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7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아니야. 안 바빠. 어딘데? 지금 바로 갈게.”
- 데이트하는 데 방해하는 건 아니고?
“전혀. 오랜만에 종현이 네가 보자고 하는 데 당연히 나가야지. 우리 애인은 마음이 넓어서 그런 거 다 이해해줘.”
갑작스러운 결정에 시연이가 샐쭉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충분히 이해해 줄 사람이라 걱정하지 않았다.
- 그래요. 아주 깨소금이 쏟아져서 좋으시겠네요. 이건 원 임자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하하하. 부러워? 그럼 내가 소개팅해줄 게. 원하면 시연이 친구들로 알아봐 줄 수도 있어.”
- 으엑. 동수 형.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요. 나랑 나이가 몇 살 차인데.
“싫다는 소리를 안 하는 거 보니 관심은 없는 건 아닌가 봐? 너랑 시연이 친구면 일곱 살밖에 더 차이나? 그 정도면 딱이야, 딱. 원래 여자들은 멋모르는 학생 때 잡아야 하는 법이거든. 그때가 그나마 순수한 나이잖아. 직장인 돼봐라. 이것저것 재는 게 얼마나 많은지, 가끔 보면 이 여자가 사업을 하자는 건지 연애를 하자는 건지 모를 때가 있··· 다고 얼마 전에 내 친구가 그랬어.”
나도 모르게 옛날 이야기가 튀어나오려는 데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에 얼른 말을 바꿨다.
- 와. 아무리 그래도 일곱 살 차이면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인데. 그러고 보면 형은 정말 사람이 뻔뻔해요. 그런 거 생각하면 안 이해?
“처음에만 좀 그렇지 사귀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아. 일단 예쁘잖아. 내가 전에 이야기했지? 여자는 무조건 예쁜 게 최고라고. 못생긴데 착한 여자? 못생긴데 요리 잘하는 여자? 다 필요 없어.”
- 진짜. 가만 보면 사람이 참 일관성이 있어. 어떻게 이렇게 일관성 있게 팔불출인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잖아. 여튼, 지금 어디야? 나머지 이야긴 만나서 하자. 내가 우리 시연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줄 게.”
- 그런 말 할 거면 안 만날래.
“에이. 네 소개팅 이야기도 같이하면 되지. 시연이보다는 못 해도 꽤 예쁜 친구가 한 명 있어. 내가 가서 사진으로 보여줄 게. 어디야? 지금 나갈 게.”
- 뭐··· 꼭 사진이 궁금해서 그런 건 아닌데···. 지금 여기가 어디냐 면은, 형이 예전에 대학 다닐 때 단골이라면서 몇 번 데려갔던 곳 있지?
“참술가? 지금 거기 있단 말이야? 헐. 넌 왜 남의 대학 술집에서 혼자 청승이야?”
참을 수 없는 술잔의 가벼움. 일명 참술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를 좋아했던 사장님이 지은 술집 이름인데, 예전에 내가 자주 가던 단골집이었다.
대학생 때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대학문화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말에 몇 번 데려갔는데 신기해 하면서도 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인테리어가 워낙 구닥다리라 70~80년대 술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그걸 오히려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도 의외다. 자기 대학도 아니고 남의 대학 술집에 혼자 찾아가다니 말이다.
- 응. 어쩌다 보니. 그리고 우리 학교 앞으로 가면 고생했던 기억밖에 안 떠올라서 즐겁지가 않거든.
“알았다. 지금 가마. 30~40분은 걸리지 싶다. 그때까지 혼자 마시지 말고, 사장님한테 된장김치찌개 좀 끓여달라고 해. 내 이야기 하면 알아서 해주실 거야.”
- 된장김치찌개? 그런 건 메뉴판에 없는데?
“진짜 단골 아니면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 만들기 귀찮다고 단골 아니면 만들어 주시지도 않거든. 생긴 건 잡탕인데 맛이 기가 막혀. 너도 그 맛보면 또 먹고 싶을걸?”
- 그 말 들으니까 갑자기 배고프다.
