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3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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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팀장도 방금 봤죠? 회장님의 모습. 회장님은 이미 고현호 상무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늘같이 많은 사람이 모인 이사회의에서 공개적으로 고평호 상무에게 망신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서둘러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사회가 끝나자 현상태 이사는 다급히 이석근 팀장을 불러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미적거리고 있는 그에게 결단을 재촉했다.
“저도 확실히 느꼈습니다. 하지만 고현호 상무가 아니라 회장님이 목표라니요. 너무 무모한 것 아닙니까?”
“제가 이미 설명했지 않습니까? 절대 무모한 게 아닙니다. 회장님의 세 아들에 대한 경호는 정말 물 샐 틈이 없이 철저합니다. 이 와중에 고현호 상무를 건드릴 계획을 세웠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죠. 하지만 회장님은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등잔 밑이 어둡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그 어떤 누구도 회장님에게 반기를 드리라 상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시는 분이죠. 우리는 그런 고정관념을 역으로 노리는 겁니다.”
“현 이사님. 실패하면 끝장인 건 잘 아시죠?”
“실패하지 않습니다. 회장님의 돌아가신 사모님에 대한 사랑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기 위해 수행원도 없이 홀로 무덤을 찾는다는 것도 이미 이야기했죠?”
죽은 부인에 대한 고대성 회장의 지극한 사랑은 그룹 내뿐만 아니라 재계에서도 꽤 유명한 일이었다.
10여 년 전 그녀가 죽었을 때 후처 자리를 노리던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사업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좋은 집안의 여자도 경국지색이라고 불릴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여인도 그의 마음을 빼앗지는 못했다.
나이가 있다고 해도 평소 철저한 관리로 여전히 건강했다. 남자는 손가락 움직일 힘만 있으면 여자를 원한다는 말을 생각하면 일반적인 상식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고, 한국의 재벌들에게서는 절대 보기 힘든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현상태 이사는 그런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서 약점을 찾아냈다. 가끔 부인이 너무 그리우면 수행원을 동행하지 않고 홀로 그녀의 무덤을 찾는다는 사실이었다. 고진성 부회장이 동행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계획을 실행하는데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을 함께 제거하는 게 그들로선 훨씬 이득이었다. 집안 어른이 없는 상황. 장남인 고정호는 퇴출되었고, 결국 남은 두 형제 중 연장자는 고평호 상무였다. 고평호 상무가 연장자가 아니라도, 이사들이 고현호 상무를 더 많이 지지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고대성 회장만 없다면 지금 현재 보유하고 있는 세력은 고평호 상무가 훨씬 앞섰다.
호의를 가진 이사들은 많지만 적극적인 지지층이 없는 게, 지금 고현호 상무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물론 저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회장님의 그런 행동은 일정한 패턴이 없습니다. 즉흥적이죠. 그러니 사전에 계획을 세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팀장님에게 도움을 청한 것 아닙니까?”
“휴···.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용하기엔 너무 불쌍한 여자입니다. 저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던 여자입니다.”
“실패하면 그렇겠죠. 하지만 성공한다면 일등공신이 됩니다. 그때 가서 보상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착한 여자라서. 회장님의 사고의 자신이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큰 충격을 받을 겁니다. 그때 가서 보상해준들 받으려 할까 의문입니다.”
‘그럼. 그녀 또한 제거하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현상태 이사의 진짜 속마음이었지만 그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절대 변수를 용납하지 않는 그의 성격상 불안 요소인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석근 팀장은 그의 그런 속마음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가 세운 계획도 고평호 상무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생각해낸 고육지책이라고 믿고 있었다. 성공과 양심의 가책 사이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이석근 팀장은, 현상태 이사 또한 자신과 다를 바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설득에 힘겹지만 동조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만약 현상태 이사가 살인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소시오패스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처음부터 이번 계획에 가담하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석근 팀장은 결국 그에게 설득당했고,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기 직전의 기로에 섰다.
“이 팀장.”
“네. 이사님.”
“더는 고민하지 말고 우리 쉽게 생각합시다. 이대로 간다면 고현호 상무가 그룹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건 이 팀장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맞습니까?”
“네. 저도 그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그럼 고민할 게 뭐가 있습니까? 고현호 상무가 집권하는 즉시 우리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입니다.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그야말로 개털 같은 신세가 되는 겁니다. 이 팀장은 그렇게 되고 싶습니까?”
