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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411화 (411/424)

00411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뭐? 그걸 네 멋대로 정했단 말이야?”

현상태 이사와의 만남을 보고하자 고현호 상무의 표정은 황당함 그 자체였다.

“네.”

“네? 그게 끝이야?”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황당하게 보십니까?”

“뭐? 야. 인마. 그런 건 내게 물어보고 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럴 거면 네가 상무해. 내가 팀장 할 테니까.”

“오! 진짜 그래도 돼요? 그럼 고 팀장이라고 부를까요?”

“아우···. 내가 하는 말이 그 뜻이 아니잖아. 눈치도 빠른 녀석이 왜 이렇게 모른 척이야?”

“에이. 어차피 이뤄지지도 않을 건데, 뭐 어때요? 며칠 있으면 회장님이 ‘짠’하고 나타나셔서 모든 걸 뒤집어 버릴 텐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한 번 제 마음대로 해보겠습니까? 혹시 상의도 안 하고 제멋대로 정했다고 삐지셨어요?”

“크흠. 삐지긴 누가 삐져. 그냥 그렇다는 거지.”

고현호 상무는 평소엔 대범하다가도 이상한 부분에서 삐질 때가 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제 정이 많이 들어서 그런지 그런 모습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에이 삐졌네요. 삐졌어.”

“안 삐졌다니까.”

“알았어요. 그럼 안 삐진 거로. 그런데 회장님은 잘 계세요.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노시는 건 처음이잖아요. 되게 답답해하실 것 같은데.”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의외로 지금 생활이 잘 맞으시나 봐. 진작 여유를 이렇게 부릴 걸 그동안 뭐하느라 그렇게 빡빡하게 살았는지 후회가 된다고 하시더라.”

“네? 진짜요? 부회장님이 아니라 회장님이요? 에이. 설마요.”

“설마라니. 진짜라니까. 나도 황당해서 아버지 얼굴을 한참을 바라봤어. 그랬더니 아버지도 당신이 황당한지 ‘피식’ 웃으시는 거야. 그런데 더 황당한 게 뭔지 알아?”

“뭔데요?”

“갑자기 다가오셔서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나가시더라고.”

“헐. 말도 안 돼. 회장님이요? 다른 분하고 착각하신 건 아니고요? 정말 카리스마 넘치는 우리 회장님이 그런 행동을 하셨다고요? 대박. 으으으. 갑자기 오글거려서 소름이 돋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지그룹 직원이라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굳게 만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회장님에게 그런 모습이라니, 진짜 말도 안 된다.

“망할 녀석. 갑자기 분위기 좀 깨지마. 인마 넌 오글거릴지 몰라도 난 아니거든. 아버지랑 그런 스킨십을 해본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 왠지 돌아서는 아버지 등이 작아 보이는데 갑자기 울컥하더라니까.”

“눈물을 흘리신 건 아니고요?”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정말 오랜만에 눈물이 날뻔하긴 했지. 그리고 또 되게 의왼 게 작은 아버지는 조용히 계시는 걸 굉장히 답답해하시더라. 하루빨리 복귀하셨으면 하는 눈치더라고.”

“그럴 만도 하겠죠. 부회장님이 손녀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데요. 손녀가 보고 싶어서라도 얼른 연극을 그만두고 싶으시겠죠.”

“꼭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일이 하고 싶으신 것 같았어.”

“와. 이거 이제 보니 진짜 일 중독자는 회장님이 아니라 부회장님이네요.”

“그러게 말이야. 나도 이번에 좀 많이 놀랐다. 두 분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돼서.”

“그런데요. 상무님. 뭐가 좀 이상하네요.”

어떻게 보면 큰 문제가 없는 일상적인 이야긴데 왠지 이상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응? 뭐가 이상한데?”

“회장님 말입니다.”

“아버지가 왜?”

“전원생활이 회장님에게 맞는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혹시 주주총회에서 반란 세력을 한 번에 날려버린 다음에 혹시··· 회장직에서 물러나시려는 건 아니겠죠?”

“뭐? 아버지가 벌써? 말도 안 돼! 아버지가 그럴 리가 있어?”

“물론 그냥 느낌이긴 한데요. 제가 요즘 신기가 들었는지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잘 맞거든요. 그런데 이거 아무래도 회장님이 보이신 행동이 좀 마음에 걸려요.”

고대성 회장을 내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고평호 상무의 측근인 현상태 이사가 이번 일을 꾸몄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도 자식의 사람이 당신의 목숨을 노렸다는 사실에 생각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고평호 상무가 정말 몰랐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그냥 모른 척 암묵적 동의를 했을까? 본인이 아닌 이상 그 마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고대성 회장의 마음에 그런 심마가 파고들었다면 제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삶에 회의를 느꼈을 것 같다.

“아버지가 벌써?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학수야. 네 생각은 어때? 넌 그래도 마 팀장보다는 우리 아버지에 대해 잘 알잖아.”

고현호 상무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지, 조용히 우리 말을 경청하고 있던 김학수 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글쎄요. 상무님은 아들이라서 회장님의 낯선 스킨십이 감동으로 다가왔겠지만, 확실히 평상시 회장님의 모습은 아닙니다. 어쩌면 마 팀장 말처럼 이번 일로 회장직에 대한 회의를 느끼셨을 수도 있고요.”

“학수, 네 생각도 그렇다는 거야?”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냥 회장님의 행동이 평상시와 다르시다는 느낌만 받았습니다. 사실 회장님이 다정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언제인지 상무님도 기억이 감감하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는 건 뭔지 몰라도 심경의 변화가 생기시지 않았을까요?”