“그러니까 혼자 술 마시지 말고 기다려.”
- 알았어. 이따 봐.
띠링.
통화 종결음이 들리자 나는 재빨리 시연이 손을 잡았다.
“미안해. 오늘 네가 해주는 요리 다 먹고 싶었는데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다 먹고 싶었다는 말은 거짓말이지만, 최종현의 전화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지만, 안도감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네.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죠. 그런데 누굴 만나는 거예요?”
“최종현이라고 기억나?”
“네. 알아요. 예전에 동수씨 직장 상사였던 분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어머님이 아프셔서 동수씨가 조금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했고요.”
“응. 그 친구. 그 친구가 얼굴 좀 보자고 하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생전에 이런 적이 없던 녀석이라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내가 좀 부채감 같은 게 있거든.”
“부채감요? 동수씨가 그분에게 빚을 진 게 있어요? 오히려 도와줬다면서요?”
“뭐랄까? 되게 어려운 형편에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산 친구거든. 어머님까지 아파서 군대도 못 갔는데, 나는 그냥 군대를 면제받았다는 이야기만 듣고 되게 아니꼽게 생각했어.”
사정을 몰랐을 땐 그랬다. 그러다 우연히 사정을 알게 되면서 미안함 마음이 많이 들었다. 부유하게 산 건 아니지만 대기업에 다니시던 아버지 덕분에 대학 등록금 걱정 없이 작게나마 용돈까지 받았던 내가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는지 반성도 했다.
그냥 그때부터 그냥 잘해주고 싶은 사람이 됐다. 동정이나 연민은 분명 아니지만 내가 가진 선입견에 대해 죄책감이나 부채감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러게 말이야. 네 앞에서 할 말은 아닌데 나도 그땐 어렸나 봐. 하하하.”
“그래서 혹시···미안함 마음 때문에 나가는 거예요?”
“아니. 시연이 너도 내 성격 잘 알잖아. 싫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안 하는 거. 꼭 그것 때문인 건 아닌데 종현이 그 녀석, 알면 알수록 괜찮은 녀석이더라고.”
“그런데 갑자기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요? 설마 어머님이 아프시고 그런 건 아니겠죠?”
내 마음이 어떤지 이해한 듯 마주 잡은 내 손을 쓰다듬던 시연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야.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랬으면 목소리가 다급했겠지. 뭔가 다른 고민거리가 있나 봐.”
“그런데 저··· 팀장님.”
시연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윤권이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응? 무슨 일이야?”
“최종현이라는 분. 혹시 고평호 상무 측 사람 아닙니까?”
“맞아. 그런데 그게 왜?”
“그럼 안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게 무슨 헛소린가 싶어 쳐다봤는데 윤권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아도 현상태 이사의 행보가 의심스럽다면서요? 그런데 하필 그쪽 진영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팀장님은 이게 우연이라고 보십니까?”
“그래서 네 생각엔 이게 함정이라고? 그게 말이 돼? 이렇게 공개적으로 전화해서 날 불러들여 뭘 어떻게 하려고? 설마 납치라도 하려고? 그건 좀 과민반응 같다.”
“꼭 납치 같은 물리적 행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사진을 찍어 고현호 상무 머릿속에 의심을 심어줄 수도 있고, 아무튼 뭔가 팀장님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마음 먹는다면 방법은 많습니다.”
얼핏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얼마 전 통화에서 광우가 ‘윤권이 말만 들으면 안전할 거다.’라고 했던 말도 문득 생각났다. 그렇지만 최종현이 현상태 이사의 사주를 받고 나를 부를 것 같진 않았다.
“그럴 녀석이 아니야.”
“처음부터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돈 때문에 변하는 게 사람입니다. 돈 때문에 친구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는 게 사람입니다. 경호 쪽 일을 하다 보면 제일 큰 문제는 역시 돈이더군요. 그렇게 쉽게 확신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잘 알겠어. 그렇지만 그래도 종현이가 그럴 리가 없지. 최소한 사람도리는 아는 녀석이거든. 그리고 설사 네 말이 사실이더라도 고현호 이사가 그런 이상한 루머에 흔들릴 일은 없어.”
