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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394화 (394/424)

00394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1.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어야 하며, 2. 매력적인 외모는 필수, 3. D&Y 피트니스 클럽에 대한 깊은 이해와 4. 인터뷰어로서의 능력을 갖춘 5. 심지어 총 책임자인 조세핀 스톤 이사와 각별한 친분이 있는 6. KBC 소속 직원이 시연이 말고 있으면 제안해보라는 나의 자신감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한 건 내가 혹시나 개인적인 사심으로 시연이를 밀어붙인다는 인상을 받을까 봐서였다. 물론 시연이를 보고 싶다는 사심에서 시작한 건 맞지만,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 D&Y 피트니스 센터의 홍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보도국장과 실무자 두 사람은 나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고, 그들의 관심은 더 이상 시연이가 아닌 ‘세계’라는 단어로 옮겨갔다. 자신들이 만들 영상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턴사원 문제는 이제 곁가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쉬웠다. 마지막에 덧붙인, 조세핀 스톤 이사와 시연이가 절친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부터는 윤시연 아나운서 말고는 적임자가 없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말까지 들을 수 있었다. 물론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아야 할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가 아는 그녀라면 잘 이겨내리라 믿었다.

시연이는 그렇게 일 핑계로 중국에 왔고, 차이나 월드 베리어스 클럽을 마음껏 취재하며 기자 일에 대해 매력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럼 둘 다 해보면 되지. 남자 앵커의 경우는 기자 출신도 많잖아. 그러니 둘 다 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게다가 아직 인턴이잖아. 업무적 숙련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혹시 방송국에서 안 된다고 하면 나와 버려. 정말 기자가 되고 싶으면 기자로 다른 방송국에 입사면 그만이야.”

“그래도 어렵게 합격해서 아까운데.”

“시연이 너라면 언제든지 또 합격할 수 있어.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걸 해. 원래 20대 초반에는 이것저것 다 해보는 거야. 물론 둘 다 경험해보려면 정말 힘들긴 하겠지만.”

“아니에요. 그건 어렵지 않아요. 지금보다 조금 더 노력하면 되니까. 방송국에서 허락해줬으면 좋겠다. 헤헤.”

“허락해 줄걸? 이번에 월드 베리어스 클럽 취재 그렇게 잘했다면서? 거기 보도 국장하고 일 문제로 잠시 이야길 했는데 칭찬이 자자했어. 그런데 보도 국장이 기자 출신인가 봐? 마음 같아서는 시연이 너를 기자로 키우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금방 들통 날 말을 내가 왜 지어내겠어?”

“걱정 많이 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다.”

베태랑처럼 완벽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시연이 나잇대의 여성이 보여주는 풋풋함과 순수함이 노력하려는 의지와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정말 특별한 특집 방송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조세핀 스톤 이사와 시연이가 나눈 영어 인터뷰 장면은 유튜브를 통해 엄청난 조회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서양 여신과 동양 천사의 만남’이라는 이상한 제목이 더 유명했지만, 시연이를 이용한 특집 방송은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좋게 봐준 게 아니라 좋은 거야.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 알았지?”

“네. 동수씨. 고마워요.”

***

유진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남자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경멸했던 불륜이라는 두 단어가 이제 그녀의 이마에 주홍글씨처럼 낙인 찍힐 것이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글자지만 자신의 눈으로는 언제 어디서든 보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후회하고 싶었지만 후회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게 문자를 받았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예감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갈망하고 있었을지도···.

“안 피곤해?”

“네. 안 피곤해요.”

“그럼 그냥 이렇게 누워있을까?”

“네.”

남자가 보여주는 다정함은 그게 전부였다. 왜 그녀를 찾아왔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그 어떤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진서 또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원래 그런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그의 품에 안겨 살포시 눈을 감았다.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걸 묻는 순간 남자를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호기심을 억지로 눌렀다.

처음만 어려웠을 뿐이다. 자주 만나다 보니 ‘불륜’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안감과 압박감도 많이 희석되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걸 감수하고 남을 만큼 남자와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가 없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지금에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세상 사람에게 불륜녀라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행복이었다.

그렇게 꿈같은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났다.

“회장님은 요즘도 돌아가신 사모님의 묘지에 홀로 찾아가실 때가 있어?”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물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가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혼자 가시기보다는 부회장님과 같이 가실 때가 많아요. 혼자서는 적적하신가 봐요.”

남자의 물음에 유진서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대답했다. 굳이 회장 직속 비서가 아니라도 비서실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회장님의 사모님에 대한 사랑은 참 대단하신 것 같아.”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사람들은 회장님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부르지만, 제가 볼 때 회장님은 정말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에요.”

“훗. 진서 눈에는 세상 사람 모두가 착해 보이겠지.”

“아니에요. 저도 싫은 사람은 있어요.”

오랜만의 칭찬이 부끄러웠을까? 유진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도대체 누가 싫은지 나도 알 수 있어?”

