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5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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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시 조이봉 시장후보 선거사무소.
보궐선거가 3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 양궁은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보다 국가대표가 되는 일이 더 힘들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OO시에도 매년 이런 비슷한 말이 돌곤 한다. 바로 OO시 보궐선거보다 민국당 당내경선에서 승리하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다. 그만큼 OO시가 민국당의 대표적인 표밭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당내경선에서 승리하고 그 기세를 몰아 보궐선거 준비에 돌입했던 조이봉 시장후보 선거사무소의 분위기는 앞선 말이 무색하리만치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친 것도 있지만 그와의 경선에서 패배한 박도식이 결과에 불복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게 가장 큰 타격이었다.
박도식은 OO시 전 국회의원이다. 하지만 갑자기 터진 조카 성추행 사건으로 지지난 경선에서 탈락했고 덕분에 다른 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그렇게 어부지리로 무난하게 국회의원 자리에 오른 김춘갑 의원이, 경선과정에서 불법적인 선거운동을 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의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 바람에 OO시는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고, 그 사이 박도식은 제수씨와 조카를 협박하여 성추행 사건을 없던 일로 무마시켜 버렸다. 그의 동생이 몇 년 전 사고로 죽고, 안타까운 마음에 딸처럼 생각하고 아끼다 보니 생긴 오해였을 뿐이라며 언론에 해명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박도식에게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했다며 울면서 기자회견을 하던 처연한 조카딸의 모습을 기억하는 대중들은 대부분 그 해명을 믿지 않았다. 그냥 돈과 힘으로 동생 가족을 압박한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뿐이었다.
문제는 박도식의 뻔뻔함이었다. 그는 대중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OO시 민국당 경선에 입후보하고 당당하게 선거에 임했다. 어쨌거나 피해자와 합의를 하고 사건 자체가 종결된 상황에서 3번이나 국회의원을 역임한 베테랑을 후보 등록에서 배제하는 건 민국당 수뇌부도 막기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경선에서 탈락했고, 박도식을 후보에서 탈락시키지 않은 수뇌부에 대한 여론의 비난도 금방 수그러졌다. 그런데 박도식이 경선에 불복하고 OO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면서 상황이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으나 10년 넘게 OO시 지역구를 지켜온 터줏대감의 위력은 대단했다. 여론조사 결과 박도식을 지지하는 지지율이 조이봉의 지지율보다 1.5배 가까이 높았다. 대중들은 이건 박도식의 힘이 아니라 OO시 유권자들의 멍청함 덕분이라며 조롱했지만, 그런 비난이 여론조사 결과를 뒤집지는 못했다.
박도식은 이 모든 게 음모라고 자신은 억울하다며 유권자들을 설득했다. 조이봉은 민국당 당대표인 조일봉 최고위원의 동생. 조일봉 의원이 자신의 동생인 조이봉을 OO시 국회의원으로 만들기 위해 박도식의 제수씨와 조카를 매수했다는 식의 주장이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지만, 상당히 많은 유권자가 그 말을 믿고 지지를 보냈다. 특히 오랫동안 밀월관계에 있던 OO시의 부유층의 강력한 지원은 박도식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는 형국이었다.
박도식은 영리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단지 박도식을 지지할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허접한 음모론적 프레임이지만 그렇게 명분을 억지로 만들어냈고, 덕분에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힘들게 유지하던 그의 정치생명에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휴. 그러니까 이번 여론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라 이 말이지?”
“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후보님.”
조이봉의 한숨에 보좌관인 이후성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경선에서 힘겹게 승리했을 때만 해도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장밋빛이 아니라 핏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붉은 색이지만 상황은 극과 극이었다.
“망할 놈의 박도식. 이봐. 이 보좌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다른 놈도 아니고 자기 조카딸을 성추행한 쓰레기야. 빌어먹을 이 동네 유권자들은 눈도 없고 귀도 없데? 어떻게 그런 놈을 지지할 수가 있어. 대한당 놈에게 여론조사에서 밀렸다고 해도 이렇게 기분이 엿같진 않을 거야.”
화를 참지 못한 조이봉이 울분을 토해냈다. 평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보좌관과 단둘이 있는 지금만큼은 자신의 기분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했다.
사실 선거에서 진다고 해도 이렇게 화를 낼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의 패배는 단순히 그 혼자만의 패배가 아니었다. 민국당의 패배이며 그의 형이 당 대표로서 맞이하는 첫 시험무대를 망치는 꼴이 된다.
박도식이 이긴다는 건 조이봉 뿐만 아니라 그의 형인 조일봉의 패배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해도 언론은 이미 그런 식의 대결구도를 만들어 냈고, 당사자들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사각링에 올라간 꼴이 됐다.
대중들의 관심까지 쏠리는 바람에 패배는 곧 죽음(정치생명)을 의미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형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조이봉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박도식의 음모론이 유권자에게 먹힌 것 같습니다.”
“어이가 없군. 그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선거에서 중요한 건 팩트가 아닙니다. 명분이죠. 어쨌거나 박도식은 누가 뭐래도 이곳 OO시 터줏대감입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박도식을 찍어야할 명분만 있으면 충분한 것 같았습니다.”
“미치겠군. 무슨 광신도들도 아니고, 거짓이든 아니든 명분만 있으면 된다니. 그럼 결국 이렇게 손가락만 빨다가 선거에서 져야 한다는 뜻이야? 방법이 없어?”
