

[나도나도. 나도 데이지라고 불러줘요.]

[그럴게요. 조세핀 이사님. 데이지 사장님. 그럼 저도 윤 작가 말고 ‘션’이라고 불러 주세요.]

[‘션’이요? 부르기 좋은데 무슨 뜻이죠?]

[별 뜻 아니에요. 시연을 빨리 발음하면 ‘션’이 되거든요. 호호.]

[아···! 윤 작가님의 애칭인 거네요? 그럼 당연히 션이라고 불러야죠. 호호호. 그런데 션! 아까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뭐였죠?]

[조세핀 이사님 정도 위치에 있으면 우리 동수씨에 대해서 조금만 조사해도 알 수 있을 걸요? 제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사실을 말하는 건지.]

[와··· 이제보니 션, 미스터 마에게 폭 빠졌군요. 호호호.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해요.]

[그게 뭔데요?]

[미스터 마가 정말 행운아라는 사실이요. 션 같은 여자를 약혼녀로 두고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라고요.]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시연이를 만나고부터 꼬였던 인생이 풀리기 시작했으니, 그녀가 내 행운의 여신인 건 누가 뭐래도 당연한 소리였다.

[하하하. 조세핀 이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제가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고 시연이의 약혼자라서요.]

[미다스의 손이 그런 뜻이었나요?]

[그럼요. 솔직히 제가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실력을 가진 건 아닙니다.]

시연이가 뭔가 말하려는 듯 내게 눈짓을 했지만 나는 손을 살며시 잡으며 답답해하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래도 션이 아주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죠.]

[아직 학생인 시연이 눈에는 그런 저라도 대단해 보이겠지요. 그래도 회사생활 5년째인데 학생보다는 아는 게 많지 않겠습니까?]

[후후후. 글쎄요. 저를 설득하라는 중요한 미션을 고작 5년 차 풋내기에게 맡겼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의미겠죠.]

아까는 자꾸 시비를 걸더니 인제 와서 갑자기 띄우기 시작한다. 이러는 그녀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지 않습니까? 패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설득과정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정치적 이해관계가 관계되어 있지 않았다면 같이 일하고 싶었을 만큼요.]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말이 왠지 거슬렸다. ‘네가 바로 그 장본인이잖아.’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런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여전히 조세핀 스톤 이사가 내게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사람을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라 당혹스러운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곁에서 시연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 사람의 페이스대로 끌려가지 말고 화제를 바꿔버리면 된다. 그렇게 되면 주도권은 내가 쥘 수 있게 된다.

[그런 가슴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어떨까요? 저는 아직도 조세핀 스톤 이사님을 설득하지 못한 게 매우 가슴이 아프거든요. 저기··· 데이지 사장님.]

[네. 말씀하세요. 미스터 마.]

[아까 우리 시연이가 쓴 번역본에 대해 말씀하실 때 거의 손댈 곳이 없다고 칭찬하셨잖아요.]

[그랬죠. 정말 놀라울 만큼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이었으니까요.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이상 그러기가 쉽지 않거든요.]

아직 조세핀 스톤 이사와 정면승부할 확신이 서지 않은 나는 화제를 시연이의 소설로 완전히 돌려버렸다.

잠깐 대화에서 소외되었던 데이지 오하라 사장은, 갑작스러운 나의 관심이 반가운지 미소를 지으며 시연이를 칭찬했다.

[하지만 거의 없다는 건 손댈 곳이 있긴 있다는 의미죠?]

[음···. 호호호.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사실 내일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깐만 언급할게요. 서정적이면서도 위트있는 표현 하나하나는 정말 나무랄 데가 없어요.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건 배경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실이에요.]

[그게 많이 문제가 됩니까?]

[로맨스 소설이라는 게···. 혹시 로맨스 소설 읽어보셨나요?]

[네. 시연이 덕분에 읽기 시작했는데 좋아하는 작가도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말하기 편하겠군요. 혹시 로맨스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뭔지 아세요?]

[가장 중요한 요소요? 글쎄요. 두 사람의 사랑?]

