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9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꼭 경찰이 개입하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하게?”
“저도 할 수 있지만, 팀장님이 계시잖아요. 팀장님이 하시면 됩니다.”
“뭐? 내가? 야 인마.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
취조는 경찰이 할 일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전문분야도 아닌 일에 어설프게 덤볐다가 일을 망치느니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
“팀장님처럼 사악하신 분이 평범한 직장인이라니요? 절대 아닙니다. 제가 볼 때 웬만한 경찰보다 팀장님이 낫습니다.”
“갈수록 점점···. 너 자꾸 헛소리할래?”
“헛소리라니요? 지난번에 팀장님이 얼마나 잘하셨는데요.”
“내가? 내가 언제?”
“동지마트 황달중 주임. 설마 생각 안 나세요?”
“황달중? 그게 누군···. 아. 예전에 추미래씨 때리려고 했던 그 찌질이?”
동지마트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 현지 조사를 위해 행당점에 몰래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태업을 지시하는 황달중에게 반발하는 추미래를 발견했었다. 화가 난 황달중이 그녀를 때리려는 순간 내가 끼어들어 말렸고, 추미래와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네. 그때 팀장님이 그놈을 어르고 달래서 미주알고주알 행당점 점장의 비리를 모두 불게 만드셨지 않습니까? 그런 능력이면 충분합니다.”
“그건 취조가 아니라 그냥 겁을 준 거잖아. 말로 겁을 주는 거야 나도 잘할 수 있지만, 취조는 다르지.”
“괜찮습니다. 사실 취조까진 필요없으니까요. 그냥 그녀가 닥친 지금 상황이 어떤지 그것만 제대로 알게 해주면 됩니다. 조선 시대로 따지면 궁녀가 다른 남자의 꼬임에 넘어가 왕의 시해에 가담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실만 확실하게 인식시킨다면, 그 여자를 설득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시간이 그렇게 많진 않습니다. 회장님의 변덕이 내일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비서가 궁녀? 사극을 좋아하더니 비유도 참···. 비유는 좀 핀트가 어긋났지만 윤권이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미적거리다가 내일에라도 당장 사고가 발생한다면, 뒤늦게 대책을 세워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래. 알았어. 네 말처럼 이번 일은 미적거리면 안 되는 거였어. 가자. 일단은 고현호 상무부터 만나야겠다.”
***
현상태 이사의 음모를 알았으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고현호 상무에게 보고하고 고진성 부회장님을 만나 이번 일에 대해 논의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 외로 고현호 상무가 받은 충격이 커 보였다.
그는 절대 고평호 상무가 그런 일을 꾸밀 리가 없다고 했다.
“그래. 우리 큰 형과 작은 형이 욕심은 많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선을 넘을 사람은 아니야. 작은 형이 차가운 성격인 건 맞아. 하지만 우리 어머니의 자식이라면 그런 일을 꾸미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알아. 그러니 욕심 때문에 아버지에게 해코지한다? 그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작은 형이 가장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버진데, 그런 일을 꾸미는 게 말이 돼?”
“그래서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고평호 상무가 아니라 현상태 이사가 꾸민 일이라고요. 현상태 이사가 고평호 상무의 의사와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벌린 일입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일을 혼자서 독단적으로 벌릴 수 있지? 마 팀장 너도 그래?”
“필요하다면 그럴 순 있겠죠? 하지만 전 안 그럽니다.”
“필요하다면 그럴 수 있다면서 안 그런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왜?”
“일하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시켜먹는 사람이 상무님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서 굳이 몰래 숨어서 독단적으로 일을 꾸밀 만큼 제가 성실하게 일할 것 같습니까?
안 그래도 일 폭탄이 터져서 죽겠는데 여기서 또 무슨 일을 꾸미겠는가? 하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없다.
“음. 그것참. 묘하게 안심되면서도 서운한 말이네.”
“그 느낌이 맞을 겁니다. 그렇게 들으라고 드린 말이니까요. 그러니 충격을 받으셨더라도 정신 차리고, 같이 해결책을 마련해야죠.”
“휴우···. 마 팀장 넌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아? 마치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여.”
“상무님.”
“응?”
“이런 말씀 드린다고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겁을 주는 거야?”
“회장님은 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흥분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답답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상무님입니다.”
아직도 충격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다소 차가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고현호 상무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솔직히 나도 내 동생이 부모님에게 잔인한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고현호 상무 이상으로 충격을 받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감정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뭐?”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상무님 아버지라고요. 마음은 아프지만 우리 아버지가 아니니 걱정을 하거나 대책을 세워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상무님입니다. 그러니 애처럼 멍하니 있지 말고 정신을 차리세요.”
“마 팀장.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너와 내가 그 정도 사이밖에 안 돼?”
“서운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 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그걸 모르셨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마 팀장, 너 이 자식.”
“이미 예전부터 이전투구였습니다. 개싸움이었다고요. 고정호 사장이 절 납치하려고 한 것 보면 모르십니까?”