보좌관이 무슨 죄이겠느냐마는, 조이봉은 답답한 마음에 눈앞에 있는 보좌관을 닦달했다.
“그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있어? 방법이? 어떤 방법?”
“그런데 확실한 건 아니라서 말씀드리기가 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잖아. 일단 들어나 보자고.”
“후보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박도식을 지지하는 가장 큰 세력이 바로 이 지역 부유층입니다.”
“알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공약으로 낸 친서민 정책은 당에서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야. 우리 당뿐만 아니라 대한당도 상황은 마찬가지고. 여기서 나 혼자 살겠다고 친 서민정책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총선에서 승리하려면 서민들의 표가 가장 중요하니 어쩌겠어? 쇼든 뭐든 해서 잘 보이는 수밖에.”
조이봉이 개인적으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당 차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친 서민정책을 포기한다면, 그 의도에 대해 당 전체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바로 조이봉이 민국당 대표인 조일봉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친서민정책을 포기하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혹시 ‘내 약혼녀는 여우’라는 드라마를 보십니까?”
“바빠서 드라마 볼 시간이 없는 건 이 보좌관도 잘 알잖아. 그렇지만 이름은 들어봤어. 요즘 그렇게 인기있는 드라마라면서?”
“네. 맞습니다. 그냥 인기있는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랑 지금 선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던 조이봉은, 이후성의 난데없는 드라마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드라마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게 바로 아이두입니다.”
“아이두? 그게 뭐지?”
“탁아소 개념의 일종의 어린이집입니다. 그런데 그냥 평범한 어린이집은 아니라 굉장히 귀적적인 이미지를 가진 어린이집이죠.”
“그런데?”
“지금 지방에서 좀 산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녀나 손자를 그곳에 보내고 싶어 안달이랍니다. 그런데 아이두 유치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더군다나 아이두를 운영하는 곳이 동지그룹이라 힘으로 밀어붙이기도 어려운 상황이죠. 상황은 이곳 OO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의 열풍 덕분인지 아이두를 유치해줄 수 없느냐며 슬며시 도움을 청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어? 음. 그럼 만약 내가 아이두 유치를 할 수 있다면 지금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건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고작 어린이집 하나로 상황을 타개한다는 게 황당무계하게 들리실 수 있겠지만···.”
“아니야. 괜찮아. 하나도 안 황당해. 이 빌어먹을 OO시가 언제는 상식적이었나? 이미 조카딸을 성추행한 개자식을 가장 많이 지지하는 것만 봐도 비상식적이잖아. 그러니 어린이집을 유치하는 게 타계책이 될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어떻게보면 비꼬는 말투처럼 들렸지만 조이봉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할 상황. 방법이 있다면 어린이집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한 것도 해야할 처지였다.
“사실 박도식 측에서 먼저 아이두를 유치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합니다.”
“뭐? 이미 성공한 건 아니고?”
“아닙니다. 조금 전에 보고드린 것처럼 웬만한 압력으로는 눈도 꿈쩍하지 않을 곳이 동지그룹입니다. 그곳의 고대성 회장 성정이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당 소속도 아니고 아무리 당선확률이 높다고해도 무소속으로 나온 일개 후보의 압력에 굴할 리가 없죠.”
“흠. 그런 다행이군. 그 양반 꼬장꼬장한 건 유명하지. 하지만 보좌관. 나도 일개 후보인 걸?”
“같은 후보라도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후보님은 어쨌거나 우리 민국당에서 경선을 통해 당당히 후보에 오르신 분입니다. 게다가···. 그게···.”
“뭔데 그렇게 망설여? 걱정하지 말고 말해. 괜찮아.”
설명을 하던 이후성이 망설이자 조이봉이 재촉했다.
“그게. 후보님에게는 대표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뭐? 지금 형님에게 이걸 부탁하라는 말이야?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도 죄송한데, 날 더 미안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겠어?”
이렇게 화를 낼 줄 알았기에 망설였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이후성은 마음을 다잡고 속에 말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후보님. 이대로 지는 게 대표님에게 더 미안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선거에서 지면 후보님뿐만 아니라 대표님의 정치생명도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방법이 있다면 시도를 해보는 게 두 손 놓고 있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그게 오히려 대표님을 위하는 일입니다.”
“미치겠군. 나더라 고작 어린이집 유치를 해달라고 형님에게 부탁하라니. 나, 조이봉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건가?”
“대의를 생각하십시오. 저는 이게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대표님 말고는 동지그룹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무리 대표님이라고 해도 성공을 장담하긴 어려울 정도입니다.”
“허허참. 의원이 되기 위해 해야할 일이 어린이집 유치라니. 이걸 가지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군. 일단 알겠으니 그만 가봐. 잠시 혼자 있고 싶군.”
“알겠습니다. 후보님.”
‘아이두 유치. 이걸 성공한다고 이번 선거를 뒤집을 수 있을까? 고작 어린이집인데? 아니야. 이 보좌관이 없는 소리를 할 친구는 아니지. 분명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야기를 꺼냈을 거야. 당대표가 나섰는데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 미치겠군. 어린이집 안을 온통 금도배로 꾸민 것도 아닐텐데.’
이후성이 나가자 조이봉은 홀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정이 쉽지 않았다. 고민이 길어지자 그는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확실한 건 이대로 가면 선거에서 패배한다는 사실만.
그리고 잠시 후 조이봉은 고민인 끝난 듯 조용히 전화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