무수히 반복했던 이야기다. 현상태 이사는 그렇게 비슷한 이야기로 반복해서 설득하며, 세뇌하다시피 했다. 이제 이석근 팀장은 현 이사의 말만 들어도 찌질한 자신의 미래가 그려졌다.
지금의 이 자리가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가? 가족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고, 사랑하는 여자도 버리고 올라선 자리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과거의, 아니 과거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돌아가라니···. 절대 그렇게 될 순 없었다.
“아니요. 그건 싫습니다.”
“저도 싫습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골든타임 아시죠? 지금 우리는 골든타임에 들어와 있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그 여자가 신경 쓰인다고 했습니까? 성공만 한다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여자라는 동물은 단순합니다. 물질적 행복.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현상태 이사는 고민할 시간도 감상에 빠질 시간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논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꿀처럼 달콤한 말이었다.
그래. 그녀도 결국 여자야. 내가 성공해서 명품 가방을 안기고, 외제 차를 선물하고, 고급 아파트에 살게 해주면 그걸로 행복할 거야. 이석근 팀장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고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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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볼 수 있을까?」
용건만 담긴 짧은 문장이었다. 그 어떤 설명도, 감정도 담기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서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아는 이진석이라는 남자는 이런 식으로 연락할 남자가 아니었다. 한번 돌아서면 뒤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단호한 남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유진서는 그의 마음이 여려서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남들이 볼 때 차갑기만 한 모습이 사실은 상처받을까 봐 마음이 약해질까 봐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라는 걸 그녀만은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런 남자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났던 그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유진서는 문자의 내용보다 이진석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 연락한 건지 그게 궁금했다.
‘회사 일이 힘들어서 일까?’
‘결혼 생활이 어긋난 걸까?’
‘내가 보고 싶어서일까?’
‘그는 아직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를 사랑해서 내가 그리워서 연락한 걸까?’
의문이,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이진석과 함께했던 추억이 떠올랐고 사무치게 그가 그리웠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메시지에 전부 담을 순 없었다.
「네」
두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들이었다. 유진서는 짧게 답문을 보내고 휴대폰을 닫았다. 그리고 들뜬 마음을 힘겹게 가라앉히며 업무에 집중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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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일은 할 만해?”
“그럼요. 정말 정말 재미있어요.”
KBC 방송국에 인턴으로 입사한 시연이는 요즘 학교 공부하랴 방송국 일 하랴 정말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요즘은 나보다 훨씬 바빠 보일 정도로 일정이 빡빡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내가 뒷전으로 밀린 게 아닐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직장 생활 이야기를 옮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내 서운한 마음을 지웠다. 오히려 힘들지만 열심히 일하며 행복함을 느끼는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학생의 시연이는 어린 느낌이라면 인턴이라고 해도 직업을 가진 시연이는, 한층 성장한 어른스러운 느낌을 줬다. 이제 슬슬 어른 냄새가 풍긴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나는 예전의 풋풋함보다 지금의 어설픈 성숙함이 좋았다.
“그래도 힘들 텐데. 피곤하고 그러진 않고?”
“가끔 잠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있는데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거라서 즐거움이 훨씬 커요. 그런데 동수씨.”
“응?”
“나 이번에 느꼈는데, 저는 아나운서보다 기자가 더 맞는 것 같아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냥 차이나 월드 베리어스 클럽을 취재하면서 느꼈어요. 어쩌면 원고를 읽는 아나운서보다 원고에 들어갈 내용을 취재하는 기자가 내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윤승태 사장님이 시연이를 월드 베리어스 클럽의 준공식에 맞춰 함께 데려가겠다고 선언하자, 나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고민 끝에 시연이를 일찍 중국으로 데려올 수 있는 꼼수를 만들어냈다.
어쨌거나 시연이는 어엿한 직장인. 그것도 우리나라 3대 방송국 중 하나인 KBC의 아나운서였다. 아나운서 하면 역시 뉴스고, 뉴스에는 역시 특종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시연이를 미끼로 KBC가 솔깃해할 뉴스거리를 하나 제시했다. 바로 차이나 월드 베리어스 클럽 내부 공개에 대한 선독점권이었다.