“음···. 누군지 말하긴 어렵지만 분명 있어요. 그런데 회장님 이야기는 왜 물어요?”

유진서는 일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고대성 회장 이야기를 꺼내자 호기심이 생겼다.

“그게. 진서도 들어서 알지? 지난번에 상무님이 회장님에게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일.”

“네. 저도 들었어요.”

“상무님이 회장님에게 실망을 안겨드려 많이 자책하셔. 그래서 직접 만나서 사죄를 드리고 싶은데 기회가 쉽지 않나 봐. 물론 집에서 해도 되겠지만 혹시라도 감정이 더 격해져 둘 사이의 골이 더 깊어질 수도 있잖아. 상무님도 사람이도 보니 회장님에게 서운한 게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고.”

“그 마음 저는 이해가 가요. 제가 상무님이었다면 회장님에게 정말 서운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럼 어떻게 사죄를 하려고요?”

“회장님이 원래 사모님에게는 약하셨잖아. 그러니 사모님 무덤 앞에서 두 분이 만나면 아들에게 호통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 그러면 되겠네요. 정말 잘 이야기됐으면 좋겠어요. 아 참! 그런데 상무님은 회장님을 어떻게 뵈려고요? 시간을 정해놓고 찾아가시는 게 아닌데.”

“매일 찾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지 않겠어?”

“시간도 일정치 않은데 어떻게 그래요?”

“그렇지만 방법이 없잖아. 그렇게라도 의지를 보여야지.”

“저··· 석근씨.”

무조건 어머니 무덤에 찾아가서 고대성 회장이 찾아오길 기다리겠다는 말에 유진서의 마음이 흔들렸다. 회장의 그런 개인적인 일정은 그 누구에게도 비밀이지만 두 부자의 화해를 위해서라면 잠시 그 원칙을 깨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사랑하는 눈앞의 남자를 위한 일이었다.

“응? 왜 그래?”

“그 일은 제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진서 네가 어떻게? 회장님의 행동 패턴에는 규칙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런긴 해요. 그런데 오랜 시간 모시다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일정한 규칙이 보여요.”

“어떤?”

남자는 따뜻하게 유진서의 손을 감싸며 물었다. 유진서는 남자의 낯선 그런 모습이 기뻤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이를테면 회장님의 버릇 같은 거예요. 회장님은 여러 가지 차를 다 좋아하세요. 홍차, 녹차, 커피 가리지 않으시죠. 그렇지만 기분에 따라 마시는 차의 종류는 달라요. 석근씨도 알다시피 저는 커피 담당이고요.”

“그래 예전에 진서가 그랬어. 회장님 때문에 바리스타 공부를 했다고.”

“네. 맞아요. 저도 깊게 공부하기 전까지 커피는 그냥 커피인 줄 알았데 종류가 정말 다양했어요. 그리고 회장님의 기분에 따라 커피의 맛도 달라야 해요. 보통 기분이 좋을 때 커피를 많이 드시는데, 뭔가 꽤 흥미진진한 일이 생기면 진한 커피를 그냥 컨디션만 좋은 날은 옅은 커피를 좋아하세요.”

“그럼 사모님의 산소에 찾아가는 날도 그런 어떤 패턴이 있단 말이야?”

“그런 것 같아요. 100% 확실하다고는 말하지 못해도, 지금껏 한 번도 어긋난 적은 없어요.”

“그래? 그럼 거의 100% 확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금까지는 그랬죠.”

“그게 뭔지 말해줄 수 있어?”

“석근씨 입장에서는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어요.”

“괜찮아. 난 진서를 믿어.”

“음. 제가 아까 말했죠. 흥미진진한 일이 생기면 진한 커피를 드신다고. 그런데 가끔 커피를 1/3밖에 안 드실 때가 있어요. 어떤 이유 때문에 갑자기 기분이 다운되셨다는 건데, 아무래도 사모님이 생각나신 게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럴 때면 어김없이 산소를 찾으시거든요.”

“그게 정말이야?”

너무 쉬워서 그런지 남자는 믿기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 그동안 많은 고심을 했는데 이렇게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다.

“네. 사실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다고.”

“아니야. 황당하지 않아서. 그냥 놀라서 그런 거야. 그럼 진서야.”

“네?”

“혹시 회장님이 커피를 드시다 남기는 날이 오면 내게 연락 줄 수 있어? 그럼 우리 상무님이 회장님과 훨씬 쉽게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렵게 부탁하는 남자의 모습에 유진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도움을 준다면 그가 쉽게 자신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이에요. 그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

“혹시 입장이 곤란할 수도 있는데 이런 일을 부탁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오히려 제가 석근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쁜 걸요.”

“고마워. 진서야. 그럼 염치없지만 부탁 좀 할게. 상무님이 정말 좋아하실 거야.”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정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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