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가 전부는 아니야-403화 (403/424)

00403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팀장님.”

“응? 왜?”

“방금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집사람에게? 업무 시간에는 전화를 잘 안 하는데 무슨 일이지?”

“그건 말씀 안 하셨어요. 그냥 전화 달라는 메모만 남기셨거든요.”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었어. 알았어. 집에 전화해볼 테니까 미나씨는 상무님에게 홍차 가져다 드려.”

“알겠습니다. 팀장님.”

Rrrr

조미나가 홍차를 받친 쟁반을 들고 상무실을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이석근은, 얼른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응. 나야. 전화했다면서.”

- 네. 물어볼 게 있어서요.

“그래? 무슨 일인데?”

- 승진한다면서요?

“뭐? 당신은 벌써 알고 있었던 거야? 나도 조금 전에 알았는데.”

- 아니에요. 저도 몰랐어요. 아까 30분 전쯤? 아빠한테 들었어요. 평호 오빠가 아빠랑 당신 승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나 보더라고요.

이석근의 와이프인 고연수는 고평호 상무와 팔촌지간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동지그룹 계열사인, 초음파 의료기기를 만드는 동지메디슨의 사장이다.

매출 규모로 따지면 그리 큰 계열사는 아니지만 의료기기 쪽에서는 상당한 기술력을 인정받는 회사다. 그만큼 저력이 있고 안정적이며, 고평호 상무를 강력히 지지하는 세력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동지메디슨의 사장이자 고대성 회장의 육촌 동생인 고호성은 꽤 야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사실 자신의 딸을 이석근에게 준 이유도, 딸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평호 상무에게 신임받는 이석근을 이용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다행히 욕심만 있는 게 아니라 능력도 출중해 평소 고평호 상무와 경영 관련해 이런저런 조언을 주고받는 사이였고, 그 덕분에 이석근의 승진 내정 소식도 누구보다 빨리 들을 수 있었다.

“그랬어? 아버님도 참. 그런 일이 있었으면 귀띔이라도 먼저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 저도 당신하고 똑같이 물어봤는데, 그런 소식은 모르고 들어야 한다고 모른 척하셨대요. 괜히 표정관리 못 해서 미리 알고 있었던 걸 평호 오빠가 눈치채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면서요.

“음···. 그도 그렇군. 그런데 승진 축하 때문에 전화한 거야?”

- 그것도 있고, 아빠가 승진 선물을 준다고 뭘 원하는지 물어보라고 해서요.

“승진 선물? 글쎄. 딱히 필요한 건 없는데.”

- 어휴.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돈을 벌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르는 사람이니까.

이석근은 어려운 형편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겹게 공부를 한 고학생이었다. 항상 아껴쓰는 버릇이 습관처럼 굳었고, 꽤 성공한 지금도 그때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딱히 필요한 게 없으니까.”

- 필요한 게 없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게 뭔지 모르는 거죠. 사회적 지위가 올랐으면 그 지위에 걸맞은 씀씀이도 필요한 법이에요. 승진하면 승진할수록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릴 일이 많을 텐데, 지금의 당신 차림으로는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려워요. 상황에 맞는 차림도 일종의 에티켓이라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인수인계를 하려면 당장 할 일이 많은데.”

항상 이런 이야기만 하면 답답했다. 그래서 아내의 말이 길어지는 게 느껴지자 일을 핑계로 대화를 끊었다.

- 듣기 싫죠? 잔소리라고 생각하니까 듣기 싫은 거죠.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당신이 싫지 않아요. 소박한 품성도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이러는 거예요. 사람들이 당신의 차림을 가지고 뒤에서 수군수군하는 게 싫으니까요. 이런 내가 당신은 그리 마음에 안 들겠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결혼했는데.

“그래. 알았어. 미안해. 나도 그런 게 싫은 건 아니야. 낯설어서 그렇지.”

아내의 말이 맞다. 이미 결혼했는데 어쩌겠는가? 서로 맞춰 사는 수밖에. 계속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이석근도 아내와의 언쟁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 이해해요. 그렇지만 이젠 정말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차장 달고 괜찮은 성과를 보이면 금방 부장으로 승진할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렇게 되면 이사로 승진하는 것도 금방이에요.

“당신이 잘 모르는 가 본데 차장에서 부장은 한참 걸려. 동지그룹은 승진에도 체계가 있어.”

- 그건 저도 알죠. 그런데 그걸 깬 사람이 마동수라는 사람이라면서요.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계열사로 이동하면서 승진. 그 직급으로 본사 복귀. 그런 방식을 이용하면 본사 규정을 피하면서 승진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해요. 아빠가 그랬으니까 확실한 걸 거예요.

예전이라면 본사에서 계열사 발령은 좌천의 의미였다. 그런데 그런 관행을 마동수가 깼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깨달은 사실 중 하나가 본사 규정을 피해 일정 기간을 거치지 않고 승진할 수 있는 꼼수를 발견해낸 것이다.

동지그룹 본사 규정에 의하면 이석근이 차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하려면 최소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계열사를 이용하면 그런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차장은 계열사 부장과 같은 직급. 그러니 부장을 달고 계열사로 이동한 다음 그곳에서 바로 이사로 승진시켜 본사로 발령을 내면 본사 부장이 되는 것이다. 편법이긴 해도 규정에 어긋난 건 아니었다.