“그건 그냥 협박을 하려고 했던 거지 사람 목숨을 노린 건 아니잖아.”
“그건 모를 일입니다. 협박이 안 통했으면 어디 하나 부르트려 병신을 만들었을지도 모르죠. 상무님은 제가 이러는 게 서운하시죠? 그런데요. 저도 솔직히 상무님에게 서운합니다. 제가 납치당할뻔 했을 땐 이렇게 충격받은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가족과 관련된 일에는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며 분노하시잖아요. 그러면서 저보고 서운하다고 하실 자격이 있습니까?”
“와···! 넌 진짜 나쁜 놈이야. 어휴···. 망할 녀석. 하하하. 넌 강철심장을 가졌냐? 사람이 로봇도 아닌데 어떻게 감상에 빠질 시간조차 안 줄 수가 있어? 그러면서도 제수씨랑 사귀는 거 보면 신기할 뿐이다.”
다행히 충격요법이 통했나 보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붉은 혈색이 돌았다.
“시연이는 제 강철심장도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그렇겠지. 제수씨에게 마동수는 하늘이니까. 부러운 녀석.”
“잘 모르셔서 그런데 저도 그만큼 잘합니다. 연인 사이에 일방적인 감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혹 제 말이 서운하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마 팀장 말이 맞아. 아버지가 위험하다는 말에 내가 잠시 흥분한 것 같아. 그리고 현실을 일깨워 줘서 고마워. 그 놈들이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네 말처럼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잖아.”
“그럼 어떻게 할까요?”
“어쩌긴. 방법이 하나밖에 더 있어?”
“역시 부회장님과 상의를 해야겠죠?”
“그럼. 그게 가장 안전하고 깔끔해.”
***
윤진서는 요즘 꿈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비록 불륜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깨달았다. 바보처럼 저절로 웃음이 났다. 동료들이 얼굴색이 좋아졌다며 부러워하는 게 즐거웠다.
그렇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얼굴이 그늘졌다. 원래 이석근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도우 비서실장과의 면담이 잡히는 바람에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집에 일이 있다며 면담을 미룰까 고민했지만, 승진 시기가 맞물려 그럴 수 없었다.
퇴근 후 한층 아래에 있는 비서실 전용 멀티실로 향했다. 회의나 면담이 있거나 그 외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마련된 고대성 회장 비서팀만의 전용 공간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아래층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이곳은 회장 비서팀뿐만 아니라 그룹 임원들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상시 드나드는 곳이라 항상 북적이는 편인데 오늘은 지나가는 사람 한 명 발견할 수 없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왜 사람들이 아무도 없지? 이상하네.”
유진서는 기분 탓인지 갑자기 몰려드는 한기에 양팔을 감싸며 천천히 멀티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사람이 없는 복도에 그녀의 구두 굽이 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야근하는 임원들 때문에 밤늦게까지 언제나 사람이 많아 한 번도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유진서씨.”
“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유진서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복도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놀란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 두근두근 소리를 냈다.
“유진서씨 맞으시죠?”
키가 큰 남자가 다가왔고, 그보다 좀 더 큰 남자가 뒤를 따랐다. 위압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네. 제가 유진서인데 누구시죠?”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마동수라고 합니다. 저, 모르시나요?”
“아! 마동수 팀장님. 알아요. 죄송해요. 갑자기 나타나셔서 제가 좀 놀랐어요.”
처음엔 실루엣만 보여서 누군지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최근 들어 동지그룹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 고대성 회장의 비서인 그녀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니에요. 평소보다 조용해서 그렇지, 마 팀장님 잘못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이도우 실장님과 면담이 있으셔서 오셨죠?”
“예? 네. 맞아요. 오늘 갑자기 면담을 한다고 하셔서.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시죠?”
“죄송합니다만 이도우 실장님과의 면담은 취소됐습니다. 음···. 취소됐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군요. 그보다는 원래부터 면담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차가운 얼굴로 이죽거리듯 말하는 마동수의 모습에 유진서는 더럭 겁이 났다. 엄청난 미인으로 알려진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니 자신에게 수작을 부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원래부터 면담이 없었다니요?”
“처음부터 제가 유진서씨를 만나기 위해, 이도우 실장님에게 일부러 부탁을 드렸습니다.”
“저를요? 저를 갑자기 왜요?”
“글쎄요? 제가 왜 유진서씨를 만나자고 했을 것 같습니까?”
“그건 마동수 팀장님께서 말씀해주셔야죠.”
“혹시 뭔가 예상되는 일은 없으시고요?”
“아니요. 고.대.성. 회장님 비서인 제가 마당수 팀장님과 만나야 할 일이 뭐가 있다고요.”
유진서는 유난히 ‘고대성’이라는 이름을 강조했다. 자신이 회장님의 비서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상대를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자주는 아니지만 최소한 동지그룹 안에서는 굉장히 효과적인 편이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