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9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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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가보니까 월드 베리어스 클럽이 왜 세계 1위 대형 할인점인지 알겠더군요. 옆에서 견학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됐습니다.”
짧지만 유익했던 중국 출장이 끝났다. 한국으로 돌아와 고현호 상무에게 업무보고를 하려는데, 외국에서 고생했으니 한국음식이 그리웠을 거라며 보고 장소를 사무실이 아닌 근처 한정식집으로 바꿨다.
그렇지만 나는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의 협업에서 느낀 점을 늘어놓기 바빴다. 고현호 상무도 그런 내 모습이 낯설었는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지? 세계 1위를 하려면 뭔가 달라도 달아야 하니까.”
“사실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 협상에 임할 때 주도권은 우리가 잡고 있었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입맛대로 계약을 따낸 셈인데. 그래서 그런지 제가 그 사람들을 좀 만만하게 봤던 것 같습니다.”
“미친놈.”
고현호 상무는 내 말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가 못마땅한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친놈’이라니···. 갑자기 마음이 상하려고 한다. 내가 누구 때문에 우리 예쁜 시연이와 떨어져 중국에서 생고생을 하고 왔는데 그것도 몰라주고 말이다.
“네?”
“마 팀장아.”
“네. 상무님.”
“그때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의 협상을 잘 생각해봐.”
“뭐가요? 협상이면 협상이지 뭘 생각하라고요?”
“아, 진짜! 너 인마.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러 놓고 모른 척 할 수가 있냐?”
“저야말로 ‘아, 진짜!’입니다. 제가 무슨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고요? 밥 먹자고 불러놓고 대뜸 구박이나 하고,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럴 거면 전 그냥 시연이 보러 가렵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신나게 떠벌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욕을 먹다 보니 말이 곱게 안 나온다.
“어쭈. 똥 낀 놈이 성낸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네.”
“상무님. 밥상 앞에 두고 똥 이야긴 왜 합니까? 밥맛 떨어지게.”
“내가 오죽 답답하면 이러겠냐? 응? 너 그때 중국에 반일 감정 부추긴 거 기억나? 안 나?”
“음···. 그거야··· 그랬었죠. 기억납니다. 당연히 기억나죠. 그런데 그게 왜요?”
“그럼 그거 때문에 양국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전투기까지 떴었다는 것도 기억나지? 너 인마. 월드 베리어스 클럽하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다가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날 뻔했다고. 그런 미친 짓거리를 저질렀으니 천하의 월드 베리어스 클럽이라도 너한텐 한발 양보할 수밖에 더 있었겠어? 설마 잊은 건 아니지?”
“큼큼. 설마 잊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세계 3차 대전은 너무했다. 전 당연히 전쟁이 안 날 줄 알고 그런 거죠.”
사실 잠시 잊고 있었다. 절대 잊으면 안 되는 놈이 다나카 아크로바틱의 키사라기 에이지였는데 사는 게 바쁘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난 진짜 그때 고민이 많았어. 내가 혹시 진짜 또라이와 같이 일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거든.”
“또라이라니요. 저처럼 정상적인 인간이 어디있다고. 그때 그 일은 솔직히 키사라기 에이지 사장이 절 열받게 해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망할 녀석이 정지영 과장한테 자기랑 하룻밤을 보내주면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의 계약을 양보하겠다고 그딴 식으로 말하는데 그걸 지켜봐요?”
“당연히 초죽음을 만들어야지. 그렇지만 그래도 전쟁은 아니지 이 녀석아. 아무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혹시라도 정말 전쟁이 터졌으면 넌 희대의 악당이 되는 거였어. 어쩌면 빈 라덴보다 더 윗줄로 올랐을지도 몰라.”
“에이. 과장도 정도껏 하세요. 그 정도로 전쟁 안 난다니까요. 저도 다 알아보고 적당히 선은 지켰어요.”
“어쨌거나! 월드 베리어스 클럽도 그때 너의 그 또라이 기질을 알아본 거야. 자칫 협상이 마음에 안 들면 ‘정말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했을걸? 그러니까 그렇게 한발 양보한 거지. 중요한 건 월드 베리어스 클럽이 만만했던 게 아니라 마 팀장 네가 미쳤던 거야.”
설명을 듣고 보니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땐 열이 많이 받았고, 그래서 행동이 좀 과격했다. 당시 그 일을 저질렀을 때는 혹시나 국정원에서 날 잡으러 오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악몽까지 꿨었는데, 이젠 가물가물한 옛 기억이 됐다.
“어쨌거나! 상무님도 그룹 이사에서 그룹 상무로 승진했지 않습니까? 후계 구도에서 박빙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입지가 좋아졌고요. 그게 다 아까 상무님이 말씀하신 미친놈 또라이 덕분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하하. 그건 그렇지. 어떻게 잊겠어? 그래서 말인데 지금이라도 그 은혜를 갚을까?”