“아···! 젠장.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버지의 손길에 바보같이 눈물이나 흘릴 뻔한 거네. 사실은 둘째 형 때문에 아버지가 상처받았을 수도 있는 건데.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자.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갑자기 회의를 마무리 지어버린 고현호 상무는 우울한 얼굴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생각보다 충격이 크셨나 보네요. 갑자기 어딜 가시는 걸까요?”

“회장님을 뵈러 가는 걸 겁니다.”

“설마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러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 이거 제가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 제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요.”

“아닙니다. 잘했습니다. 아니면 좋겠지만 사실이라면 갑자기 닥치는 것보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겁니다.”

“휴. 이것 참. 그런데 우린 지금 상황을 좋아해야 하는 겁니까 말아야 하는 겁니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겠죠.”

“어떤 의미에서요?”

“어쨌거나 치열할 줄 알았던 후계자 싸움이 쉽게 끝난 건 좋고.”

“나쁜 건요?”

“이제 동지 그룹 전체를 조율해야 하니 지금보다 훨씬 바빠지겠죠? 이거 잘하면 상무님을 포함해서 우리 세 사람 다 약혼녀에게 소박을 맞을 수도 있겠는데요? 허허허.”

“윽···. 지금 그렇게 웃음이 나오십니까? 그럼 엄청나게 나쁜 거잖아요.”

“허허허. 어쩌겠습니까? 이제 와서 회장님 결정을 물릴 수도 없을 텐데요.”

“아···. 망했네. 망했어. 이러면 연말에 어디 놀러도 못 가겠네요?”

“그렇겠죠. 아마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자꾸 그렇게 웃지 마세요. 으어어.”

***

동지그룹의 소유의 작은 수목원.

수목원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다보면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로 아담한 저수지가 하나 나온다. 늦가을 바닥에 소복이 쌓인 알록달록한 낙엽들이 색조화장을 하듯 저수지 주변을 예쁘게 수놓았다.

가을의 끝자락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 그 평화로운 풍경 속에 한 남자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중절모와 뿔테 안경 때문에 정확히 짐작하기 어렵지만 얼굴 아래를 덮은 새하얀 수염이 적지 않은 나이임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잠시 후 평화롭던 저수지로 젊은 남자가 찾아와 낚시꾼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조용했던 그곳의 정적이 깨졌고, 미끼를 물려고 다가오던 물고기가 멀리 달아나버렸다.

젊은 남자는 서울 동지그룹 본사에서 회의를 하다 말고 나가버린 고현호 상무였고, 낚시꾼은 그의 아버지 고대성 회장이었다.

“에잉. 쯧쯧. 너 때문에 물고기 달아나버렸지 않느냐.”

“아버지.”

“숨넘어가겠다. 무슨 일인데 얼굴에 그렇게 못마땅한 표정이 가득해?”

고현호 상무는 그제야 뭔가 달라진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 평상시의 그라면 호통을 쳤으면 쳤지, 절대 이렇게 점잖게 반응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로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지 뭘 그렇게 ‘아들’이라는 단어까지 가져와?”

“혹시 은퇴하실 겁니까?”

“뭐? 허허허. 내가 은퇴를?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은퇴하실 겁니까?”

“에잉. 또 그 녀석 짓인가 보군. 하여간 귀신같이 눈치가 빨라.”

“아버지! 그럼 마 팀장 말이 사실이란 말씀입니까?”

“왜? 나는 은퇴하면 안 돼? 그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힘들게 살아왔으니 이제 좀 쉴 때도 된 것 같은데.”

고대성 회장은 별다른 부정 없이 자신의 은퇴를 쉽게 인정했다. 고현호 상무는 너무나도 약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아직 정정하지 않습니까?”

“정정하니까 그만하려는 거야. 너도 잘 알잖아.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래서 아직 힘이 있을 때 나도 인생을 즐겨보려는 거야.”

“그건 조금 나중에 해도 되지 않습니까? 왜 벌써 은퇴를 하시려고요?”

“미루다 보면 너무 늦어.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다 보니 이 삶 또한 나쁘지 않더구나.”

“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허허. 이 녀석 보게. 설마 벌써 김칫국부터 마시는 게야? 네가 부족한 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럼 저 말고 물려줄 다른 사람이 있기는 하고요?”

“허허···. 녀석 참. 확실히 배짱이 늘었네. 그려. 그렇지 너 말고 이젠 없지. 알긴 잘 아는구나.”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 아직 부족하니 아직 은퇴하지 마세요.”

“됐다. 모든 일은 원래 처음이 어려운 법. 닥치면 다 하게 된다. 그리고 당분간은 진성이가 회장직을 대신 할 테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녀석이 말이야, 같이 은퇴하자고 했더니 싫다고 거절을 하더구나.”

“작은아버지는 작은아버지고요. 아버지는 아니잖습니까? 전 아버지에게 배운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옆에서 찬찬히 가르쳐 주셔야죠.”

“됐다. 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물어볼 게 있으면 여기로 오면 돼. 그러니 약해빠진 소리는 하지 말고 그만 올라가거라.”

“아버지!”

“어허. 그만 올라가래도. 그리고 이제 주주총회 전까진 더는 여길 찾아오지도 말고.”

============================ 작품 후기 ============================

이제 한 편만 더 쓰면 될 것 같은데... 결국 2016년에 마무리 지을 것 같군요 ㅠ

뭔가 반전을 넣을까 고민하다 포기했습니다. 그런 건 역시 제 스타일이 아니라. 무난하게 편안한 글이 저는 좋거든요. 이렇게 스포일러를 합니다. ㅠㅜ

다음 편 쯤에 완결은 되지만 외전 형식으로 몇 편 더 쓸겁니다. 미진하거나 아쉬운 부분은 그렇게 마무리할 생각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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