물론 남의 나라에서 오픈하는 대형 할인 마트가 뭐가 그리 대단한 뉴스거리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월드 베리어스 클럽은 다르다. 지금껏 월드 베리어스 클럽이 만든 타운은, 공개될 때마다 세계적인 뉴스가 될 만큼 화젯거리였다. 특히 해당 국가의 전통적 특색을 살리면서도 현대 건축의 세련미를 추가한 건축 양식은, 랜드마크를 넘어서서 도시의 새로운 관광지가 될 만큼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월드 베리어스 클럽이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이번에는 과연 그들이 어떤 독특한 모습을 선보일지 큰 관심을 보이곤 했다. 게다가 시안점은 한국의 애니메이션인 ‘날아라 슈퍼보드’가 타운의 스토리라인에서 한 축을 차지한 곳이다. 그러니 KBC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방송국이나 언론도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 내 제안을 들은 KBC 보도국은 선독점권이라는 말에 슬며시 욕심이 생겼는지, 시연이를 보조로 두고 다른 베테랑 기자나 아나운서를 메인으로 한 특집방송을 만들고 싶어 했다. 내가 다른 많은 언론을 놔두고 굳이 KBC를 선택한 유일한 이유가 시연이 때문인데, 그녀를 들러리로? 차라리 그동안 우리를 많이 도와줬던 김학수 부장의 후배에게 기회를 주고 만다.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럴 거면 없던 일로 하겠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자 마음이 다급해진 KBC 보도국에서 국장과 실무자가 그날 바로 나를 설득하기 위해 중국으로 날아왔었다.
그들과 만난 자리에서 시연이 일부터 분명히 했다.
[나는 단지 내 약혼녀라서 그녀를 메인으로 넣어달라고 요청한 게 아니다.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사심으로 일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번 방송을 한국에서만 아니라 전 세계에 월드 베리어스 클럽을 알리는 데 활용할 계획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람밖에 모르는 KBC의 기자나 아나운서는 곤란하다.
반면 시연이는 그동안 동지마트와 D&Y 피트니스 클럽의 모델로 활동해왔고, 미국 내 출간한 그녀의 소설이 서서히 인기를 얻는 등 인지도가 상당한 편이다. 그리고 마케팅적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D&Y 피트니스 클럽의 주주로서 이번 사업에 대해 KBC에 있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차이나 월드 베리어스 클럽의 총책임자인 조세핀 스톤 이사와 각별한 친분이 있어 인터뷰에도 용이하다.]
라며 명확한 내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무조건 시연이를 고집하는 건 아니라면서, KBC에서 시연이보다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양보할 수도 있다고 슬쩍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제안은 내가 했지만 선택은 너희가 하라는 일종의 책임회피였다. 내가 생각해도 사악했다. 중국집에 직원들을 데려가 마음껏 시키라고 하면서, 자신은 짜장면만 먹겠다고 하는 회사 사장만큼이나 치사했다.
============================ 작품 후기 ============================
여기서 잠깐 끊어 가겠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설악산 소청 대피소 예약에 성공했습니다. 추운 겨울, 사방이 온통 하얗게 물든 설악의 정상부에서 잠 잘 생각을 하니 벌써 기대가 됩니다. ㅎㅎ
그래서 어떻게든 크리스마스 전에 완결을 지을 생각입니다. 앞으로 20편? 크리스마스 전에 마무리하려면 종종 연참을 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힘내야죠. 아자!! 완결 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외전 한두 편 정도는 추가될 수도 있습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후원쿠폰을 주시는 분들도 계셨네요. 몇 달이나 연중했던 제가 뭐가 예쁘다고 ㅠㅜ 정말 감사합니다. 한편으론 너무 죄송해요 ㅠㅜ 제가 어제 말한 쿠폰은 그런 쿠폰 아닌 거 아시죠? 조아라에서 정액 끊으면 주는 공짜쿠폰 있죠? 그것만 주셔도 저는 감지덕지입니다. 혹시 돈독 올랐다고 오해하실까봐... ㅠ
내일은 잘 하면 한 편 더 연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 정도 써뒀거든요.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내일 되어봐야 압니다. 연중을 밥먹듯이 하는 유리멘탈에다 약속은 잘 지키지 않는 불신의 작가잖아요. 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