“은혜를 갚겠다고요? 어떻게요?”
“동지마트 이사로 승진하는 건 어때?”
“네? 이사요? 아직 차장도, 부장도 안 달았는데 무슨 이사로 승진해요?”
“이사가 별거야? 냉정하게 따지면 계약직이잖아. 이사가 되려면 사표도 써야 하고. 그러니 동지마트 이사라면 꼭 차장이나 부장으로 승진하지 않아도 큰 문제 없을 거야. 지난번에 마 팀장도 들었을 거 아니야? 회장님이 동지마트에 대한 전권을 내게 주신 거. 그렇다는 건 이제 예산뿐만 아니라 승진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어?”
“에이. 됐어요. 안 해요.”
“왜? 계열사라서 싫어? 에이. 너무 조급해하지 마. 금방 본사 이사도 될 수 있을 테니까.”
계열사라고 해도 동지마트 시가총액이 얼만데, 그곳 이사 자리가 싫겠는가? 하지만 뭐든 때가 있는 법이다. 내 나이 이제 겨우 32살. 그 나이에 이사로 승진했다간, 모난 돌이 정을 맞듯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돈을 적게 버는 것도 아니고, 이사나 팀장이나 결국 하는 일은 비슷할 텐데 굳이 고생문을 열고 들어가긴 싫었다.
“싫은 게 아니고 너무 일러서요. 제가 이사가 된다고 딱히 하는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이사’ 직함 달면 뽀대 나잖아.”
“아이고 됐습니다. 그렇게 뽀대 나는데 상무님은 동지마트 책임자로 발령났을 때 왜 사장이라는 직함을 쓰지 않고 이사로 머물러 계셨어요?”
“젊은 놈이 벌써 사장이라고 불리면 이상하잖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놈이 벌써 이사가 되면 사람들이 저를 금수저라고 오해해요.”
“오해 좀 하면 어때서?”
“당연히 싫죠. 전 제 힘으로 당당히 이 자리에 오른 게 자랑스럽다고요. 괜한 오해를 사서 제 노력이 폄하되는 건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나이 서른둘에 동지그룹 팀장이면 충분히 뽀내나거든요. 그러니 이사 자리는 몇 년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인데 어쩌겠어. 그런데 아까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뭐야?”
막상 싫다고는 했는데 너무 쉽게 내 맘대로 하라고 하니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래서 사람 마음이 간사한가 보다. 그래도 이사 자리는 아직 아니다.
“아, 그거요. 사실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의 협업에서 우리 팀이 할 일은 끝났지 않습니까? 이젠 김수현 팀장의 팀이 할 일만 남았죠.”
내가 속한 기획마케팅부는 조기훈 차장을 중심으로 나와 김수현 팀장이 이끄는 두 개 팀이 운영되고 있다. 우리 팀이 선발대의 개념으로 개척 임무를 맡는다면, 김수현 팀장의 팀은 후발대 개념으로 행정 및 안정화 작업이 주요 임무다.
예를 들어 나와 우리 팀이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 협업을 하는 동안 DJ 마트 안정화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골든타운 프로젝트까지 관리하는 게 그들의 임무다. 그런데 이제 중국 쪽 일도 김수현 팀장의 몫이 되었다.
좋게 말하면 분업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내가 싼 똥을 그쪽 팀에서 치우는 셈? 이건 너무 과장된 표현이고, 쉽게 말해 귀찮고 복잡한 건 전부 김수현 팀장이 맡아서 한다는 의미다.
“뭐? 김 팀장한테 중국 쪽 일까지 맡기려고? 지금 그쪽 팀이 얼마나 바쁜데. 마 팀장. 너 너무 한 거 아니야?”
“에이. 사실상 DJ 마트 쪽은 거의 마무리된 거로 아는 데요. 그리고 골든타운은 아직 공사 중이니까 별로 할 일도 없잖아요.”
“별로 할 일이 없긴. 하드웨어를 만드는 동안 소프트웨어는 저절로 만들어지나? 골든타운에서 운영할 프로그램 만드는 건 누가 하는데?”
“그건 윤 스포츠센터의 석나련 팀장이 도와주니까 어렵지 않을 겁니다.”
D&Y 피트니스 클럽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부터 석나련 팀장과 같이 일했기 때문에 그녀의 유능함은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운영 프로그램이야 우리보다 석나련 팀장이 훨씬 전문가다. 결국, 공사가 끝날 때까진 별달리 할 일이 없는 셈이다.
“독한 놈. 이제 겨우 숨 돌리는 팀한테 또 일을 맡기려고? 김수현 팀장은 마 팀장 절친 애인이라면서? 그렇게 막 부려 먹어도 되는 거야?”
