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3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지 삼 일째 되는 날.
시연이는 아침 일찍 데이지 오하라 사장이 운영하는 Something 출판사로 출발했다. 시연이가 어른들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어차피 따라가봐야 출판 쪽에는 문외한인 내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세핀 스톤 이사와 담판을 지어야 하는 문제도 남아있었다.
마침 그녀가 나를 뉴저지의 에식스 카운티와 허드슨 카운티 사이에 있는 월드 베리어스 클럽 본점으로 초대했고, 그렇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단둘이 있을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나는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세계 최고라는 명성답게 월드 베리어스 클럽 본점의 모습은, 대형 할인 마트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산산조각 내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규모뿐만 아니라 취급하는 품목의 다양성 또한 어마어마했다.
함께 운영하고 있는 명품 아웃렛 매장 안의 제품은 우리나라의 웬만한 백화점 명품 매장의 제품보다 오히려 나아 보였고, 그런 장점은 이곳 본점을 뉴욕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필수 관광 코스로 만들어버렸다.
평일 점심시간이었고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쇼핑하기 그리 좋지 않은 날씨에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점 내부는 물건을 사기 위해 방문한 관광객과 지역주민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와! 대단하네요. 월드 베리어스 클럽이 왜 세계 최고의 대형 할인 마트가 될 수 있었는지 이곳 본점을 보니 알 것 같군요.]
[호호호. 그렇죠? 가장 좋은 제품을 가장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하자는 게 우리 월드 베리어스 클럽의 목표예요. 그 목표를 이루려면 당연히 그에 어울리는 외형을 갖추어야겠죠.]
[그렇다고 해도 규모가 과할 정도로 크네요. 제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한지 좌절 중입니다. 공부가 부족한 것 같아 창피하기도 하고요.]
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껏 대형 할인 마트라고 하면 우리나라처럼 하나의 커다란 건물로 운영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월드 베리어스 클럽 본점은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여러 개의 건물이 미로처럼 연결된 하나의 작은 타운 수준이었다.
[미스터 마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니까 창피할 필요는 없어요. 글로 숫자로 사진으로 아무리 월드 베리어스 클럽에 관해 설명해도 직접 와서 보지 않는 이상 그 실체를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으니까요. 2년 전에 친구들과 캐나다에 갔었다고 했죠?]
조세핀 스톤 이사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던 중 로키 산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옳다구나 싶어 얼른 캐나다 서부 여행 경험을 들려줬었다.
[네. 정말 환상적인 여행이라고 이야기했었죠.]
[네. 환상적이라는 말 말고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는 곳이죠. 그런데 그런 표현은 예전에도 많이 들었어요. 캐나다 서부에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은 하나같이 ‘판타스틱’이라고 이야기했죠. 하지만 막상 가보니 어땠어요? 그런 설명으로는 부족했죠?]
[네. 책과 사진을 통해서 큰 기대를 하고 갔는데 현실은 더 대단했었죠. 너무나도 멋진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더군요.]
[우리 월드 베리어스 클럽이 바로 그런 곳이에요. 직접 와보지 않는 이상 얼마나 멋진 곳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곳.]
자신의 직장을 소개하는 조세핀 스톤 이사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솔직히 부러웠다.
물론 나도 동지그룹에 다니는 내가 부끄럽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와 내가 생각하는 자부심은 서로 달랐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 핵심 부서에 다닌다는 자부심, 남들보다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자부심, 남들보다 진급이 빠르다는 자부심. 이런 식으로 남들과 비교를 통해 느끼는 가장 저급한 수준의 자부심만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조세핀 스톤 이사는 월드 베리어스 클럽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 느껴지는 그런 자부심이었다.
[월드 베리어스 클럽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군요. 부럽습니다.]
[사랑이요? 당연하죠. 제 청춘이 고스란히 담긴 곳인데요. 미스터 마는 안 그런가요?]
[글쎄요. 아직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아직 청춘을 다 받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뭐라고요? 그 말은 그러니까 내 청춘은 이미 끝났다는 말?]
[네?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뜻으로 말했겠습니까? 지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저와 조세핀 이사님 두 사람 중 누가 더 어려 보이는지. 열이면 열 모두 이사님을 선택할 겁니다.]
[그건 제가 동안인 것도 있지만 미스터 마가 동양인답지 않게 노안인 것도 이유겠죠. 호호호.]
[큭···. 너무 정곡을 찌르셨는데요.]
[전 원래 빈말을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미스터 마.]
[네. 이사님.]
[아직 동지그룹에 대한 애정은 없다고 해도 다른 곳에 대한 애정은 있지 않아요?]
[다른 곳이라면 어떤 곳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를테면 동지마트?]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조세핀 스톤 이사에게 나를 소개할 때 동지그룹과 D&Y 피트니스 센터 소속만 밝혔다. 이미 떠나온 동지마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동지마트라니···.
[거긴 어떻게 아십니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스터 마에 대해 조사를 좀 했거든요.]
[저에 대해서요? 제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던가요?]
[글쎄요. 그건 좀 더 두고 봐야 알 것 같은데요. 하지만 제 직감이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미스터 마를 신경 써요.]
[제가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이던가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이미 임자 있는 몸이라서. 제게 빠지면 곤란합니다.]
[풉. 그런데 어쩌죠? 저는 벌써 미스터 마에게 빠졌는데.]
나를 조사했다고 솔직히 밝히는 조세핀 스톤 이사. 그녀의 말투에서 묘한 경계감이 느껴졌다. 제대로 담판을 짓기도 전에 이러면 곤란할 것 같아, 나는 얼른 되지도 않은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는 색기어린 웃음으로 오히려 나를 도발했다.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렇게 대놓고 매혹적인 웃음을 짓는 건 정말정말 진심으로 반칙이다.