[틀린 말은 아닌데 로맨스 소설에서 사랑은 당연한 거죠. 독자는 어떤 목적으로 로맨스 소설을 읽은 걸까요?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음··· 감동? 아니면 카타르시스? 아니면······ 아! 혹시 대리만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와! 로맨스 소설을 읽으셨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나 보네요. 맞아요. 대리만족. 독자들은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마음에 자신을 감정이입하곤 해요. 주인공이 기쁘면 기쁘고 슬프면 같이 슬퍼하면서 책을 읽죠. 그런데 감정이입을 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전직이 교수나 교사였을까? 데이지 오하라 사장은 질의와 대답 과정을 굉장히 즐겼다.

[아무래도 배경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말이 힌트겠군요. 그럼 소설의 배경이 중요한 건가요? 낯선 한국이라서 감정이입을 하기 어렵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로맨스 영화를 보더라도 미국이 배경이 아닌 경우가 많았어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남녀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이었죠?]

[로맨스 영화의 남녀 주인공이요? 뭐지? 음·········.]

그녀가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선뜻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인종을 말하는 겁니까?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 주인공의 대부분은 백인 남녀였으니까요.]

[바로 그겁니다. 백인 남녀. 솔직히 개인적으론 그게 불만입니다. 사랑 이야기는 아름다운 건데 굳이 인종을 따질 필요가 없거든요. 그런데 유독 백인들은, 저도 백인이지만, 다른 인종의 사랑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 영화도 그렇지만 소설도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결국 남녀 주인공을 백인으로 바꿔 달라는 말씀이군요.]

[그건 안 돼요. 우리 두 사람 이야긴데 주인공 남녀가 백인이라니요. 전 싫어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시연이가 단호하게 거절하고 나섰다. 얼굴 표정만 봐도 반대하는 입장이 느껴질만큼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시연이의 그런 단호한 반응에도, 데이지 오하라 사장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저도 두 분의 사랑 이야기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션을 설득하는 게 어려울 거라는 것도 예상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션. 혹시 책 속 주인공 남녀의 인종을 알 수 없게 만드는 건 어때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사실 이름만 바꾸면 션이 쓴 책에서 주인공 남녀의 인종을 알 수 있는 표현은 거의 없어요. 예를 들어 ‘하얗게 빛나는 얼굴’이라는 표현을 보죠. 이런 표현은 백인이 아니라 황인, 특히 비교적 피부색이 밝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소설에서도 많이 나오죠. 그러니 그것만으로 주인공이 백인인지 황인인지 알 길은 없어요. 하지만 흑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죠. 그러니 ‘하얗게 빛나는 얼굴’이 아니라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 정도로 표현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요?]

[무리는 없어 보이는군요.]

[그렇죠? 그리고 눈동자 색에 대한 표현도 ‘흑요석처럼 깊고 영롱하게 빛난다.’라고 하기보다 ‘아침이슬처럼 아름답게 영롱였다.’고 하는 게 낫겠죠. 표현이 좀 이상하죠? 그냥 예를 든 거니까 뜻만 이해하세요. 저는 작가가 아니라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람이라 션처럼 예쁘고 서정적인 표현은 못 해요. 단지 눈동자 색을 추측할 수 없도록 하자는 말이에요. 다른 건 없어요. 꼭 백인이라고 표현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단지 다양한 인종이 사는 미국인 만큼 주인공에 대한 상상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중요한 건 시연이 의사겠죠? 어때 시연아?]

[잠깐만 생각해볼게요.]

나의 질문에 시연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개인적으로는 데이지 오하라 사장의 말에도 설득력이 있어 보였지만 선택은 그녀가 할 일이다. 우리는 시연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기다리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고민이 많은지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생각해보니 굳이 그런 사소한 표현에까지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다고 우리 이야기가 어딜 가는 건 아니니까요.]

[호호호. 그렇죠? 잘 생각했어요. 션. 내가 생각할 때 션의 글은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꼭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 잘 해봐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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