아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고평호 상무가 이석근을 전략적으로 밀어주겠다는 의미였다. 이석근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사실에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아버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

- 그럼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요. 아빠가 승진 선물로 차를 사준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아버님이 차를 선물해주신대?”

- 네. 옷이야 제 맘대로 바꿔도 되지만 차는 제 맘대로 결정하기 어려워서 전화한 거예요. 혹시 좋아하는 외국 자동차 브랜드 있어요?

“아니 난 잘 몰라. 그리고 지금 차도 거의 새차잖아?”

- 그건 회사 출퇴근용이고, 사적인 모임에 나갈 땐 좋은 차를 타야 무시를 안 당해요.

“그런가? 나야 감사한데 외국 자동차는 내가 잘 몰라. 당신이 적당한 걸로 골라 주면 안 될까? 그런 건 당신이 나보다 보는 눈이 낫잖아.”

뭐가 좋은 차인 줄도 모르는 자신이 선택해봐야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그래서 이석근은 마음 편하게 결정권을 넘겨버렸다. 어차피 그에게 차는 잘 움직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혹시 좋아하는 색이나 싫어하는 색은요?

“그냥 무난하면 좋겠어. 너무 튀는 건 내가 싫거든.”

- 알았어요. 그럼 튀지 않는 색으로 제가 고를게요. 이따 시간 나면 아빠한테 고맙다고 전화나 한 통 해줘요.

“알았어. 이렇게 신경 써줘서 고마워.”

- 뭘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그리고 여보.

“응?”

- 승진 축하해요.

“그래. 고마워.”

- 그럼 끊을게요.

“응. 이따 집에서 봐.”

전화를 끊은 이석근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오늘은 정말 온종일 좋은 일만 생기는 것만 같다. 어제 아내가 바꾼 베개가 이유는 아니겠지만, 항상 거리감이 느껴지던 그녀마저 왠지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띠링.

그때 그의 휴대폰에서 문자 도착음이 들렸다. 이석근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입력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커피 남기셨어요.]

순간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가 금세 차갑게 굳었다. 그리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현상태 이사는 요즘 계속 한 가지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지만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런 기다림은 익숙했다.

조급함은 언제나 실수를 부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서둘러서 실수하느니 지루한 기다림이 더 나았다. 사실 성공 뒤에 오는 짜릿한 희열을 생각하면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서 기다림이 좋았다. 기다림이 길면 길수록 성공에서 오는 희열감이 더욱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사냥 직전의 그는 항상 낚시꾼의 마음이 된다. 숨을 죽인 채 묵묵히 찌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좋은 낚시꾼은 이런 시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특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월척을 목표라면 더더욱 숨을 죽일 줄 알아야 한다.

차분하게 연락을 기다리던 그는 본능적으로 때가 왔음을 느꼈다. 항상 그랬다. 알 수 없는 전율이 그를 감싸기 시작하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냥이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상태 이사는 뛰어난 사냥꾼이자 낚시꾼이었다.

Rrrr

“네. 현상태입니다.”

- 이사님. 이석근입니다.

“네. 이 팀장. 연락이 왔나 보군요.”

-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글쎄요. 그냥 느낌이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감이 좋거든요.”

- 감으로 그런 걸 느낀단 말입니까?

“후후. 말로 설명하긴 어려워요. 뭔가 귀에 바람을 불 듯 간질간질한 느낌이죠. 어쨌든 연락이 왔으니 됐습니다. 이 팀장은 이제 모른 척하고 계시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사님.

“네?”

- 잘 되겠죠?

“그럼요. 잘 될 겁니다. 이번에도 감이 좋거든요.”

- 네. 이번에도요?

“뭐···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럼 또 연락하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가 길어질까 현상태 이사는 전화를 끊었다. 사냥을 앞두고 곧 느껴질 희열에 대한 기대감에 잠시 냉정함을 잃었던 것 같다. 이제껏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사냥감이 워낙 대어다 보니 평소 이상으로 흥분을 했던 모양이었다.

‘침착해야 한다. 흥분하면 안 된다. 흥분하면 모든 걸 망친다.’

그는 들끓어 오르는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여기서 흥분하면 지금까지의 기다림은 모두 쓸모없어진다.

이석근은 지금까지 수십 수백 번은 반복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던 계획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검토했다. 기다림이 지루했을 뿐 계획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토록 엄청난 대어를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게 처음엔 믿기지 않았지만, 수많은 검토과정에서도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이번 계획을 준비할 때 플랜은 여러 가지였다. 어렵고 정교한 방법도 있었고, 단순하지만 명료한 방법도 있었다. 그중에서 현상태 이사가 선택한 건 단순하지만 명료한 방법이었다. 그의 경험상 변수가 없는 단순한 방법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10분여 시간이 지나고 생각에 잠겼던 현상태 이사가 눈을 떴다. 마지막 검토는 끝났다.

그는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둔 투박한 생김새의 휴대폰을 꺼내서 전원을 켰다. 잠시 후 ‘드르륵’하는 진동음과 함께 휴대폰에 전원이 들어왔고, 현상태 이사는 그곳에 저장된 유일한 전화번호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가 남긴 말은 단 한 마디였다.

“시작해.”

============================ 작품 후기 ============================

이제 정말 끝이 보입니다.

이대로 완결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ㅠㅜ 시원섭섭함과는 약간 다른 느낌인데 말로 표현하기에는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