저런 매력을 거부할 수 있는 남자가 대체 얼마나 될지 호기심이 생길 만큼 아찔한 유혹이었다.
[아쉽네요. 제게는 시연이가 있어서.]
[쳇! 역시 어린 여자가 좋은 건가요?]
[설마요. 사랑하는 여자가 좋은 거죠. 하하하.]
[뭐라고요? 와···. 미스터 마에게도 이런 뻔뻔한 면이 있을 줄이야. 그렇다면 제가 포기해야죠.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데. 호호호. 그런데 제가 갑자기 동지마트 이야기를 꺼내서 놀랐나요?]
[네···. 솔직히 좀 의외였습니다.]
[어제 션이 그랬잖아요. 미스터 마가 한국에서는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고요. 그 말이 신경 쓰여서 제가 잘 아는 한국통에게 물어봤죠.]
[하하하. 그건 그냥 행운아라는 뜻인데요?]
조세핀 스톤 이사가 어떻게 젊은 나이에 월드 베리어스 클럽이라는 거대 기업의 이사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녀는 그냥 사소한 대화에서 나왔던 이야기들도 절대 허투루 듣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에이 겸손하시기는요. 그 친구가 미스터 마를 알더군요. 재계 쪽에서는 한국통이라고 해도 웬만한 거물급 아니면 기억을 잘 못 할 텐데, 미스터 마의 이름을 듣는 순간 바로 알아듣더라고요. 그 정도면 상당한 거물이라는 뜻이거든요.]
[거물이요? 제가요? 고작 팀장인데요.]
[저도 그게 의외였는데, 지금 재계에서는 미스터 마의 행보를 굉장히 주시하고 있다고 했어요. 정말 손대는 기업마다 대성공을 거뒀다면서요? 미다스의 손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게. 특히 동지마트에서 시행한 두 가지 프로젝트는 국제적 관심을 받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그러더군요. 아무리 한국이 작다고 해도 당일 주문 당일 배송이라니 정말 놀라워요. 미국은 당일 배송이 불가능하죠. 하지만 최대한 빠른 배송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배달 드론은 바로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고요. 그런데 그런 첨단 기술이 아니라 시스템만으로 가능하게 만들었잖아요. 정말 대단한 거죠. 역시나 제 직감이 틀리지 않았어요.]
[과찬이십니다.]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데 아닌 척하는 건 무의미했다.
[그 동지마트에 대해서는 어때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인지?]
[동지마트에 대한 애정은 제가 월드 베리어스 클럽에 가지고 있는 애정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 그건 그렇군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던 곳이니. 어떻게 보면 제 자식 같은 곳이죠.]
[바로 그 느낌이에요. 제가 월드 베리어스 클럽을 사랑하는 느낌이요.]
[어떤 말씀인지 알 것 같군요. 이사님이 월드 베리어스 클럽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요.]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피땀 흘려 키웠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곳이 바로 동지마트였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조세핀 스톤 이사가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 또한 시연이에게 자극을 받아 정말 열심히 조세핀 스톤 이사에 대해 조사를 해왔고, 그걸 토대로 반드시 미국에 온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생각이다.
[그렇죠? 그나저나 거물씨.]
[하하하. 그냥 미스터 마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럴까요? 사실 D&Y 피트니스 센터에서 나를 설득하기 위해 미스터 마를 보냈을 때 솔직히 기분이 나빴어요. 미스터 마도 보셨다시피 나는 월드 베리어스 클럽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곳의 이사라는 것도 굉장히 자랑스럽고요. 그런데 그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아무리 높게 봐도 중간관리 정도밖에 안 되는 초짜를 보냈다? 기분 좋을 리가 있겠어요?]
조세핀 스톤 이사의 지적이 맞았다. 어떻게 보면 그녀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잘못된 거였다. 조급한 마음에 여러 면에서 준비가 부족했고, 그러니 실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에요. 이젠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저를 위해 동지그룹에서는 최상의 카드를 뽑은 셈인데 제가 오해한 거죠. 사실 그래서 조금 걱정이기도 해요.]
[걱정이요?]
[네. 걱정이라기보다는 찜찜한 느낌? 화장실에 갔다가 비데를 안 한 느낌?]
[네?]
[호호호. 표현이 너무 좀 그랬나요? 아무튼, 이번 일이 왠지 이대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찜찜한 느낌이 자꾸 저를 괴롭혀요. 이미 계약은 마무리됐고 변수가 생길 일이 없는 데 말이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세핀 스톤 이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나를 바라봤다. 직감이 좋다고 하더니 빈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변수가 생길 일이 없다는 그녀의 말은 틀렸다. 이미 변수는 일본발 중국행 열차를 타고 맹렬한 속도로 이동 중이었다.
나는 찜찜한 표정의 조세핀 스톤 이사를 보며 담담히 웃음을 지었다. 공은 이제 내게 넘어왔다.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준비한 대로만 제대로 풀어낸다면 어렵지 않게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정말 놀랐습니다. 짧은 시간에 저에 대해 그렇게 많은 걸 알아오셨다는 사실이요. 그런데 저도 이사님에 대해 조금 조사를 해봤습니다.]
============================ 작품 후기 ============================
이야기가 조금 겉돌았죠. 본격적인 스토리에 돌입합니다.
가시는 길에 선추코 부탁드려요~ 남는 쿠폰도 사양하지 않습니다. 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