“팀장님. 한 번 더 생각해보시죠.”
“아니야. 이상한 일을 꾸미려면 굳이 참술가에서 만나자고 안 했겠지. 대학가 술집에서 무슨 일을 벌인다고. 그리고 감이 좀 이상해. 비웃어도 좋은데 왠지 꼭 나가봐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
언젠가부터 그랬다.
“휴.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언제라도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저랑 같이 돌아가시는 겁니다.”
“그래. 알았어. 그건 네 말대로 할 게. 이제 된 거지? 그럼 출발할까?”
“네. 알겠습니다.”
***
마동수가 바빠서 못 오겠다고 했으면 그냥 마음 편하게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전화를 끊은 최종현은 처음보다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결정을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렇게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빠져 있는데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심각한 고민 중에도 배가 고프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그 소리에 긴장이 풀리면서 지독한 허기가 찾아왔다.
사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몰려들었다. 문득 조금 전에 마동수가 말했던 된장 김치찌개가 떠올랐다. 돌아가려면 지금밖에 시간이 없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최종현은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며 참술가 사장이 있는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저기.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손님.”
“저··· 혹시 여기 된장 김치찌개라고 있습니까?”
“네? 된장 김치찌개요? 메뉴판 안 보이십니까? 그런 메뉴는 여기 없습니다.”
기대를 하고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당연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없다니, 갑자기 마동수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리다니 고민 끝에 여기까지 온 게 순간 후회가 됐다. 고민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 버릴까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기엔 이상하게도 된장 김치찌개가 너무 땅겼다. 단호한 사장의 표정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한 번 더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저. 그러니까요. 마동수라는 사람의 친한 동생이거든요. 그런데 동수 형이 조금 있으면 여기 온다고 사장님에게 말해서 먼저 시켜놓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된장 김치찌개가 정말 없는 것 맞나요?”
“누구요? 마동수요? 손님이 마동수 그 자식을 아십니까?”
분명히 자기 입으로 단골이라고 했는데 사장의 말투가 왠지 모르게 거칠게 느껴졌다.
“네. 회사에서 알게 된 동생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전에도 여기 두어번 왔어요.”
“그러니까 동수랑 친한 동생?”
“글쎄요. 친한 건 잘···.”
“그래서 안 친하다고?”
“아니요. 저는 친하다고 생각하는 데 동수 형은 어떻게 생각할지. ”
“에이.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친한 사이지. 동수한테 친한 동생이면 내가 말을 놔도 되겠네?”
“네? 아··· 그럼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뭔가 무대포같은 남자였다. 말을 놓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거절은 생각도 안 하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안 된다고 하면 왠지 된장 김치찌개는 못 먹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하하. 그래. 알았어. 동수 동생이라고 그러더니 역시 말귀를 알아듣는 녀석이었군. 그래 어떻게 해줄까?”
“네? 뭘요?”
“된장 김치찌개 먹고 싶다면서? 거기 들어가는 고기가 여러 종류야. 삼겹살, 차돌박이, 목살. 비슷한 것 같지만 서로 맛이 달라. 뭘 넣어 줄까?”
“삼··· 삼겹살이요.”
“오. 역시 뭔가 아는 녀석이었어. 김치찌개엔 역시 삼겹살이지. 동수 녀석은 차돌박이가 더 맛있다고 하지만, 그 녀석은 입맛이 너무 싸구려라 믿을 수가 없어. 너도 그렇게···. 아. 이름이 뭐라고 했지?”
“종현이요. 최종현.”
“그래. 종현아. 종현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하하. 음. 동수 형이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죠. 고기는 다 좋고. 질보다 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까?”
“그렇지! 역시 사람 볼 줄 아는구나. 좋았어. 내가 특별히 서비스로 국수사리도 넣어줄게. 조금만 기다려. 동수한테도 잘 안 해주는 건데 특별히 넣어주는 거야. 고맙게 생각해.”
“국수사리요? 와. 감사합니다. 사장님.”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