“갑자기 어이가 없어집니다. 이사님. 지금 제 친구 애인은 걱정되고, 제 애인은 걱정 안 됩니까?”
“왜? 제수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생긴 건 아니지만, 생길지도 모르죠. 요즘 너무 얼굴을 자주 못 봐서.”
“에라이, 이 팔불출 같은 녀석 같으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제 DJ 마트도 안정화 됐으니 동지마트를 다시 성장시키려고요.”
“동지마트를? 어떻게?”
김수현 팀장 그만 부려 먹으라더니 동지마트 이야기를 꺼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반색이다.
“이제 우리 동지마트도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2위 대형 할인 마트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대로 만족할 수는 없죠. DJ 마트의 성장 속도를 생각하면 규모 면에서 3-마트를 추격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사실 DJ 마트 가맹점은 우리 소유가 아니니 거품이 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래서?”
“그래서 진짜 3-마트를 이기려면 동지마트의 덩치를 키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대형 할인 마트는 포화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신규 점포는 신도시에서나 가능할까? 더 이상 점포를 늘리기도 어렵죠.”
“그래서 나도 해외로 눈을 돌릴까 했는데 쉽지 않더군.”
“맞습니다. 해외로 나가려면 월드 베리어스 클럽 같은 공룡들과 대결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죠. 돌파구는 결국 내수입니다. 그것도 딱 한 가지, 아웃렛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아웃렛? 그건 우리나라에도 꽤 있잖아?”
“그래도 대형 할인 마트처럼 포화상태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월드 베리어스 클럽에 비하면 질적으로 많이 부족합니다.”
조사결과 한국의 아웃렛 매장은 미국이나 유럽의 아웃렛에서도 안 팔리는 물건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질적으로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아웃렛이 호황이라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는 이번이 기회였다.
“계속 이야기해봐.”
“일단 우리가 인수한 포에버마트의 경우 아웃렛 매장을 운영하다가 일명 땅콩 사건으로 사업을 접어버렸습니다. 덕분에 포에버마트를 쉽게 인수했으니 우리에겐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당시 포에버마트는 월드 베리어스 클럽 벤치마킹해서 그런지 세 곳에서 할인 마트와 아웃렛을 같이 운영했습니다.”
“그랬지.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럼 그 공간은 지금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데?”
“지금은 일단 창고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별다른 투자비용 없이 언제든 공간 확보가 가능합니다.”
“그건 다행이군. 그런데 우리가 아웃렛을 운영해본 경험이 없잖아. 그건 어떻게 해결하려고?”
“예전에 포에버마트 아웃렛 스토어에서 일했던 사람 중 쓸만한 사람을 데려와야죠. 그리고 이게 가장 핵심인데, 월드 베리어스 클럽이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아웃렛을 시작하는 건 어떻게 보면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 과정을 줄일 수 있도록 월드 베리어스 클럽의 조세핀 스톤 이사가 도와주기로 했다.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서둘러 계획을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뭐? 그쪽에서 그걸 도와준단 말이야? 분명 한국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한국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중국에서 그들과 우리의 관계처럼 일종의 협업 형태로 운영할 계획입니다. 우리는 노하우를 받고, 그들은 로열티를 받아가는 거죠.”
“로열티? 그건 좀 그렇지 않아? 자칫 맨땅에 헤딩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잖아?”
“그런 것이었다면 저도 관심을 안 가졌겠죠. 노하우와 더불어 아웃렛에 들어갈 물품도 지원해주겠다고 합니다.”
“혹시? 월드 베리어스 클럽 아웃렛에 들어가는 물품과 동급으로?”
“아쉽게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들이 직접 한국에 들어오는 게 낫겠죠. 월드 베리어스 클럽까진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까진 맞춰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 말을 빌리자면 월드 베리어스 클럽을 제외한 그 외 세계적인 아웃렛 수준 정도는 된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면 한국 시장은 석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그 정도 수준만 유지할 수 있다면 한국 아웃렛 시장 석권은 문제도 아니야. 확실해? 확실히 그렇게까지 해주겠데?”
고현호 상무도 내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 흥분한 듯 나를 재촉했다.
“네. 물론 몇 가지 우리의 양보가 필요하겠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준입니다.”
“그럼 됐어. 확실하게 계약서 작성하면 바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해.”
“그래요? 음. 아까는 김수현 팀장, 너무 부려먹는다면서요?”
“뭐 어때? 아직 젊잖아. 부려 먹어도 될 나이야.”
“제 친구는요?”
“내 친구도 아닌데, 내 알 바 아니지. 그냥 그쪽은 신경 끄고 얼른 시작하자.”
“하하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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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